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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6년
제목 [3.22] 다양성, 다름의 아름다움ㅣ정미현 전도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6-03-25
조회수 1300
첨부파일
p260322_질그릇 1단.pdf

다양성, 다름의 아름다움

 

1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 2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안식일을 지켜서 더럽히지 않는 사람, 그 어떤 악행에도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3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고자라도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4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5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 6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7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8쫓겨난 이스라엘 사람을 모으시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미 나에게로 모아 들인 사람들 외에 또 더 모아 들이겠다."(사 56:1-8)

 

올해 청년주일을 맞아, 어떤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를 생각하게 된 것은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지금의 우리 청년들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나이가 아주 다양합니다. 몇 살부터 몇 살까지가 청년이다 라고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격도 성향도 다양하고, 관심사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생각도 다양합니다. 심지어는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도, 생활 패턴도 다양합니다. 우리 청년들도 이렇게 다양하지만,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더 다양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양극화가 되어서, 서 있는 입장과 위치에 따라 대화와 소통이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젠더 갈등, 세대 갈등, 빈부 격차, 정치적 양극화 등의 문제들이 공기처럼 가득차 있는 시대를 살면서, 청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거나 삶의 방식들을 결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상은 진학, 취업, 결혼, 가족 등등 여러 가지 기준을 만들어 두고 ‘이런 것이 좋은 삶이다’라고 정해 두는데, 막상 그렇게 살 수 없거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할 때,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자신만의 삶을 선택하면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며, 자신의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많은 교회들은 청년들의 다양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거나, 안타깝게 여기면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 앞장서서 기준을 세우고,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판단하거나 규정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교회들이 그렇게 하는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아온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의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들을 통해. ‘나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에게 삶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길을 함께 가자고 권하는 것은, 교회가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올바른 삶의 모습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거나,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편의에 따라 배제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는 성인이 되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 당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연애를 선택하지 않기도 하고, 연애를 하더라도 결혼을 선택하지 않기도 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기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혹은, 연애도, 결혼도, 임신과 육아도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어떤 교회가,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것이 더 좋은 삶이다”라는 기준을 세우고 그런 삶을 격려하고,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해 침묵할 때,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은 자신의 삶이 평가받고 규정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는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이 퀴어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교단 산하 대학들에 공문을 보내서, 관련 세미나, 동아리, 모임 등에 참여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주의안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퀴어신학이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성소수자의 삶의 경험과 정체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신학입니다. 다시 말해 퀴어신학은, 기존의 교회들과 신학들이 소수자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정죄하면서, 권력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만의 삶의 경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져왔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인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신학자들이 퀴어신학을 공부하거나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 하거나 죄악시하는 기존의 성서 해석 대신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신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이들의 다름에서 오는 목소리를 다시 죄악시하면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은, 사실 세상이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고 무시하고 배제한다고 해도,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는 교회만큼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사실, 각기 다른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각 공간에 충만한 생명들을 각기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창세기가 이 세계를 묘사한 것을 보면, 고대의 어떤 창조 이야기보다도 더 다양하고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조 이야기이지만,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세기 1:11)

 

그냥 “땅의 식물을 만드셨다”고 묶어서 말하지 않고, 각 식물의 다름을 묘사합니다. 동물들에 대한 묘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세기 1:21)

 

하나님이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들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세기 1:25)

 

그저 ‘창조주 하나님’만 말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을 따로 적고,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말을 반복할 필요가 없을텐데, 창세기는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가 이 세계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구절은 욥기에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직접 읽어보지는 않겠지만, 욥기의 결론 부분인 38장 이하에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서 이 세계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는 장면에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제가 동물들의 이름들만 적어왔는데요, 읽어보겠습니다. 욥기 38장에서 40장까지에 나오는 동물들의 이름입니다. 따오기, 수탉, 사자, 까마귀, 염소, 들사슴, 들나귀, 날쌘 나귀, 들소, 타조, 말, 매, 독수리, 하마, 악어 등등 번역어로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물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성서가 이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고, 그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이렇게 세계의 다양함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구약성서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우리’에 속하는지, 누가 우리에 속하지 않는지를 끊임없이 구분하고 분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56장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 편협한 주장들이 있었던 시대에 쓰여진 글입니다. 56장 3절을 보겠습니다.

