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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3년
제목 [1.22] '희망'이 되자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3-01-26
조회수 29
첨부파일
p230122_질그릇 1단.pdf



희망이 되자!

 

1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2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3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4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9:1-4)

 

11, 정월 초하루 그리고 주일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또한 계묘년이 시작되는 설날이기도 합니다. 설 연휴 중이고, 오늘이 마침 설날이어서 많은 분이 모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주일예배는 계속됩니다. 지금 교우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가득한 설 명절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굉장히 특별한 해인데, 그 이유는 양력 11일과 음력 정월 초하루가 모두 일요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양력과 음력 새해 첫날이 모두 주일’(主日), ‘주님의 날입니다. 둘 중 하루가 주일인 경우는 가끔 있어도, 둘 다 주일인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제 기억으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양력은 4년에 한 번 2월이 29일이고, 음력은 19년에 7번의 윤달이 끼어있어서 양력 11일과 음력 정월 초하루가 모두 일요일일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새해가 되면 서로서로 덕담을 나누며 ()’을 빌고, ‘희망(希望)’을 말하는데, 올해는 새해 첫날이 주일과 겹쳐 부활(復活)’이라는 의미까지 덧붙여졌습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희망부활이라는 세 가지 좋은 것이 양력과 음력에 두 번씩이나 겹쳤으니 올해는 그 출발과 조짐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이사야의 희망 메시지 배경

오늘 주일 본문은 이사야서 9장에서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구인데 새번역으로 읽으니 그 맛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동번역(개정판)으로 (4절이 아닌) 5절까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2당신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 넘치는 즐거움이 곡식을 거둘 때의 즐거움 같고,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 같아 그들이 당신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3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미디안을 쳐부수시던 날처럼, 꺾으실 것입니다. 4마구 짓밟던 군화, 피투성이 된 군복은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5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이제 생각나셨는지요? 이 말씀은 제가 1절과 5절을 발췌해서 <성탄절 예배 초대장>에 자주 쓰는 성구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구절을 예수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는 선지자가 아니라 대언자이기 때문입니다. prophetpredictor가 아니라 sub-speaker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豫言者)는 앞으로 닥쳐올 일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선견자(先見者)나 미리 아는 선지자(先知者)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 말하는 사람대언자(代言者)입니다. 현대적 개념으로는 대변인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당시 상황 속에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사람, messenger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를 알아들으려면, 먼저 당시의 상황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1:1에서 자신이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했던 시기를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라고 합니다. 또 그 장소를 유다와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1에서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자신이 예언자로서 소명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에 중동 지방에는 강력한 제국 아시리아가 등장했는데, 막강하고 잔인했던 아시리아의 군대가 약속의 땅북부에 있던 스불론 (지파의) 땅과 납달리 (지파의) 땅을 침략하여 가는 곳마다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본문 1절은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언급입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이사야 예언자는 갈릴리에 덮친 불행의 구름을, 온 지역을 감싸고 있다가 차츰 이스라엘의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어둠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본문 2절에서 느닷없이 그 지역 위에서 빛나는 찬란한 빛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특별한 기쁨에 대해 말합니다. 그 기쁨은 추수하는 사람들의 기쁨과 큰 승리를 거둔 후에 노획한 전리품을 나누는 사람들의 기쁨과 비교됩니다. 그것은 마치 기드온이 고작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이기고 얻어낸 승리처럼(17: 16-25 참조)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적들의 무기는 파괴되고 그들이 끌고 간 모든 포로가 다시 풀려나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비록 이렇게 증언했지만, 이사야가 말하는 큰 승리와 큰 기쁨, 큰 빛은 예언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적들은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역을 차례로, 예루살렘 자체가 마침내 파괴될 때까지 점령해 나갔습니다. 어둠이 온 나라를 덮친 것입니다.

이사야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또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이름처럼 이사야는 제국 아시리아 침략 앞에 놓인 유다에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희망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제 역사에서 이 메시지는 공약(空約), 빈 약속, 헛된 약속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되자!

사실 이사야의 예언 말고도 성서에는 이런 공약이 참 많이 나옵니다. 제가 앞에서 성서의 예언은 대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섰을 때 꼭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실현된 적은 별로 없습니다.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면 인간사에 개입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버려두시지도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며 아파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비록 실현되지 않더라도, 성취되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왜 그럴까요? ‘절망 한복판에서 만약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삶을 포기할 테니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헛된 희망일지라도 그것마저 없으면,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미치거나, 변절하고 말 것입니다. 인간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끝까지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든 견뎌내야 하고, 견뎌내려면 희망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가 죽음을 희망 없음이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절망 중에도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게 내가 희망을 줄 테니, 너는 그것을 받아서 희망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희망이 목적이 되는 순간 종교는 아편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절망 중에도 희망하라는 것을 넘어 절망 중에 네가 희망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묵시적 종말론참여적 종말론의 결정적 차이이기도 합니다.

