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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2년
제목 [7.24] 주의 기도, 우리의 기도 | 신연식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07-26
조회수 146
첨부파일
p220724_질그릇 1단.pdf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하는 복음서의 말씀은 누가복음 11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마태복음과 함께 주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찾아와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구체적으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요구에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모범이 되는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의 주의 기도와 달리 누가복음의 주의 기도는 더 간결하고 짤막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길게 수식하여 부르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간결하게 아버지로만 부르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는 모두 일곱 가지 청원을 포함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다섯 가지 청원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태복음과 비교해서 누가복음의 기도문이 부족하거나 의미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수식어가 없이 간결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본래 초대 교회 공동체들 안에는 주의 기도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아빠기도가 전승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아빠기도는 굉장히 간결한 형태로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점에서 굉장히 혁명적인 기도였고, 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담은 기도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기도를 산상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연결하여 주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치기 위해 간결하지만, 핵심적인 내용만 담아 주의 기도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이어서 기도에 대한 3가지 짧은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8절의 친구의 간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 9~10절의 청하면 들어주신다라는 단절어, 그리고 11~13절의 아들의 청을 들어주는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큰 틀에서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신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하는 것으로 집약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신 하나의 일화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기도라는 큰 주제 아래 네 개의 서로 다른 전승들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기도 전승을 묶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는 예수님이 완전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참된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기도가 매우 중요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시점마다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으실 때(3:21)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6:12), 산 위에서 변모하실 때(9:28),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10:21), 따로 한적히 계실 때(11:1),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감람산에서(22:41-46) 등 예수님께서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제자도의 실천(10-일흔두명의 제자를 파송함)에 대한 가르침의 정점에 주의 기도를 놓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능동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만나거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만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기도를 통해 그 뜻을 간구하지 않는다면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가 요청되는 순간, 그 순간에 필요한 말씀이 바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문 두드리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하는 이 구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은 개업식이나 성공한 사업가의 자서전’, ‘은사주의를 강조하는 부흥 집회등입니다. 앞서 파송 받은 제자들과 달리 이 말씀을 성공주의 또는 축복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 개인적 욕구나 필요를 위해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을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선교현장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하는 노력을 잘 안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아이들이 떼를 쓰면 마지 못해 선물을 사주는 부모처럼 마구 매달리고 간절히 요청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으로 오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바라고 마구 떼쓰면서 구하면 무엇이든지 받을까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깨비방망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은 바로 앞에 있는 주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기도는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이고, 이어지는 세 개의 본문은 그 기도를 드리는 태도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의 첫머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적인 기도는 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일까요? 주의 기도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의 기도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뭘까요? 말 그대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먹을 것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삶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모든 조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 충족을 위해 무한정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그 일용할 양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용할 양식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 사이 관계의 파탄으로 인한 궁핍과 결여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은 바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농성이었습니다. 하청노동자라는 이유로 20여 년간 일해 온 숙련공이 받아 온 임금은 최저시급에 준하는 것이었습니다. 4인 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늘 허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난 5년간 삭감된 임금의 원상복구 해달라는 어쩌면 당연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방 1m의 좁은 철제상자에 자기를 가두고 이렇게 살 순 없지 않습니까?’ 하는 피켓 하나를 들고 이 무더운 여름날 31일 동안을 버텼습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정부가 법과 원칙을 주장하고 강경 대응을 예고한 데다가, 노사협상에 난항을 겪게 되면서 또 한 번의 참사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노심초사하며, 응원하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더는 한 노동자의 아픔은 한 사람의 고통이 아니게 되었고, 한 사람의 바람 역시, 그를 응원하며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난 22일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하청업체들과 협상 타결되면서 끝이 났습니다. 큰 대립이나 사고 없이 협상 타결되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30% 임금 인상을 요구했던 이들이 획득한 것은 고작 4.5%였고, 손해배상청구소송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지금 나의 양식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의 일용할 양식이 함께 충족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는 필요한 양식, 일용할 양식 때문에 늘 허덕이는 현실, 서로 물고 물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언제나 떨치기 어려운 유혹을 겪어야 하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체험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하나님의 뜻이 가로막힌 현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의 기도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요, 둘째는 그러나 희망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서 희망을 찾아 나선 이들의 기도가 곧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자세를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는 그저 주문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는 주의 기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나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 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위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구하고, 찾고, 문 두드리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하는 구약성서의 말씀은 창세기 1820절에서 32절입니다. 이 본문은 멸망을 앞둔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장면입니다. 불의와 악으로 얼룩진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다는 소식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간청합니다.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의인이 그 심판의 땅에서 함께 섞여 멸망당하면 안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만약 의인 50명만 있다면 용서해줄 수 있느냐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는 5명 적은 45명만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또 그러겠다고 하자, 이제는 40명으로 간청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은 오늘 누가복음에서 잠자리에 든 친구를 괴롭게 해서 빵을 얻었던 사람처럼 하나님께 계속해서 간청합니다. 결국, 30, 20, 10명까지 숫자를 낮춰 가며 선처를 구했고, 이에 하나님께서 수락하고야 맙니다. 아브라함이 간청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적당히 용서하거나 넘어가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 단 10명이라도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희망을 남겨둬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서라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위기 문제도 그렇습니다. 기후위기는 이미 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뉴스에서는 유럽과 북미지역에 40도가 넘는 기록적인 열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연일 보도되었습니다. 폭염으로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대규모 산불이 일어나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극빙지역이라는 불리는 북극은 반소매를 입고 다닐 만큼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어 하루에도 60억 톤의 빙하가 녹고 있다고 했고, 남극도 이상고온현상이 계속되어 눈이 내려야 할 시기인데,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기후재앙에 어느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또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어 두렵고 무섭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과연 인류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재앙을 막아 낼 수 있을까 불투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간청한다면,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종교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스위스의 신학자 레온하르트 라가츠 목사(1868~1945)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고, 그들의 강한 적을 대적할 힘을 어디서 얻는가?” 하는 실존적 물음에 오늘 누가복음 11장의 비유와 말씀이 혁명적인 답변을 내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예수가 그들에게 기도라는 초강력 무기를 주었다.”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도록 선택받은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택한사람들에게 주어진 매우 강력한 무기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인간의 협력 수단입니다. 이런 기도는, 밤중에 빵을 꾸기 위해 친구를 찾아간 사람의 간청처럼, 종종 긴급한 것이어야만 하며, “염치없는 것이어야만 하며, 집요해야만 하며, 지속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기도는 종종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부정의 한 현실과 평화 부재의 상황 속에서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땅히 행해야만 하며, 무엇을 행해서는 안 되는가를 배웁니다. 기도는 현실로부터의 종교적 도피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는 일상생활로부터, 특히 고난의 상황으로부터 요청되는 것이지만, 또한 기도는 일상적인 삶으로, 특히 고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바른 삶의 실천이야말로 삶으로 드리는 기도인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의 길을 따르는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냥 설렁설렁 또는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 한다고 되겠어? 하고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이 한 걸음 더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내 이웃을 위해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형제나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또 사회의 아픔과 전 지구적 아픔을 위해서도 정성껏 기도하십시오. 나의 시선을 확장해 머무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그곳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될 때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