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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12.26] 사랑 더하기 | 신연식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12-29
조회수 149
첨부파일
p211226_질그릇 1단.pdf

사랑 더하기

 

2:18한편, 어린 사무엘은, 모시 에봇을 입고 주님을 섬겼다. 19사무엘의 어머니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매년제사를 드리러 성소로 올라가곤 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아들에게 작은 겉옷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20그리고 엘리는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주님께 간구하여 얻은 아들을 다시 주님께 바쳤으니, 주님께서 두 분 사이에, 이 아이 대신에 다른 자녀를 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복을 빌어 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축복을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26한편,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삼상 2:18-20. 26)

 

3:12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13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3:12-14)

  



사무엘의 성장

오늘은 성탄절 첫째주일이자 송년주일입니다. 어느새 2021년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력의 새 절기가 시작되는 이번 대림절부터 성서일과 본문 중 구약의 말씀을 따라 증언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하는 구약성서의 본문은 앞서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2장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2장은 한나의 기도로 잘 알려져 있는데, ‘한나의 기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 엘가나 사이에서 아기를 갖지 못한 한나가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사무엘을 갖게 되고 그에 대한 감사찬송의 기도입니다.

한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얻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고, 제사장 엘리 곁에 두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인 212절은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의 잘못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와 달리 어린 사무엘은 반듯하게 주님을 섬겼다고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221절을 보면 주님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사역을 이을 아들들은 행실이 나쁘고 큰 죄를 저질렀는데, 반면 어린 사무엘은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하는 기록은 엘리를 잇는 그의 사역을 그의 아들들이 아닌 사무엘에게 계승하게 하려는 편집자의 수사적 의도로 읽힙니다. 그렇지만 그런 의도적 대조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반복해서 본문을 읽으면서 주님 앞에 잘 자랐다하는 구절에 눈길이 갔습니다. 사역의 계승보다 사무엘의 성장, 성숙의 의미가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한편,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잘 성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어딘가 익숙한 구절인 것 같지 않습니까? 아마도 성경을 여러번 읽은 신 분들은 이 표현이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

오늘 사무엘의 성장묘사는 누가복음 241절에서 52절까지 등장하는 소년 시절의 예수 묘사와 거의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소인 실로에 머물며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사람으로 자란 장면과 마찬가지로 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있던 예수와 그의 성장묘사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52절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았다.”하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소년 예수도,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은 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장스토리인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인 사무엘의 성장은 그렇다 쳐도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성장을 묘사하는 복음서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의 권위나 신성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굳이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할 필요가 없을 텐데, 미성숙한 이미지의 소년 예수나 성장의 장면을 굳이 포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서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성장이나 성숙이 필요 없는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점차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소년 예수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는 것 같아 더 친근하고 조금은 위안도 되었습니다. 우리가 닮아가겠다고 목표로 삼은, 또는 따라 살겠다고 하는 예수가 너무도 빈틈없고 완벽한 존재로 보인다면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 것과 같아 포기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지혜도 자라고 키도 자랐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하는 성장의 모습이 예수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능성처럼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말씀이 내내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장하고 있느냐? 아니면 멈춰있느냐? 가고 있느냐? 아니면 서 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무엘이 엘리의 뒤를 잇는 사사가 된 것은 혈통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곁에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펼쳐간 것도 우리와 존재적 차이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품고 점점 더 성장하고 성숙해갔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이고 성숙입니다. 그렇다면 남겨진 문제는 우리는 과연 성장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 공동체의 모습이 점차 자라고 성숙해가며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남겨진 과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큰 걸음을 성큼 내딛기도 어렵지만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시적인 성과가 없으면 포기하고 싶고 성장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지치기 때문입니다.

 

한라산의 경험

지난 12월 초에 모처럼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가 곳곳에 더 확산되고 있어서 되도록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다니며 쉼과 여유를 누리고 왔습니다. 제주도 일정 중 하루는 한라산에 오르기로 하고 아이들과 함께 영실코스로 갔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힘드니까 그냥 바닷가 근처 예쁜 곳에서 놀면 어때? 하는 엄마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제주도에 가면 가장 유명한 한라산에 가야 한다고 해서 겨울산행이더라도 가게 되었습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약 10여 분쯤 지나고 나니까 나무데크로 된 계단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무데크 계단을 30여 분 더 올라갔는데 갑자기 둘째 아이가 저에게 아빠, 언제까지 계단을 올라가야 해?”하고 물었습니다. 딴에는 한라산이 멋지다는 얘기를 듣고 아름다운 숲길을 생각했는데, 계단만 계속 나오니까 재미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둘이 고개를 들어 계단으로 이어진 능선을 쭉 눈으로 따라갔는데 안타깝게도 계단은 능선 꼭대기까지 쭉 계속되었습니다. 갑자기 아이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하고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주저앉은 아이들 그냥 끌고 갈 수 없어 그때 제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정윤아, 뒤를 돌아봐봐, 너 지금 엄청 많이 올라왔어.’ 아이가 제 말을 듣고 뒤를 돌아봤습니다. 어느새 구름을 낀 산 중턱까지 올라와 탁 펼쳐진 풍경에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 것을 보더니 ~! 정말 멋있다! 조금 온 줄 알았는데, 엄청 높이 올라왔네!’ 하면서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숫자를 세고, “아빠 이렇게 계단을 하나씩 오르다 보면 금방 꼭대기까지 올라가겠지?”하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꼭대기를 향해 앞만 쳐다보고 가다 보면 멀리 있는 그 목표에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언제 가나?’ ‘갈 수 있을까?’ 하며 더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열심히 온 것 같은데, 또 계단이 나오고, 또 계단이 나오면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는 가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오르던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제자리걸음인 것 같았는데 뒤를 돌아보면 ! 이만큼이나 왔네하는 것이죠. 앞만 바라보고 갈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경관도 보이고, 자신의 위치도 확인하고, 또 같이 가는 길벗도 살펴보다 보면 어느새 새 기운을 얻어서 또 한발, 한 발 내디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21년 한해를 돌아보며