저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다가 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는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중에 있는 <사랑이 되기>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여기 왔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보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고픈 것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하기

사랑이 되기

 

저는 이 시에 쓰인 사랑을 희망으로 읽었습니다.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하기, 사랑이 되기희망을 받기보다, 희망하기, 희망이 되기로 말입니다. 그래서 증언 제목도 희망이 되자!”로 정했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한 배경은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난에 이른 지금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증거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1.5도씨로 지구 온도를 제한하지 않으면 인류는 멸종한다.” 그런데 정치가와 기업가는 그 경고를 듣고도 무시합니다. ? 성장을 포기하면 정치인은 표를 잃고, 기업가는 돈을 잃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도통 바뀌지를 않습니다. ? 욕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거나 하나님이 구원하실 테니 희망하라는 메시지는 아편에 불과합니다. 이 고민이 저를 사로잡고 있었는데, 지난 주중에 저에게 깨달음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후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삶

지난 화요일(17)에 기독교환경운동연대(약칭 기환연’) 이사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틀 뒤인 목요일(19)에 이사회 단톡방에 기환연 이진형 사무총장과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신익상 소장이 각각 글을 올렸는데, 하나는 예장통합 소속 증평제일교회가 탄소흡수원 조성을 위해 몽골 은총의 숲13백만 원을 헌금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바시랜드>라는 온라인강좌 사이트에 기후위기신학포럼을 올려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의 줄임말입니다.

신학포럼에는 모두 5개의 강좌가 있었는데,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연대 김학철 교수의 강의였습니다. 평소 CBS ‘잘잘법’(잘 믿고 잘 사는 법)을 통해 유명 인사가 된 김학철 교수가 기후위기신학포럼의 구성원인 것은 알았는데, 제가 안식년이었던 관계로 한 번도 발제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들어봤더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참 쉽게 풀어놓았습니다.

그의 강의 제목은 기후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는데, 특별히 두 번째 질문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어떤 것을 더 실천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변화전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근거는 지금이 패러다임 전환기라는 것인데, 인류가 지금까지 살던 삶의 방식대로 살면 결코 기후위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동안 여러 학자가 말한 것들의 요약이었습니다. (1) 탈성장주의, (2) 탈인간중심주의, (3) 탈탐욕, 구체적으로는 탈소비주의와 탈육식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는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는 의식주 모두에서 전면적으로 삶의 질서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당연한 변화를, 마땅한 전환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손발로의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입니다. 의식과 실천의 괴리는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포기하게 하고, 마침내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악한 편으로 변절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늙어 죽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기후위기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부모로서 그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달라져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셈 치고운동

그래서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현실 앞에서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희망이 없을수록 내가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나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다는 말을 혼자는 불가능하지만, 함께라면 가능하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고받고,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의지하고, 상호 연대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혼자는 불가능하지만 함께라면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 진리를 예장 총회 증평제일교회 사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소비주의라는 높은 벽 앞에 서서 저것을 어떻게 넘을까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저들은 한 셈 치고운동을 벌여 담쟁이 넝쿨처럼 서로 함께 소비주의의 벽을 거뜬히 넘어섰습니다.

한 셈 치고운동과 헌금의 사연은 참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증평제일교회 성도들은 무엇인가를 소비하고 싶을 때마다, 소비를 한 셈 치고, 소비를 안 하거나 덜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원피스를 수선해서 입고 새 원피스를 사 입은 셈 치고, 코로나 확진 후에 영양제를 맞은 셈 치고, 버스를 타고 택시 탄 셈 치고, 두부김치 먹고 파전 먹은 셈 치고, 돼지고기 먹고 소고기 먹은 셈 치고 등등. 이렇게 경건과 절제의 실천을 바탕으로 한 한 셈 치고헌금으로 증평제일교회 성도들은 모두 13백만 원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사순절에 탄소금식 헌금을 이렇게 하면 참 좋겠습니다.

 


끝으로 제가 카톡으로 받은 설날 덕담을 하나 소개하고 마칩니다. 들녘교회 이세우 목사가 보내온 것입니다. 이세우 목사는 지금부터 거의 30년 전인 1995년에 도농교회 자매결연 때문에 만나 사귐을 가진 후에 지금까지도 교류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저는 지금껏 설날이 설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세우 목사는 ‘(일어)날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그 풀이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에게도 그렇기를 빕니다.

 


힘든 나날, 걱정되는 내일

비틀거릴지라도

다시 날은 분명 옵니다

우리 민족의 대명절 설날을 맞아

당당히 일어나 우뚝 서시길 열렬히 응원합니다.

2023! 복 많이 지으세요!

 

내친김에 이세우 목사가 신정 때 보낸 덕담도 소개합니다.

 

기후 위기, 경제 한파, 코로나 등으로

매우 힘든 한 해가 될 듯합니다.

분단, 차별과 불평등, 빈부격차, 소외, 폭력, 전쟁 등

어떤 희망도, 살아갈 용기도 가질 수 없는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우리끼리 연대하고 단결해

마침내 승리하는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