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2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3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4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2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4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2-4; 2:2-4)

예언자 하박국의 항의

창조절 아홉 번째 주일인 오늘, 성서일과(RCL)가 제시한 구약 본문은 하박국서의 말씀입니다. 12소예언서 가운데 8번째 책인 하박국서는 좀 특별합니다. 다른 예언서는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시면, 예언자가 그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서는 예언자가 직접 하나님께 계시를 요청하고 그 답을 얻어내는 특이한 형태를 취합니다.

하박국이 활동하였을 때는 신 바빌론 제국이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7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로서 598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지도층 인사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시대의 사람입니다. 조국이 멸망하고, 동포가 타국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고 기막혔겠습니까! 그래서 1장 1절에서 “이것은 예언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말씀이다”라는 서언 이후에 다짜고짜 항의가 터져 나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합 1:2)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듣지 않으시고’라는 구절과 ‘구해 주지 않으시니’라는 구절에는 예언자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는 살려 달라는 부르짖음이 넘치는 세상, 나아가 “폭력이다” 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1장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에서(1:5-11)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갈대아 사람들을 채찍 삼아 유다를 심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퉁거리며 의문을 제기합니다(1:12-17). 그의 백성이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그들보다 더 악하고 무도한 나라, 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섬기는 나라를 들어 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 정의에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는 분이, 힘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왜 그냥 두고 보시느냐는 항의입니다.

끝이 곧 온다는 하나님의 응답과 의인의 믿음

2장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려고 초소 위로 올라갑니다. 비장한 결단입니다. 답을 듣지 못하면 내려오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당신이 보여주는 묵시를 기록하여 모든 사람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묵시는 한 마디로 끝이 곧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한 때가 되면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날’은 ‘힘을 신처럼 숭상하는 제국이 멸망하는 날’입니다. 비록 지금은 저들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저들이 기고만장하고 있지만, 저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2장 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2:3cd)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2장 4절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의 능력’을 말하면서 인용했던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2:4c). 많은 그리스도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이 말씀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지금 현실은 비록 ‘지옥’이더라도 주님이 약속한 그날이 오면 끝내 ‘천국’이 도래할 것이니,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뜻일까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emunah)’의 번역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믿음’(faith)뿐 아니라 ‘신실함/성실함’(faithfulness)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심지어 ‘책임감’(responsibility)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은 “의인은 신실함으로 산다”나 “의인은 책임감으로 산다”라는 말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이 번역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현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불이익이 있어도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비록 지금 우리의 현실이 지옥이지만, (잠시 주님이 직무를 유기하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신실함과 책임감을 잃지 않고 하나님 동역자로서 내 소명을 다하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본회퍼 목사가 말한 “어른이 된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참여적 종말론

따라서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기다리는 능동적인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인의 믿음’을 이렇게 해석하면 1장 본문의 하박국의 항의도 다르게 들립니다. 1장 2절에서 하박국은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합 1:2)

여기서 ‘폭력’은 ‘하마스’(hamas)의 번역어인데, 그것은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현실을 요약한 말입니다.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하는 일에만 열심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약탈과 폭력, 다툼과 시비가 그칠 새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을 구원하신 후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하게 돌보는 나라에 대한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병약하다고 하여 버림받지 않고, 가진 것이 없다 하여 천대받거나 모욕당하지 않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 하여 착취당하지 않는 사회 말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는 말씀이나, 추수할 때에 밭의 한 모퉁이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라는 말은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한 최소의 장치였습니다.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것은 가진 자들의 자선 행위가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약탈과 폭력, 다툼과 시비가 뒤따랐습니다. 하박국은 이것을 1장 4절에서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해이해졌다.’ ‘공의가 시행되지 못한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한다.’ 하박국은 이런 불의한 현실을 고발하며 하나님께 언제까지 내버려 두실 거냐고 항의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이 절박한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이미 듣고 있단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응답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건만 너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은데, 너희는 내가 그 세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구나. 나는 너희가 나의 귀가 되고, 나의 입이 되고,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저는 이 강단에서 그리스도인은 ‘묵시적 종말론자’가 아니라 ‘협력적 종말론자’여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왜?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합력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구원의 성취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하나님과 우리가 힘을 합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하나님이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동역자’ (co-worker, not sub-worker)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다 응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이르렀든지, 우리는 그 분량만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큰 문제에 비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새로운 세상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 풀처럼 보잘것없는 것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마리를 보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당장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씨를 심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박국 예언자처럼 당신의 직무를 유기한 듯 보이는 하나님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하고 항의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너희는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물으시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너희 스스로 희망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 70여 년간 우리 서울제일교회는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순종해 왔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래야 하고, 그래야 비로소 무늬만 교회가 아닌 진짜 교회일 수 있습니다. 오늘 임직받는 소소영 장로님을 비롯하여, 우리가 모두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소명을 기꺼이 그리고 능히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