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난 하나님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 (중략) ...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약 3:1-12)

어느 날 찾아온 삶의 위기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 대학에 취직해서 1989년 8월에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 25일 한양대학교에서 마지막 월급을 받고 정년 퇴임을 했습니다. 35년 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조금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9월 초에 정 목사님께서 이번 주 평신도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주일날 설교만 아니면 목사 할 만하다’고 말씀하신답니다. 그런 설교를 저한테 부탁하셨습니다. 요즘 MZ세대 젊은이들은 상사가 일을 맡기면 이렇게 말한다고 하네요. ‘이걸요?’ ‘제가요?’ ‘왜요?’. 이른바 ‘3요’라는 거지요. 그렇지만 저는 MZ세대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 설 자격도 없는 사람이 교우님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거창하게 설교라기보다는, 제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야고보서를 설교로 생각하시고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대신 저는 제가 ‘새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교우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제목은 정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미국의 신학자 마커스 보그의 책 이름이기도 합니다. 원제목은 ‘God We Never Knew’ 우리 말로 직역하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하나님’입니다. 제가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하나님을 어떻게 새로 만나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유아 세례를 받았고, 고등학교 때 견신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고등부 회장을 맡았고, 새벽기도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미국에 유학 가서는 이민 교회의 청년 집사로 봉사했고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1년여 다닐 교회를 헌팅한 결과 향린교회에 정착해서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양대학교 교수로 평탄한 삶을 계속하던 중, 2006년 10월 제 삶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커다란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복통이었습니다. 동네 병원을 갔더니 상태가 심각하다고 대학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한양대학교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끝에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일사천리로 수술 날짜를 잡고 11월 7일에 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위암의 상태는 조기 위암이라 심각하지 않았지만, 암의 위치가 좋지 않아 위를 전부 제거했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는 수술 후 2주 안에 회복해서 퇴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려 36일 동안이나 병원에서 금식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다는데 저는 36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그 이유는 수술한 부위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VIP신드롬’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는지요? 의사들끼리 하는 말인데 중요한 환자라 생각해서 특별히 신경을 썼지만, 오히려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연하게도 제 사촌 누이의 절친의 남편이 제 수술 집도의였습니다.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지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분은 저한테 엄청 신경을 썼습니다. 게다가 제 처삼촌이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1회 졸업생이고 의대 동창회 회장도 맡고 계셨습니다. 저를 잘 부탁한다는 메시지가 여러 통로를 통해 전해졌겠지요. 제 수술을 담당하신 분은 우리나라 위암계의 베스트 명의로 명성을 얻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최선을 다해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수술한 지 2주가 지나도 수술 부위에 작은 구멍이 있어 금식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1~2주에 한 번씩 휘발유 냄새가 나는 조영제를 구역질해가면서 억지로 먹고 수술 부위가 아물었는지 검사를 했습니다. 매번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수술한 지 4주가 지나도 여전히 저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금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제가 병원 11층에 입원했는데요. 어느 날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매일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술 후 4번째 검사를 했습니다. 구멍의 크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약간의 틈이 있었습니다. 주치의와 오랜 시간 상담한 결과 복막염 위험을 감수하고 퇴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너무 금식 기간이 오래되어 건강에 무리가 갔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복막염 없이 건강을 회복하여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만남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저는 참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제대로 아팠습니다. 2006년 11월 7일 이후로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단 외형이 달라졌습니다. 입원 전에 제 몸무게는 73kg이었습니다. 이제는 58kg입니다. 용을 써도 60kg이 되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 예배 후에 식사를 하는데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오짜 동지들이 함께 앉게 되었습니다. 한숙희 집사님 남편 백영기 선생님, 성가대장 박성우 권사님, 그리고 이태환 장로님 모두 몸무게가 5자로 시작하는 오짜 클럽 멤버들이었습니다. 서로 몸무게를 비교하면서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외형과 함께 내면도 달라졌습니다. 병원에서 금식하며 지내니 하루가 엄청나게 길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신앙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퇴원하고 나서는 신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죽음과 벗하며 지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질문과 많은 의심이 생겼습니다. 질문과 의심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새로 만난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음과 같은 7개의 개념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볼까요?

<마커스 보그: 어린 시절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1. 하느님: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인 초월의 하느님