2021년을 보내며, 우리는 종종 그런 불안과 조급함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2년째 이어지는 코로나 일상에다가, 기후 위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갈수록 심각해지고,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냉혹한 현실에 놓이다 보니, 한발 한발 내딛는데도 자꾸 제자리걸음 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과연 나는, 또 우리 교회는 올 한해 잘 살아온 걸까? 하는 불안과 이 정도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우리가 제대로 뭐한 게 있나?’ 하는 불만에 자꾸 조급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자칫 나 자신에게 또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6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당장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땅의 현실에 붙들려 있는 우리 시선을 자꾸만 들어올려야 합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살지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냐라는 말을 들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귀에 묶어서 사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긴박하고 시급하다고 해서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 해가 저물어 가는 2021년 송년주일, 저는 잠시 뒤를 돌아 지난 우리의 걸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과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힘들어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는 작지만 많은 일을 했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할 새 일꾼인 2명의 장로님과 4명의 권사님을 세웠고,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앞장서 참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코로나19로 좀처럼 활동하기 쉽지 않은 여건 가운데서도 끈끈한 친교를 이어가기 위해 소모임을 구성하여 활동했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하여 다양한 온라인 방안을 연구하여 온라인합창을 하기도 하고, 한일합동수양회도 성공적으로 치러냈습니다. 옥상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함께 땀을 흘리기도 하고, 손팻말로 사회적 목소리에 함께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과 멀리 있어 예배 참석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예배 생중계도 이제는 점차 자리 잡아 안정적이고 고품질의 영상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중장기적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끊임없이 회의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눈 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회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고 노력한 그 한걸음, 한걸음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각 영역에서 힘껏 애쓰며 수고한 모든 분께, 또 동행한 모든 분께 따뜻한 격려와 감사를 전합니다.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두 번째 본문은 오늘의 성서일과 중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소아시아의 상업도시, 특별히 직물산업이 발달한 한 도시로 알려진 골로새의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고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 받은 에바브라에 의해 열매를 맺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많은 교회에서 공통되게 나타난 것과 같이 골로새 공동체 안에도 잘못된 믿음과 오해들로 갈등이 많았습니다. 골로새서는 이에 대해 올바른 해법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13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그의 허물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장점과 가능성, 그리고 그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면서 그에게 공감해줄 줄 아는 사람, 상대방의 허물조차 감싸 안아주는 넉넉한 마음의 사람, 누구를 만나도 먼저 자기를 앞세우거나 심판자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 사람, 사랑에 찬 인내로 기어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납''용서'입니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일을 해나가다 보면 일하는 방식에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나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화가 날 때도 많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이뤄온 많은 일들 가운데 아쉽고 서운한 일들이 왜 없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우리는 우리가 용납되고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끄트머리사랑 더하기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본문 마지막 구절을 따서 사랑 더하기라고 정했는데, 바울은 나아가 용납하고 용서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거기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사랑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을 펼치는 선교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에도, 정의를 향하는 사회적 목소리와 교회의 내일을 꿈꾸는 비전의 회의도, 심지어 이 시대의 중점과제인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실천해갈 때도 거기에 사랑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모자란 부분은 늘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사랑을 채우고, 조금 느린 사람이 있으면 내가 속도를 늦춰서 맞추더라도 그렇게 사랑을 더해 노력하다 보면 완전하게 묶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2021년 마지막 주일에 한해를 돌아보며 여러분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제 올해가 약 일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남은 이번 한 주간은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사랑 더하기를 실천하는 한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울 때 말없이 손잡아 준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사람들, 동행하며 일한 사람들, 의견과 방식이 달라 다퉜던 사람들, 더 챙기고 배려하지 못해 미안한 사람들, 마음으로 미워진 사람들, 또 날 위해 늘 기도해준 사람들에게 꼭 마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만나서 밥을 사주면 더 좋고, 코로나로 그럴 수 없다면 전화나 편지나 그 어떤 방식으로도 괜찮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그분들에게 감사와 용서와 사랑을 더해 마음을 표현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말에 끄트머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끝이 되는 부분, 맨 끝부분이나 가장자리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의 실마리라는 의미입니다. 재미난 사실은 끄트머리라는 단어가 맨 끝부분을 뜻하지만, 동시에 일의 실마리 곧 단서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한해의 끝부분을 어떻게 잘 매듭짓냐에 따라서 새로운 한 해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는가가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또 달리 생각해 보면 한 사회의 맨 끝부분에 속한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회의 가장 주변부 소외되고 그늘진 그곳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열어가셨습니다. ‘끄트머리처럼 작고 약한 우리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실마리로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21년 마지막 끄트머리에 와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 해를 잘 매듭짓고, 희망찬 2022년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