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감사

8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9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 47:8-9)

18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8)

이런 와중에 감사할 수 있는가?

올해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2024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기쁘고 복된 이날, 만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빕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오늘을 마음껏 즐길 수 없도록 합니다. 약 한 달 전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돼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열려고 했다가 취소했다고 합니다. 한강 작가가 “지금 세계 두 곳에서, 중동과 러시아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무슨 잔치냐”며 말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의 와중에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또 기후재앙은 어떻습니까? 며칠 전 스페인 남동부 지역에 극단적 폭우가 쏟아지면서 최소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이런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비일비재합니다.

또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이게 나라냐’며 시민들이 촛불혁명으로 다시 세운 나라가 원점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로 회귀한 듯합니다. 정치는 실종되고, 경제는 폭망하고, 외교는 끔찍하고, 안보는 위태롭고, 민생은 참담합니다. 사회적 참사와 의료대란의 해결책도 묘연합니다. 국민의 눈물과 한숨, 실망과 분노와 아우성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어떻습니까? 생각이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사랑하는 가족과 갑작스럽게 사별해서, 원치 않는 병마로 투병해야 해서, 나이 들면서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생업이 어려워져서, 인간관계가 틀어져서 등등 어렵고 힘든 인생의 여러 문제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안팎으로 어려운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대체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는 어떤 것일까요? 다른 이들이 겪는 불행이 내게 찾아오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남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해야 할까요?

종말론적인 희망과 감사

작년 추수감사주일에도 이와 똑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무슨 말씀을 증언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인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의 성조 야곱은 이집트 왕 바로 앞에서 자기 인생 130년을 ‘험악한 세월’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인생을 ‘고(苦)’라고 정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 좋은 때가 있었습니까!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늘 시련으로 다가왔고, 그 문제들과 씨름하다가 온갖 상처를 입고 지금 여기 겨우 서 있는 것 아닙니까? 문제가 없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문제는 늘 있습니다. 그게 인생이고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늘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시는데, 실제 세상은 정의가 아닌 불의, 공평이 아닌 차별, 평화가 아닌 전쟁, 선이 아닌 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종말론’입니다. “God will overcome, someday! 언젠가는 하나님이 극복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저들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게 하며, 그 모진 세월을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앙인은 이런 종말론적 희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지금과 다른 세상,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당장 나부터 그 다른 세상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작년에 저는 이 어두운 시절에 추수감사주일을 맞는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 이 종말론적 희망을 품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이 비록 성하여도, 선을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택하고 이끈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악의 편이 아니라 선의 편에, 불의 편이 아니라 정의 편에, 힘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선 것이 은혜요 감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격 없는 내가 하나님 구원의 도구가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과 테러와 기후재앙으로 찢긴 이들의 곁이 되어 줄 마음이 우리 속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해도, 집단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나는 부족해도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이 나의 부족을 채워줍니다. 서울제일교회는 하나님의 꿈을 품은 교회이고, 여럿이 함께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때로는 그 안에서 갈등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님 구원의 도구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해 나갑니다. 이런 신앙공동체와 믿음의 동지들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합시다. 슬픔을 반감시키고 기쁨을 배가할 형제자매가 곁에 있음에 감사합니다.

헬렌 켈러 이야기

오늘 증언 제목을 “모든 일에 감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에서 따왔습니다. 보통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말씀도 그렇고, 창세기 말씀도 그렇고 어린이 설교를 담당한 진민경 목사님이 택한 본문입니다. 진민경 목사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요!”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저도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고 그 동역을 함께할 공동체와 신앙 동지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작년 추수감사주일 메시지이기도 하고, 또한 당장 자기 코가 석 자라서 남이나 하나님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분께는 공허한 말씀으로 들릴 것 같아서 ‘은혜와 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각이 뚜렷해야 나오는 것입니다. 곧, 감사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과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이 분명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헬렌 켈러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1년 8개월이 되었을 때 청각, 시각, 말하기 능력을 잃게 되었지만, 훌륭한 가정교사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 사회복지를 위해 한 생을 바친 역사적인 위인이 되었습니다. 헬런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의 소망은 지극히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것들입니다. 특별히 그녀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감동적입니다.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비관해 “나는 아무것도 감사할 것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헬렌 켈러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은총도 은총이 아니라 일상에 불과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성공도 성공이 아니라 부족함에 불과합니다.

누구에게나 삶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고통이 누구에게는 불행이 되고 누구에게는 은총이 되기도 합니다. 또 누구는 얻으면서도 잃고 살지만, 누구는 잃으면서도 얻고 살아갑니다. 누구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지만, 누구는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행복합니다. 이 엄청난 차이는 바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감사하게 되면, 고통은 은총으로 바뀝니다. 감사함이 있으면 잃으면서도 얻게 되지만, 감사함이 없으면 얻으면서도 잃게 됩니다. 감사함이 있으면 못 가져도 행복하지만, 감사가 없으면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평합니다. 돈이 있어 행복한 것도 아니며, 건강이 있어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감사할 줄 알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자고로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요, 사람을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우리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남아있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세상만사가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더 나아가서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불행이 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고, ‘모든 것을 선(善)으로 이끄시는 분’임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어려움을 생각하기보다 이집트를 탈출한 은총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근본적인 감사입니다. 근본적인 감사가 있다면 환경은 더 이상 원망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도 감사하겠습니다.

희망만이 아니라 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

가진 것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

풍족할 때만 아니라 부족할 때도 감사하겠습니다.

승리할 때만 아니라 패배할 때도 감사하겠습니다.

건강만이 아니라 육신의 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만이 아니라,

내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까지도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감사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