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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4년
제목 [4.21] 아름다운 시선ㅣ신연식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4-04-25
조회수 74
첨부파일
p240421_질그릇 1단.pdf


아름다운 시선

 

1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2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3사도들을 붙잡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다음 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4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 5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7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8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4:1-10)

 

420일인 어제는 제44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넷째 주일인 오늘은 한국교회가 제정해 지키고 있는 장애인 주일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19892월 제38회 총회에서 모든 회원 교단의 장애인운동위원회설치와 장애인 주일제정 권고를 결의하였고, 매년 420일 직전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제정하여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장애인의 현실을 개선하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비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장애를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장애는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은 장애가 과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202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장애인 등록 인구는 약 26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 정도입니다. 거기에다가 다양한 이유로 국가에 장애인임을 등록하지 않고 살아가는 비등록 장애인 인구까지 합한다면 약 500만 명 정도, 전체 인구의 약 10% 정도가 통상적으로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장애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 가족들까지 포함한다면, 장애인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와 같은 장애인 대부분이 후천성 장애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산업재해, 교통사고, 안전사고와 같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후유증 등으로 나중에 장애를 입게 된 것입니다. 전체 장애 인구의 약 80% 정도가 후천성 장애인입니다. 앞으로 초고령 사회를 향해 가는 우리나라 현실을 본다면 향후 장애인들의 비율은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장애는 특별한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겪게 될 내 문제이고, 내 가족의 문제입니다. 나와 똑같이 사랑받고,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내 이웃의 일이자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 누구도 장애를 선택한 사람은 없습니다. 장애인들이 느끼는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차별과 배제, 그리고 고립입니다. 누구나 받아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 누구나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장애의 어려움을 개인이 감내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들이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장애인들은 사회구성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vs 성전 지도자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인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하는 말씀은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3장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장애인의 치유이야기에 이어 베드로와 요한이 의회 앞으로 끌려 나와 심문을 받는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힌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사도들을 붙잡아 가두었다”(2)

 

그런데 5절에 등장하는 심문 내용이 다소 엉뚱합니다. 부활 선전에 격분해서 잡아 가뒀다면 예수의 부활을 왜 가르쳤냐?”하고 심문해야 하는데,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는가?”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질문의 의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답변합니다.

 

9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9-10)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심문입니다. 큰 악행을 저지르거나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성전 앞에서 평생 구걸하며 살아온 이를 고치는 선행을 하였는데 끌려와서 심문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왜 그렇게 했고 또 누구의 권위로 그렇게 했냐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쳤는데 누구의 명의로, 누구의 권위로 그렇게 했냐고 묻는 것이 정말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하게 들리지 않나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병든 이들을 치유했을 때 벌어졌던 상황과 유사하지 않나요? 예수께서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치니까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냐? (9:32-34) 하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고(3:1-6), 18년간 허리가 굽은 여자를 치유했더니(13:10-17) 왜 안식일법을 어기며 안식일에 그렇게 했느냐 했던 그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또 오랜 중풍병 환자를 친구들이 데려와 고치니까(9:1-8) 네가 뭔데 죄 용서를 하느냐?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느냐 하고 따졌던 그때가 떠오르지 않나요? 한 사람이 고침을 받고 이제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게 되었는데, “왜 그렇게 했냐?”, “누가 시켜서 그렇게 했냐?” 묻는 것은 치유 받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그 존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는 것입니다. 치유 받은 사람은 그 사건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마치 죽다 살아난 것 같은 삶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있는데, 성전 지도자들에게는 평온한 일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그저 불편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침 받은 장애인 사건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부터 나와 다른 존재,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애인이고, 그가 가진 장애는 죄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는 죄인이고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그렇게 늘상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몸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죄의 굴레를 덧입혀서 마음까지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체제와 그를 유지하게 만드는 성전 지도자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하며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몸에 장애를 안고 살면서 마음마저 짓눌려 버린 이들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사건은 그저 불편했던 몸의 장애를 고친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버려진 존재라고 믿던 그 병든 마음까지도 치유하였습니다. 차별받고 배제 받던 사회적 관계를 회복해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게 했고, 또 옥 죄 오던 죄의식에서도 해방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치유사건이 오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의 치유사건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오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폭력에 의해 십자가 처형된 예수 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재현되고 부활하였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서 죽은 듯이 살던제자들, 즉 살아있지만 죽어있던그 제자들이 일으켜져서 지금 예수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예수를 따르는 이가 아니냐는 물음에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죽은 듯 숨어 살던 베드로가 오늘 성전 지도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사건(2:1-13)과 오순절설교(2:14-47),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의 치유사건(3:1-10), 솔로몬 행각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3:11-26)과 성전 지도자들과 대결(4:1-22)을 순차적으로 연결하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예수를 통해 시작되었고, 제자들을 통해 재현되었으며, 지금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서, 오늘 교회를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성령이 가능케 하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고백하는 부활 증언이요, 오늘 우리가 믿는 부활 신앙입니다.

