메멘토 모리

1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2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3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5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6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12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 90:1-12)

성도추모주일

우리 교회는 2019년부터 매년 ‘대림절 둘째 주일’을 ‘성도추모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올해로 7년째니 이제 많이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교우는 ‘성도추모주일’이 아직 낯설고, 왜 하필 ‘대림절 둘째 주일’에 지키는지도 궁금할 것입니다.

전례를 중시하는 서구 교회 대부분은 매년 11월 1일을 ‘All Saints Day’로 지킵니다. 우리말로는 ‘모든 성인의 날’이나 ‘만성절(萬聖節)’로 번역됩니다. ‘할로윈’도 여기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All Hallows Day Evening’이란 말에서 ‘Halloween’이 나왔는데, Hallow는 Saint의 고어입니다. 그러니까 ‘Halloween’은 원래 ‘모든 성인의 날 전야(前夜)’라는 뜻이고, 그래서 10월 31일 밤에 축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구 교회 일부 교단은 매년 11월 첫째 주일을 ‘All Saints Sunday’로 정하고, 한 해 동안 소천(召天)한 성도들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성도추모주일을 지키는 것은 여기에서 왔습니다. 다만 11월 첫째 주일이 아니라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지키는 것은 당시 우리 교회가 11월 첫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기에 그 대안으로 찾은 것이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대림절은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로 오셨던 ‘성탄’과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두 번째로 오실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심’은 달리 말하면 ‘모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고, 나는 그분을 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오심’과 ‘모심’을 역사적 사건인 성탄과 재림이 아니라 개인적 사건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오시고 내가 그분을 내 안에 모신 첫 번째 시간은 내가 세례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종말이 아닌 개인의 종말도 있습니다. 아마도 역사의 종말 이전에 우리 대부분은 개인의 종말—죽음을 먼저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다시 다가오실 것이고, 나는 그분 앞에—(사랑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이것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초림과 재림, 성탄과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절은 총 네 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앞의 두 주는 재림과 종말에, 그리고 뒤의 두 주는 초림과 성탄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도추모주일로 지킬 주일을 찾다가 대림절 둘째 주일로 정한 것은 연말이라는 점과 이날이 재림과 종말에 초점을 맞춘 날이라는 것을 깊이 고려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림절 첫째 주일에는 ‘역사의 종말’에, 그리고 둘째 주일에는 ‘개인의 종말’에 초점을 맞추자는 취지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사람, 길이 된 사람

성도추모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는 ① 지난 한 해 동안 소천하신 우리 교회 성도, ② 역대 담임목사님과 사모님들 가운데 소천한 분들, 그리고 ③ 교우들이 신청한 가족분들을 함께 추모합니다. 올해 추모 대상자는 총 32분입니다. 이 모든 분을 한마음으로 추모하면서, 그중 올해 고인이 되신 이충언 장로님과 야마다 사다오 선생님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충언 장로님은 올해 5월 12일, 만 81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저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세월이 40년이 넘는데, 추모예배를 준비하면서 장로님의 일생을 돌아보니 ‘사랑의 사람’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추모예배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눴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 가운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폭음이 울리는 전쟁터 국경 산악마을에서 총상을 입은 스무 살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가 묻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시인은 답합니다. “두렵지요. 죽음은 나도 늘 두렵지요. 사랑하다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지요.” 과연 우리는 사랑 ‘있이’ 삽니까, 아니면 사랑 ‘없이’ 삽니까? 사랑 ‘있이’ 산다면 과연 무엇을 사랑합니까? 이 장로님은 한평생을 예수 사랑, 교회 사랑, 가족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장로님을 떠나보내면서 그 믿음과 열정과 사랑을 기억하고 본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일본 자매교회 야마다 사다오 선생님은 올해 8월 21일, 만 8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교제하게 된 것은 지난 2016년에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면서부터니 꼭 10년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열린 장례 예배를 위해 추모사를 준비할 때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제목의 시가 떠올라 이런 말로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서울제일교회와 니시카타마치교회에 선생님은 ‘봄길’이셨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된 사람’이셨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스스로 봄길이 되어 지난 50년을 한결같이 걸어오셨습니다. 덕분에 우리 두 교회는 지금까지도 교류하며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신뢰를 튼튼히 쌓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가능했고, 선생님이 계셨던 만큼 두 교회 관계는 좋아졌고 또 깊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박형규 목사 추모집>에 기고한 글에서 “박형규 목사와 서울제일교회와의 만남에 의해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방한해서 보고 만나고 들으면서 한국을 점점 알게 되었고, 한국을 알게 되니 비로소 일본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성서는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을 ‘정의’라고 증언합니다. 선생님은 그 정의의 길을 손수 만들고 걸어가는 신앙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선생님이 만들고 걸어가신 그 길은 사랑의 길이요, 평화의 길이며, 화해의 길이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이충언 장로님은 ‘사랑의 사람’이었고, 야마다 사다오 선생님은 ‘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성도추모주일 ‘추모 대상자’가 되었을 때,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소망을 이루려면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메멘토 모리

