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감사

9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0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11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 (신 26:9-11)

2025년 추수감사주일

오늘 ‘2025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빕니다. 제가 서울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미국교회 전통을 따라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 전통을 따라 ‘추석’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교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11월 첫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다 올해부터 11월 셋째 주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추수가 늦어지는 것이 첫째 이유였고, 매년 11월 첫째 주일에 큰 규모의 마라톤대회가 있어 지각하는 교우가 많은 것이 둘째 이유였습니다.

이에 따라 저절로 장점이 하나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추수감사주일을 교회력으로 한 해의 (거의) 마지막 주일에 지키게 되어 한 해를 ‘감사’로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신앙적으로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적 신앙고백

오늘 본문은 성서일과(RCL)가 추수감사주일 구약 본문으로 제시한 말씀입니다. 원래는 신명기 26장 1절로 11절인데, 분량 때문에 앞부분은 생략했습니다. 생략한 부분까지 포함해서 전체를 보면, 오늘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후 드린 첫 번째 추수감사절 예배(제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그 땅에 당신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고 살 때에, 2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서 거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신 26:1-2)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거둔 농산물들의 첫 열매를 성소로 가지고 가서 제단에 바친 후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5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 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6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7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8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9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 26:5-9)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입니다. 저들은 다섯 절에 불과한 짧은 문장 속에 자기 ‘역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이 이스라엘의 민족사적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봅니다. 학자들은 이 신앙고백을 초기에는 개별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하다가, 마침내는 민족적인 축제 때에—특별히 추수감사절 예배 때에 공동체적으로 이 신앙고백을 암송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렇듯 저들은 예배를 통해 민족의 역사를 자기 기억으로 바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과거의 현재화’입니다. 저들은 과거 조상들이 역사 속에서 경험했던 구원 사건을 자기 신앙으로 고백하면서 현재 자신들의 구원 사건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뿌리를 돌아보고, 나아가서 내가 누구인지, 내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확인했습니다.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시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추수감사절 예배 때마다 신명기 26장 5-9절에 전승된 ‘민족사적 신앙고백’을 암송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내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서울제일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오늘 ‘2025년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서울제일교회 공동체도 이스라엘 민족처럼 개인적인 감사를 넘어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감사를 드렸으면 합니다.

물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개인적인 감사의 제목이 많을 것입니다. 언뜻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매 순간 함께 하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경과 시련도 크고 많았지만, 하나님 은혜가 더 크고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그 모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의 민족사적 신앙고백인 만큼 올해 추수감사주일에는 우리 서울제일교회 공동체가 체험한 감사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 서울제일교회 공동체의 ‘존재 자체’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드리면서 ‘서울제일교회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첫 문장은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로,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아마 모든 교회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 ‘참말’은 아닙니다. ‘빈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고백이 참말인지 빈말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변화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빈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빈말하는 공동체가 아닌 것에 자긍심을 느끼며 그런 공동체의 일원인 것에 감사합니다.

둘째, 우리와 세상의 변화를 위해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열심인 것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 일상에서 기후정의금식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의 변화를 위해 햇빛발전소 세우는 일에도 열심입니다. 올해만 해도 봉화교회와 서제빌딩에 두 개의 햇빛발전소를 세웠고, 내년에도 최소한 2기를 더 세울 예정입니다. 우리가 마중물이 되어 펼친 햇빛발전소 선교는 벌써 우리 교단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타 교단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작은 교회지만,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시기를’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기꺼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길’ 원하는 교회에서 목회한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하나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난 6월 4일 국민주권 정부가 출범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12.3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내란 정국에서 국회로 달려가 계엄군을 막고, 여의도에 모여 탄핵소추안 가결을 외치고, 광화문에 모여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외친 결과였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 주말마다 많은 국민이 촛불행동에 함께했지만, 극우화된 한국교회는 탄핵 반대를 외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편, 국민 편에 서서 결국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특히 사회부를 중심으로 많은 교우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촛불행동에 참여한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국민주권 정부참여한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국민주권 정부의 출범에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감사할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국민주권 정부의 출범은 일부 극우 세력을 제외한 국민 대부분이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지만, 참여자의 기쁨과 감사는 훨씬 더 큽니다. 따라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국민과 더불어 크게 기뻐하고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넷째, 1983년에 시작된 군사정권의 교회파괴 공작을 40년 만에 거의 완전히 극복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난 2022년 말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서울제일교회를 대상으로 보안사가 공작한 것은 방첩, 군 첩보 수집 등 직무 범위를 벗어난 위법행위이며, 폭력 사건 방치·축소·은폐를 공모한 수사기관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라며 국가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정부 공작에 포섭되어 교회를 분열한 소위 2부 교인들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저들은 비록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2023년 말에 교회에서 완전히 퇴거했습니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 그동안 2부가 점거하고 있던 교회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교회당과 서제빌딩을 완전히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도 일부 승소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지난 40년간 정의의 편에 서서 굳건하게 교회를 지켜온 신앙 선배들의 노고 덕분입니다. 또한 비록 더디더라도 진실은 밝혀지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을 체험하게 했기에 감사합니다. 이 승리는 우리가 결코 변절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정의의 편에 서게 할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남겨진 숙제도 있습니다. 7년간의 노상 예배로 당시 교회학교 세대에 공백이 생겼고, 이 공백은 우리 교회의 지속 가능성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이 좋은 교회가 점점 고령화되어 가서 힘을 잃고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 앞에서 우리는 지혜와 능력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다음 주일에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전교인 수양회를 여는 것입니다. 그러니 꼭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가가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취해야 할 새 세상에 대한 은유입니다. 즉 일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받고 존중받고 필요한 것을 누리며 사는 세상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격도 능력도 부족하지만, 그런 우리를 기꺼이 불러 당신 동역자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맡겨진 소명에 충성하는 우리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