 

오늘 증언 제목을 아름다운 시선이라고 붙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의 치유이야기(3:1-10)를 반복해서 읽다 보니, 한 존재를 깊이 대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잠시 3장의 치유이야기 본문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1-2)

 

성전을 출입하던 유대인 중에 선행을 베풀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깊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왔습니다. 그 장애인에게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좀 더 편하게 구걸할 수 있도록 그를 매일 거기까지 업고 왔습니다.

그날도 그는 그렇게 사람들의 등에 매달려 성전까지 왔을 것이고 오늘 구걸의 벌이가 얼마일지에 가슴 조이며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이 사람에게 성전 미문은 직장이었고 일터였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평소와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구걸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돈을 주거나 무시하거나 하지 않고, 구걸하는 사람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본문 4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눈여겨 보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를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장면을 그리듯 상상해봅시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이 사람이 지켜봤을 풍경이라는 것은 어땠을까요?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으면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요? 아니 얼굴을 볼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의 시선은 아마도 발 주변을 맴돌다가 옷차림새와 걸음걸이가 어떠한가를 보면서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반대로 성전을 지나가며 이 사람을 봤던 수많은 사람의 시선은 또한 어땠을까요? 그저 성전 문 앞의 배경처럼 무심하게 스치듯 바라보거나 잠깐 위에서 내려다보며 동전 몇 잎을 던지고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생기고, 또 어떤 성격을 지닌 존재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아마도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두 사람이 다가와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를 보시오!” 각자의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눈을 마주 보는 것, 그것은 상호작용이고,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눈을 맞추고 마주 봄으로써 차별과 배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거기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차별과 배제가 지배하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너와 나’, ‘나와 너의 상호관계를 통해 우리가 동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며, 내가 잡아줄테니 용기를 내서 걸어보라고 청합니다. 매일매일을 구걸하며 주저앉게 만드는 돈이 아니라,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그 마음이 그의 다리와 발목 그리고 온몸과 마음에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일어나서 걸었고, 또 뛰었습니다.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전 밖에만 머물던 그가 성전 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앉아서 구걸하던 이와 지나가는 이의 관계가 이제는 함께 성전에 들어가는 관계, 즉 동반자 관계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414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가서 심문받는 그 자리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서 있어서 아무런 트집을 잡지 못하였다 하고 증언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이 사람도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의 길에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성전 앞에 앉아 구걸하도록 용인한 성전 체제와 날마다 떠메어 데려다주던 유대교의 선행도 분명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생존을 할 수는 있지만, 성전 체제가 유지되는 한평생을 성전 밖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차별과 무관심 시선을 받으며 구걸을 하는 그 삶의 굴레에서 역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합니다. 연민, 구제, 동정이 아니라 같이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 일으키며 차별적 구조를 해체 시키는 근본적 해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애인의 날이 제정되고 우리 사회에 장애인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돕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고, 정부의 지원도 예전에 비해 점차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과 배제의 사회적 구조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002, 장애인은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똑같이 사회구성원임을 천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관점에서 벗어나고자 장애인의 날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장애인 스스로 이동권 투쟁을 통해서 일상 속의 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44회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의 슬로건은 함께 하는 길, 평등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지속되어 온 차별과 배제를 무너뜨리고, 근본적인 해결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잘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교회지만 생태환경과 기후위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매주 촛불을 들며 사회변혁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 그 밖에 여러 가지 일들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 교회가 더욱 노력해야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우리의 시선을 두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오늘도 전장연 집회로 출퇴근길이 불편하겠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20여년 동안 개선되지 않은 장애인 이동권을 생각하며 곁에서 작은 피켓 하나라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불편을 감내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장애인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다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에 장애인들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도록 점차 환경을 개선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음이 경험되게 합시다. 아름다운 시선으로, 또 예민하고 따뜻한 감수성으로, 우리 사회에 차별받고 배제 받는 이들이 없도록 살핍시다. 장애인들이 사회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이 믿음과 결단으로 또 한 주간 헌신하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