2. 성서: (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

3. 사람의 존재: 불복종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원죄를 가진 자

4. 예수: 대속자

5. 구원의 길: 예수를 믿는 신앙은 유일한 구원의 길

6. 신앙: 의심 없이 믿는 것

7. 사후의 삶: 구원은 천당에 가는 것을 의미하고 불순종자는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교우 여러분은 이 일곱 가지 명제 중에서 몇 개나 동의하시는가요? 마커스 보그는 “내가 서른이 되었을 때, 나의 어린 시절 신앙은 내 어린 시절의 장난감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커스 보그의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몇 개의 명제에 대해서 보다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저 바깥에 혹은 하늘에 계시는 분인가요? 전통적인 기독교인은 누구나 ‘저 밖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 존 쉘비 스퐁 주교는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책에서 갈릴레오는 하나님을 노숙자 (homeless)로 만들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삼층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 당연히 하늘에 계셔야 하는데 과학에 의해 우주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자 더이상 하나님은 ‘저 위에’ 혹은 ‘저 밖에’ 계실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초자연적인 초월의 하나님 관련해서도 스퐁 주교는 과학자 뉴튼이 하나님을 실업자 (jobless)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뉴튼의 세계는 정해진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외부적 힘의 개입이라는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가 점차 그 힘을 잃어 하나님을 실업자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성서는 또 어떤가요? 미국 유학 중에는 성서를 참 열심히 읽었습니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성서는 이해하기 가장 힘든 책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에덴동산 선악과 이야기는 참으로 넘어가기 힘든 장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셨을까? 아예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마시던지 선악과에다 가시넝쿨을 칭칭 감아서 아담과 이브가 언감생심 접근조차 못 하게 하시지 왜 인간 타락의 원인을 제공하셨을까? 이런 질문들은 성경의 내용이 실제적 사실이라고 문자적으로 읽을 때 제기됩니다. 이제 저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고백으로 읽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이 에덴동산이 실제 존재했으며 선악과도 실제 존재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로버트 펑크와 도미니크 크로산이라는 두 신학자를 중심으로, 200여 명의 미국 신학자들이 모여 10년 넘게 역사적 예수에 관해 연구한 결과를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발견된 예수님 말씀이 정말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후대의 이름 모를 저자들이 신앙고백을 위해 만들어낸 스토리인지에 대한 신학자들의 투표 결과 성서에서 발견된 예수님 말씀과 행적 중 82%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후대 추종자들의 신앙고백임이 보고되었습니다.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나중에 <제5복음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미국의 아마존을 통해 주문해서 읽어본 다음 성서 해석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을 새로운 성서 읽기 방식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계속해서, 올바른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과 믿음이 참 좋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 많이 하고, 성서를 의심 없이 믿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말 참 신앙이 성서를 의심 없이 문자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할까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한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신에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목사들이 주일마다 하는 설교를 믿을 수가 없다. 목사들은 성서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저 하늘 높은 데서 우리 인간들을 항상 내려다보시고 인간사를 주관하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말을 되풀이하는데, 그 많은 말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말들을 모두 믿어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너무 부담스럽다. 이런 말들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나는 이 말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는 일이 부담스럽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내 양심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한 젊은이의 고백 중에서>

물론, 성경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지요. 그런 분들한테는 지금 소개한 젊은이의 고백이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이 젊은이처럼 고민하고 평생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의심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신앙은 믿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지식과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의심은 확신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은 중심을 잡기 위함’이라고 한 시인은 노래합니다.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중심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새로 만난 하나님, 새로운 신앙생활

다시 제 이야기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위암으로 말미암아 위를 잃었습니다. 그 대신 새롭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새로 만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20년 이상 다녔던 향린교회 홍근수 목사님의 파송사 중에서 “자유롭게 사십시오”라는 표현을 저는 제일 좋아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1세기 사람들에게 할례라는 조건이 없는 기독교를 요구한 것과 같이, 하나님도 20세기 사람들에게 종교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기독교를 요구하고 있다.” 맥머리라는 신학자는 “신과의 올바른 관계는 종교적인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종교는 올바른 신과의 관계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기원후 3~4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정통’ 교리라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단지 그 견해가 당시의 신학적 논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교리는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교리가 AI 시대의 교리와 동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리 파괴자였습니다.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접촉금지 처분을 받고 있던 사람들과 늘상 밥상을 같이 했습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욕심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몸이 조금만 안 좋아지면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65세까지 건강하게 살아서 학교에서 정년퇴직할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8월 31일, 저는 그 소망을 성취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모든 날이 보너스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을 버킷 리스트라고 부르지요. 사람들이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제 버킷 리스트는 하나뿐이라고 말합니다. 제 버킷 리스트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니부어의 기도처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용기를 내어 실행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욕심을 내지 않고 과감히 포기하는,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의 마지막 소망은 곱게 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릭 와이너라는 미국 작가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과의 만남은 절대로 부드럽게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노년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노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젊은 사람이 체크무늬 바지를 입으면 ‘레트로’라고 하지만 늙은이가 10대처럼 옷을 입으면 ‘애처롭다’고 한답니다. 에릭 와이너는 우리에게 나이 듦의 문화가 없음을 지적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절박하게 매달리는 젊음의 문화만 있을 뿐이라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저는 집에서 종이 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있는데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면 아직도 종이 신문을 보고 있냐고 놀라워합니다. 사실, 요즘 신문에서 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아직도 종이 신문을 구독하는 이유는 부고 기사 때문입니다. 저는 신문에서 가장 유용한 정보가 부고 기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이 이 세상과 작별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몇 살까지 그리고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찾아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삶을 통해 제 삶을 비춰보고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갈 에너지를 얻습니다.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시집에 실린 ‘옛날의 그 집’이라는 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끝에서 온다고 하는데 시인은 모진 세월을 보내고도 편안하게 그리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 답을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성인, 이어령 교수에게서 찾았습니다. 이어령 교수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노년이 삶의 욕심에서 편안하게 내려오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남은 삶이 그러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