 

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고자라도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이사야 56:3)

 

이 본문을 보면, 당시에 이방 사람과 고자에 대한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사람이라도 ‘나를 당신의 백성과 차별하신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사람들을 향해서, “너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와 다르다”, “너는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고자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마른 장작’으로 비유하면서 비하하고 무시하는 인식들이 공공연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성서에 많이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에스라-느헤미야서에 기록된 ‘이방인 아내를 내쫓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얼마나 사회적으로 첨예한 문제였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한 장면을 같이 보겠습니다.

 

드디어, 에스라 제사장이 나서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였으므로,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제 ... 이 땅에 있는 이방 백성과 관계를 끊고, 여러분이 데리고 사는 이방인 아내들과도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에스라 10:10-11)

 

이 당시는 포로기 이후의 시대라서,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 출신의 여자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에스라는, 그것이 죄가 되니, 결혼한 아내들을 모두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 이스라엘 회중이 동의를 합니다. ‘에스라 제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수 조사를 해서 이방인 아내를 내쫓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이 반대 의견을 말합니다. 이걸 구약성서는 기록으로 남깁니다.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만 이 의견에 반대하였으며,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에게 동조하였을 뿐이다. (에스라 10:15)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은, 이 소수 의견을 듣지 않고, 많은 쪽의 의견을 따르기로 합니다.

 

포로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백성들은, 많은 쪽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에스라 제사장은 각 가문의 갈래마다 한 사람씩을 우두머리로 뽑아서, 그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 그들은 모두 손을 들어서, 아내를 내보내겠다고 서약하고, 지은 죄가 있으므로, 각자 숫양 한 마리씩을 잡아서 속죄제물로 바쳤다. (에스라 10:16,19)

 

타민족 아내와 결혼한 것이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내를 모두 내보내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잘 읽어보면, 그래서 이 아내들을 모두 다 내보냈는지는 분명하게 쓰지 않습니다. 적은 수도 아니었고, 그 사이에 낳은 자녀들도 많았으니,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 그 사회에서 이방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게 되었을지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로 죄악인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뿐만 아니라, 민수기 신명기에서도, 여호수아서에서도, 이방 민족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고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죠. 이사야 56장에서 ‘고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리스’는,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모두 ‘환관’으로 번역됩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학식 있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바벨론 왕궁으로 끌려갔는데, 왕궁에서 일하는 모든 남자는, 남성으로서의 생식 기관을 훼손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 있는 동안에는 ‘고자’가 직업과 신분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환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그들의 율법이었습니다.


고환이 터졌거나 음경이 잘린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사생아도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하고, 그 자손은 십 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신명기 23:1-2)


현대인인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규정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6장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규정이었고, 어떤 이들은 유일한 진리라고 신봉하고 있었을 율법과 전통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사야 56장은, ‘율법이 그렇게 말한 것도 알고, 전통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만, 이방인도 고자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이렇게 씁니다.

 

(고자에게)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이사야 56:5)

 

(이방인에게)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이사야 56:7)

 

이사야서는 당시 사회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을 콕 집어서,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무시받던 이들은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해 줄것이라고, 우리 내부인이 될 수 없다고 배제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성전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에서 ‘구원은 공짜가 아니다’라는 증언을 들었는데, 오늘 이사야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 (이사야 56:1)

 

여기서 공평과 공의로 번역된 단어는 미쉬파트와 체다카, 즉 정의와 공의를 말합니다. 출신도 상관 없고 신체적 조건이나 상태도 상관 없지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느냐 아니냐는 그 사람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4절과 6절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언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이 모든 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신이 고민하고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이사야 56장은,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며 차별하고 배제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그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더이상 선택할 수 없는 출신이나 신체적 조건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느냐의 문제라고 강조를 합니다.

이 이사야 56장의 시대 이후에 유대인들이 과연 이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았는가 하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은, 성서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다. 이 성서의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이야기들이 가리키는 삶의 방향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증언을 마치고 나면, “나는 네모(빈칸)입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볼 것입니다. 우리 청년분들이 각자 자기를 소개하는 글을 한 문장씩 써서 만든 영상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먼저는 자신의 남다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고, 그리고 서로의 다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 출신이나, 직업, 나이, 소속과 같은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 자신을 바라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서 각자를 바라볼 때, 우리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애쓰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고민과 애씀과 바람이,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첫 단추가 될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이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는, 차별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고,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실 겁니다. 우리가 어떤 잣대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지, 혹시 어떤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때로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럴 땐 큰 원칙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모든 존재가 존중받으며 사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