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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4년
제목 [5.19] 성령강림과 부활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4-05-22
조회수 55
첨부파일
p240519_질그릇 1단.pdf

성령강림과 부활

 

1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2그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6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2:1-6)

 

성령강림절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성탄절, 부활절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祝日)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이라고도 불리는 성령강림절은 그리스도교의 축일이 되기 전에 원래 유대교의 중요한 축일이었습니다.

유대교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지켜야만 하는 세 가지 순례 축일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인 오순절은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Passover)’ 오십 일 후에 지켰기 때문에 다섯 오(), 열흘 순()’ 자를 써서 오순절이라고 불렸습니다. 영어 단어 Pentecost의 어원은 그리스어 pentékosté인데 그 뜻은 오십 일째입니다.

오순절은 해방된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새로운 ‘(계약) 공동체가 탄생한 날이었습니다. 오순절의 이러한 의미와 함께 오십 일이라는 시기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강림절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성령강림절은 부활절 이후 오십 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강림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 성령강림 사건

성령강림절의 핵심은 예수님이 약속한 영이 이제 그의 제자들 사이에, 세상 가운데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이루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성령강림절에 대한 이야기는 딱 한 번 사도행전에만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4b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1:4b-5)

 

이 당부에 따라 사도들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성령은 바람으로 내려옵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은유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3:1-6). 광야에서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했습니다(13:21). 그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가운데서 내려왔습니다(19:18). 또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바람을 뜻하는 말은 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방언?

그런 다음 이야기의 강조점은 언어로 넘어갑니다. 본문 3절은 불의 혀를 언급하는데, 이어지는 4절은 그 결과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방언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2절에서 말한 방언과는 차이가 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14:2)

 

여기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면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강림 사건 때는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본문은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자(4) 당시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던 해외 출신 유대인들이 제자들이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6)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이 길어서 6절까지만 읽었는데, 본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7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8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11b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2:7-8.11b)

 

여기서 말하는 방언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이 아닙니다. 해외 출신 유대인들이 태어난 각 지방과 나라의 언어를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불의 혀로서 내려오는 성령은 사도들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사도들의 말속에서 그들 자신의 언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 이야기의 의미는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라는(1) 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동하다가 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돌 대신에 벽돌을 빚어 구워내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써서 도시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안에 탑을 쌓고,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라고(4) 서로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주 생생하게 의인화되어 표현됩니다.

 

5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11:5-7)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온 땅에 흩어지고,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11:9)

 

히브리어로 뒤섞다라는 뜻을 지닌 발랄바빌론을 뜻하는 바벨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입니다. 영어의 babble이란 단어도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babble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절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는 정반대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세상은 각자의 언어와 민족으로 갈라졌고, 그 결과 오해와 대립,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반면 성령강림절 사건으로 인류는 소통하면서 다시 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강림절의 근본 의미

작년 성령강림절에도 오늘과 똑같은 본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통을 주제로 증언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성령의 은사성령의 열매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이야기로 시작해서 바울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올해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탑 이야기 때문에 성령강림절의 근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예수가 약속한 성령이 내려오고, 그럼으로써 예수의 현존이 계속되고, 예수가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속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7통의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주님 안에서라는 표현을 포함해서 무려 165번이나 썼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사는 것은 성령 안에서”(in Spirit) 사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성령 안에서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면 됩니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면 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옛사람에 대해서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3:20) 고백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나쁜사람이 좋은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풍조’, 즉 세상(사람들)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던 삶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내 욕망을 따라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꿈을 하나님과 함께 실현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으로 전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로마에 의해서’(by) 그리고 로마에 대해서’(to)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by) 부활해서 하나님과 함께’(with) 살아계십니다. 바울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로마/세상(가치)에 대해서(to) 죽고, 하나님을 위해서(for) 다시 태어나면 그리스도 안에서/성령 안에서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난 부활절 내내 부활은 내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내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나의 부활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는 바로 내 안에서 부활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한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하는 고백의 실체입니다.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까? 여전히 여러분 자신이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기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사는데, 내가 죽지 않아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곳이 없습니다. 성령은 강림했는데, 그 성령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내 안에 이식할 수가 없습니다. ? 나의 이 여전히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모습을 시인과 촌장의 멤버이자 백석예술대학교 교수인 하덕규는 가시나무란 곡의 가사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라고 읊었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너무 많은 를 가시들로 표현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안의 나를, 내 안의 가시들을 없앨 수 있을까요? 묵상 끝에 바울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의 가시를 얘기합니다(고후 12:7). 물론 바울의 가시는 옛 자아가 아니라 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가시를 없앤 방법을 우리는 꼭 참고해야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 이 말을 들은 후에도 바울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시에 관한 바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시는 있어도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는 변하지 않고 나를 둘러싼 형편과 처지, 나아가 세상이 바뀌고 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먼저 형편과 처지 그리고 세상을 보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생각을 바꾸면 같은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한숨이 감사로, 고통이 찬양으로 바뀝니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내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며 예수님이 하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처럼은 못해도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하다 보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고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씩 확장됩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고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이렇듯 생각의 변화는 성령 이식을 가져오고, 그 성령은 우리가 한계를 돌파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잇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 생각의 변화를 추구하시고, 생각의 변화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 사람으로 부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