성도추모주일을 맞아 시편 90편을 본문으로 택했고, 또 증언 제목을 ‘메멘토 모리’라고 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경구(警句)입니다.

이 경구와는 달리 우리의 평소 관심은 일반적으로 ‘사는 것’에만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well-being’에 관심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에 집중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뒷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용어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생사화복, 생사고락, 생사확인, 생사기로” 등등 언제나 생(生)이 사(死)보다 앞섭니다. 즉 ‘사는 것’이 일차적 관심이요, ‘죽음’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저는 죽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일부러 회피하고, 잘 사는 것에만 집중하는 우리 삶의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 때문에 우리는 매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지만, 실은 의미 없이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사’의 순서를 ‘사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의 바탕 위에서만 생은 생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전도서 7장 2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고 했고, 7장 4절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잔칫집이란 언제나 흥겹게 마련이고, 마음껏 먹고 마시는 곳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인생은 그처럼 자기 기분과 욕구만을 좇아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과 더불어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매일 덧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마음이 초상집에 가 있는 사람은 매일 하루하루가 자기 죽음의 날일 수 있다는 자각 속에 살아가기에, 그 죽음의 바탕 위에서 참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잔칫집입니까, 아니면 초상집입니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사람들은 태어나면 삶이 시작되고, 숨이 끊어지면 죽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며,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지 않은 것에는 죽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살아있지 않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생명의 속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생명 속에는 이미 죽음이 배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탄생은 곧 죽음의 탄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는 삶의 속성이며 현실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제대로 바라봄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하는 것이 삶이 아니라는 것, 즉 생명이란 죽음 없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생명이란 ‘죽음에서 벗어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끌어안기’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매년 대림절마다 이미 오신 예수님과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성도추모주일은 단순히 우리보다 앞서가신 성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주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앞서가신 성도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고인에게 본받을 점은 무엇인지, 고인이 살면서 부족했다고 또는 후회스러웠다고 여겨 남겨진 이들에게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 유지(遺志)를 잘 받드는 것이 진정한 추모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90편 12절은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라고 노래합니다. 이 말은 오늘 증언 제목인 ‘메멘토 모리,’ 즉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와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애플의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어느 해에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분명 옳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지난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하려는 일을 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그 답이 ‘아니오'였다면, 나는 무엇인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인생의 큰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의 말처럼 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 내가 죽을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은 나의 여생을 다르게 살게 하는 원천입니다. 웰다잉(well-dying)은 ‘잘 죽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여생을 ‘잘 살기’(well-being) 위한 것입니다. 웰다잉은 웰빙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들, 즉 후회 없는 삶, 나눔, 인생의 의미 찾기 등을 채워줌으로써 삶을 행복하게 완성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도추모주일을 맞아 이것을 기억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여생을 사실 수 있기를 빕니다. 그래서 훗날 앞서간 성도들과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해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