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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3년
제목 [2.12] 생명을 택하여라!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3-02-15
조회수 62
첨부파일
p230212_질그릇_1단.pdf

생명을 택하여라!

 

15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16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7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18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19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20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살 것입니다. (30:15-20)

 

신명기 개론

주현절 여섯째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신명기 3015절로 20절 말씀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된 대림절 첫째 주일 이래, 성탄 절기와 지난주일 주현절 다섯째 주일까지 총 11주 동안, 성서일과표(RCL)가 제시한 구약 본문은 모두 예언서였습니다. 그것도 딱 한 번 미가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사야서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오늘 본문이 신명기라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 성경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성격이 어떠한지는 책 제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드바림’(말씀)으로 부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성경 신명기 11절 첫 단어인데, 신명기가 요단강 동쪽 아라바 광야에서 모세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한 말씀(드바림)임을 나타냅니다. 그리스어로 된 70인역 성경에서 이 책의 이름을 1718절에서 따온 듀테로노미온’(두 번째 법전)입니다. 이는 시내산 율법을 다시금 부연 설명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 이름 신명기도 이 그리스 역본의 성경 이름을 따른 중국어 성경 이름 申命記에서 왔습니다. 중국어 申命記(션밍찌)는 되풀이할 신() 자에 명할 명() , 그리고 기록할 기() 자를 써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되풀이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제목 듀터로노미’(Deuteronomy)도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신명기의 무대는 모압 땅입니다. 모세오경에서 백성들의 여정을 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91절에서 시내산에 도착하여, 레위기를 거쳐 민수기 1010절까지 진지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011절에서 시내산을 출발하여 광야 여행을 계속하였고, 마침내 요단 기슭 모압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게 될 신세대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때 지켜야 할 삶의 정신과 태도를 세 차례에 걸쳐서(1~4, 5~28, 29~30) 설교합니다. 그 설교 모음집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황하게 설교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느보산 봉우리에서 약속의 땅 전경을 보고 난 뒤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는 하나님 뜻에 따르지 않아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던 철부지 같은 이스라엘을 홀로 떠나보내야 하는 모세의 애끓는 심정이 물신 배어 있습니다. , 신명기는 자기 생을 마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딱 알맞은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나이 든 지도자의 따사로운 권고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가 죽음 직전에 남긴 유언(遺言)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 유언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선택(選擇)하라?

본문 15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어서 19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지금 모세는 한쪽에는 생명과 번영 그리고 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죽음과 파멸, 그리고 저주를 놓고 선택하라고 합니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할 것이냐 망()할 것이냐, ()을 받을 것이냐 화()를 부를 것이냐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수없이 많이 읽은 너무나 유명한 그리고 결론도 너무 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증언을 준비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이 두 가지 생겼습니다.



첫째, ‘선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합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라는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순간의 선택이 10년 아니 평~생을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실로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갑이냐 을이냐를 놓고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잡음이면서 동시에 놓아버림입니다. 갑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갑을 잡고 을을 놓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에는 두 가지가 뒤따릅니다. ‘잡음으로서의 선택놓아버림으로서의 선택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는, ‘선택하는 결단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버리는 결단포기하는 결단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가 선택한 바에 대해서 일정 기간 또는 평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선택에 대해 일정 기간 또는 평생을 심판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타인의 선택 때문에 나도 연대 책임을 져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선거가 그 대표적인 경우고, 탄소배출에 따른 기후위기도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선택은 유희가 아닙니다. 게임이나 장난이 아닙니다. 생사가 관련된 문제입니다. 올바른 선택은 생명을 낳고, 잘못된 선택은 죽음을 낳습니다. 나뿐 아니라 남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선택은 늘 신중해야 합니다.



둘째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흥할 것이냐 망할 것이냐, 복을 받을 것이냐 화를 부를 것이냐가 선택일 수 있는지입니다. 우리가 갑이냐 을이냐를 놓고 둘 중에 어떤 것을 고를까 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갑에도 을에도 각각 나름대로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갑은 100% 좋고, 을은 100% 나쁘다면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누구나 갑을 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당위(當爲)’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한쪽에는 생명과 번영 그리고 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죽음과 파멸, 그리고 저주를 놓고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선택일 수 있습니까? 한쪽은 선()이고 다른 쪽은 악()인데, 한쪽은 Good이고 다른 쪽은 Evil인데, 어느 바보가어느 미친 사람이 전자가 아닌 후자를 고르겠습니까! 이런 건 선택이 아니고 당위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참과 거짓, 선과 악, 생명과 죽음, Good & Evil 가운데 선택의 여지 없이 당연히 전자를 골랐습니까? 아담은 어땠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까? 안 따 먹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첫 청중이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섬겼습니까? 아니면 우상을 숭배했습니까? 놀랍게도 저들은 하나같이 전자가 아닌 후자를 골랐습니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흥할 것이냐 망할 것이냐, 복을 받을 것이냐 화를 부를 것이냐를 선택에 있어, 저들은 한결같이 후자를 택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과연 우리의 선택은 다를까요?



