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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2년
제목 [12.25] 갓난아기로 오신 메시아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12-28
조회수 50
첨부파일
p221225_질그릇 1단.pdf


갓난아기로 오신 메시아

 

3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4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5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6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2:3-7)

 

메시아는 어벤저스가 아니다

Merry Christmas! 오늘 복되고 기쁜 성탄절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이 복되고 기쁜 이유는 인류를 악()에서 구원할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힘센 영웅으로 우리 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갓난아이로 오셨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것에 대해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류를 악으로부터 구원할 메시아의 등장에 대한 희망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꿈입니다. 그 꿈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할리우드의 수퍼히어로(superhero) 영화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초능력을 가지고 악과 싸우는 (만화 주인공 같은) 여러 영웅이 등장합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토르, 헐크, 블랙 팬서, 닥터 스트레인지 등등. 제 또래에게는 그 이름도 생소한 이런 영웅들에게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저들 중에 전통적인 수퍼히어로인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없는 이유는 디즈니가 그들에 대한 판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저들이 악한 적들과 싸워 악전고투 끝에 그들을 물리치면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 희열을 느끼기 위해, 그 대리만족감을 위해서 관객들은 기꺼이 비용을 냅니다.

할리우드는 그 영웅들에게 어벤저스(avenger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복수자들, 원수를 갚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악에 대한 응징, 복수, 원수갚음이 주요 임무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영화에서는 늘 어벤저스의 복수나 원수갚음이 성공하는데, 왜 다음 영화가 또 등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이 악을 이겼는데, 왜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악이 재등장할까요?

이유는 그래야 영화제작사가 계속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현실에서도 경험하듯이 악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물리적인 힘으로 악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힘으로 힘을,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면, 폭력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입니다. 따라서 어벤저스는 결코 메시아가 아닙니다. 잠깐의 오락거리나 현실 도피용 환각제판타지일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저들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힘이 최고다. 힘이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반메시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 곁으로 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제국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집트 제국의 압제로부터 탈출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여러 제국에 의해 시달려왔습니다. 아시리아, 메데, 바빌론, 마케도니아, 로마. 저들은 연이어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지배했습니다. 착취하고 수탈했습니다. 그 수난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국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구세주가 힘센 영웅이 아니라 연약한 갓난아이로 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福音), 기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게 과연 복음일 수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 바로 앞에는, 예수의 탄생 시기가 아우구스투스 황제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2:1-2). 누가가 이처럼 예수의 탄생을 세계사적 사건과 연결하고 있는 까닭은 그분의 오심이 갖는 시대사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분오열되었던 나라를 (군사력으로) 통일하고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하던 때, 사람들이 흔히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일컬었던 그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평화는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소수의 로마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였습니다. 그들의 사치스러운 삶과 평안을 위해 다수의 사람이 희생당해야 했던 당시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세상에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우구스투스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메시아는 말을 타고 오는 초인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메시아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로마의 강한 군대가 아니라, 구유에 누인 갓난아기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약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 말라고 합니다. 냉혹한 세상은 우리의 약함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무정한 세상은 연약한 자들을 짓밟기도 합니다. 이렇듯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는 것이 자연이 정한 법칙인 양 여겨지고 있던 당시에, 사람들은 강력한 구원자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뜬금없이 한 아기의 탄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누군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강력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니 말입니다. 어른들은 가장 따뜻한 표정과 말랑말랑한 언어를 가지고 아기에게 다가갑니다. 아이는 힘으로 지배하지 않지만,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어른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을 끌어냅니다.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연약한 것이 세상을 구합니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를 보면 흙 한 줌 보태주고 싶고, 떨고 있는 짐승을 보면 거둬주고 싶고, 우는 아기를 보면 달래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이렇듯 연약한 것들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던 인간됨을 소환하는 전령입니다. 작고 연약한 것 앞에 자꾸 다가갈 때 우리 영혼은 맑아집니다. 욕망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구원자가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강함으로 남을 압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약함으로 남을 포용하셨습니다.

언젠가 박노해 시인의 고백이 담긴 시 한 편을 읽었습니다.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던 그에게 이제 잘못을 인정하고 전향하라는 제안이 끝없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고집하며 끝끝내 버텼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 시대의 거대한 폭력도 끝내 무릎 꿇리지 못한 나를

단숨에 끌어당겨 무릎 꿇게 한 풀꽃의 힘

이 세상 가장 작고 여린 것들의 가장 힘센 당김!

 

그는 이른 봄 언 땅을 뚫고 돋아난 부드럽고 여린 풀잎을 보며 그 곧았던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싹은 한없이 약하고 부드럽기에 단단한 얼음 땅을 비집고 올라올 수 있습니다. 단단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겨낸다고 했던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마침내 바위에 구멍을 내고, 작은 풀포기가 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는 그 바위를 쪼개는 것은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증거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연대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메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메시아는 약한 메시아입니다. 부드러운 메시아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임마누엘, 케노시스, 인카네이션이 하나님의 사랑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강한 데서 약한 데로, 부한 데서 가난한 데로 흐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그 흐름의 법칙과 원칙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약한 데서 강한 데로, 낮은 데서 높은 데로, 가난한 데서 부한 데로. 그래서 강한 자는 더 강해지고, 약한 자는 더 약해집니다. 낮은 자는 더 낮아지고, 높은 자는 더 높아집니다. 부한 자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집니다. 이렇게 거꾸로 살았기에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되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은 임마누엘, 케노시스, 인카네이션의 삶이 지금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모범을 좇아 우리고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고 그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은 언제나 위태롭습니다. 희망은 절망의 파도에 자주 삼켜지곤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지치거나 냉소적으로 변합니다. 세상은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변하지 않는다는 비관주의가 우리를 뒤흔듭니다. 바야흐로 세상과의 타협이 시작됩니다. 이게 타락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그칠 수 없습니다. 홀로 부르는 노래는 외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가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 혹은 믿는 이들의 연대가 소중합니다. 비전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곁에 있어야 우리는 쉽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그 꿈을 공유하는 이들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 꿈을 엮어야 비전이 되고, 비전이 구체화할 때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된 성탄절을 맞아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다시 꿈꾸고 연대해 끝까지 행진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