포기할 것이 없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 번영과 파멸, 복과 저주 중에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택할 정상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 대부분이 사람은 전자가 아닌 후자를 선택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정상적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정상적이면 전자를 택할 텐데, 비정상적이어서 후자를 택하는 것입니다. 둘째, 거짓이 참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으로 가장한 죽음, 번영으로 가장한 파멸, 복으로 가장한 저주를 사람들이 속아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게 참 생명인지, 생명으로 가장한 죽음인지를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사람은 눈에 비늘이 덮여서 그것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생명이 죽음으로 보이고, 죽음이 생명으로 보입니다. 맹목적이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맹목(盲目)’이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만 보고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학습되어서 그렇습니다. 길들어서 그렇습니다. 가짜 뉴스가, 거짓 복음이 그렇다고 세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슴을 말이라고 했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故事)나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은 권세나 거짓에 속아 참을 보지 못합니다.

 

문명의 정상성과 하나님의 급진성

저는 종교의 기능을 맹목적인 인간안목을 가진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목(眼目)’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좋고 나쁨 또는 진위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실 종교는 거꾸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안목을 없애고 맹목적 인간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맹신자(盲信者)를 병자(病者)라고 생각합니다. 맹신(盲信)은 광신(狂信)을 낳는데, 그것은 정신병이 일종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월터 윙크(Walter Wink)라는 미국의 성서학자는 현대의 진짜 종교는 (power)의 숭배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 명예, 지위 등을 가지려고 또는 지키려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뒷배 삼고자 하는 바람은 하나님으로 가장한 힘을 숭배하는 것 아닙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신명기 56절에서 야훼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당신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 소개는 출애굽기 202절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까닭은 그가 히브리의 이집트 노예살이를 외면하지 않고 긍휼히 여겨, 그 종살이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 야훼가 노예들을 편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하나님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훼만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훼 유일신앙(Mono-Yahwism=‘오직 야훼만’)의 참뜻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 아닙니까?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 1222, 대림절 넷째 주일에 임마누엘, 케노시스, 인카네이션이라는 제목으로 증언하면서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결론부를 오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강대한 제국 로마의 식민지 변방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인 비천한 아이, 우리는 그분을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그 예수와 만나 참사람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사랑, 케노시스의 사랑, 인카네이션의 사랑에서 해방과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강한 데서 약한 데로, 부한 데서 가난한 데로 흐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그 흐름의 법칙과 원칙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약한 데서 강한 데로, 낮은 데서 높은 데로, 가난한 데서 부한 데로. 그래서 강한 자는 더 강해지고, 약한 자는 더 약해집니다. 낮은 자는 더 낮아지고, 높은 자는 더 높아집니다. 부한 자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집니다. 이렇게 거꾸로 살았기에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되어간 것입니다.



인용이 길어졌는데, 한 마디로 신약의 하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냥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나,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아니 정확히 말하면 야훼 유일신앙은 약자를 편드는 하나님’, 아니 연약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힘의 추구와는 정반대입니다.



앞에서 제가 현대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류는 문명이라는 것을 시작한 때부터 힘을 추구해 왔습니다. 문명과 힘의 관계는 닭과 달걀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무엇이 먼저인지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명과 힘은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 관계입니다. 따로 떼려 하여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문명과 힘의 숭배나 추구는 늘 함께해왔습니다. ? 문명은 생산력의 향상으로 잉여생산물이 생겨났을 때 비로소 탄생했고, 남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내가 차지하려면 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의 결정체가 바로 제국(帝國)이었고, 구약과 신약은 제국들에 대항해 약자들을 편드신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제국은 늘 로마의 평화, 즉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했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리스도의 평화, (분배)정의에 의한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역사적 예수 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이것을 일컬어 문명의 정상성하나님의 급진성이라고 말합니다. 문명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힘은 참 좋은 거야. 힘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거든. 그러니 힘을 가져. 못 가지겠거든 힘 있는 자에게 납작 엎드려서 복종해. 그러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거야. 그게 잘 사는 방법이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이 답이야. 정의가 답이야. 그래야 혼자가 아니라,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사람답게 잘 살 수 있어. 조금 손해보더라도 나누고 섬기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야. 가져야 행복한 게 아니라 나눠줄 때 행복한 거야. 섬김을 받을 때가 아니라 섬길 때 진짜 긍지를 느낄 수 있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할 때 참된 보람을 느끼는 거야. 이게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이야. 이게 하나님 나라야.” 사람은 누구나 개별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람(human being)과 사람됨(being human)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람 사이의 연결은 늘 수평적이어야 합니다. 그 연결이 수직적으로 될 때 사람은 인간성을 잃고 악마화됩니다.



세상은 힘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기살기로 힘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세상은 힘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으로 구별되고, 전자가 후자를 차별하고, 배척하고, 소외시키고, 업신여기고, 심지어는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세상은 짐승이 사는 세상이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기독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이 있다. 다른 세상이 지금 여기서도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산다면, 우리는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도 이룰 수 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에, 나 혼자는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친다면 불가능은 가능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자. 희망하자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서울제일교회 신앙고백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큽니다. ‘힘 신앙에 길들어서 생각한 데로 살기가 힘이 듭니다. 그럴 때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벽을 넘는 담쟁이의 보폭으로 오늘도 내일도 “Do What you can! /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말을 기억하며, 생명의 길을 택하고, 마침내 스스로 생명의 길이 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