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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4년
제목 [4.14]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4-04-16
조회수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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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0414_질그릇 1단.pdf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12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13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14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15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16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17그런데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18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19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3:12-19)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와 초대 교회의 부활 로고스

지난 한 주간동안 평안하셨습니까? 22대 총선 결과가 탄핵 200에 미치지 못해서 평안하지 못한 분도 계실 줄 압니다. 이 결과에 대해서 여러 평가와 해석이 있기에, 목사인 저까지 보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 한 줄만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108석을 얻은 국민의힘108번뇌에 빠졌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번뇌(煩惱)는 저들이 하도록 넘겨주고, 우리는 촛불 혁명의 완수에만 전념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력으로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312절로 19절입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베드로가 했던 두 번째 설교로 그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이어서 솔로몬 행각 설교라고 불립니다.

이 설교에는 초대 교회가 선포했던 부활의 로고스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15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이 구절이 모든 부활 증언의 진원지입니다. 그런데 정작 번역된 우리말 성경만으로는 이 구절, 즉 초대 교회가 선포했던 부활 로고스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성경 원문을 놓고 씨름한 끝에 이 구절을 󰡔부활 되어야 할 부활󰡕이란 책에서 강일상 목사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창시자를 죽였고,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죽어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그의 증인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비교해 보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생명의 창시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죽어있는 자들로부터, “살리셨습니다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증인그의 증인으로 고쳤습니다.

이러한 번역의 변화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그동안의 잘못된 이해를 교정해 줍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그를 죽어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 핵심입니다.

 

죽어있는 사람의 부활

부활이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까?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부활했고(11:1-44),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부활했습니다(7:11- 17). 그런데 기독교는 이들 경우는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소생이라고 합니다. ‘부활소생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강일상 목사는 죽은 사람죽어있는 사람으로 바꿔 번역했습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죽어있는 사람의 부활입니다. ‘죽은 사람은 보통 사자’(死者)망자’(亡者)를 가리킵니다. , ‘숨이 끊어져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이 부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죽은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네크로스’(νεκρός)인데, 이 단어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죽은죽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죽은것이 아니라 죽지 않았는데도 죽은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강일상 목사는 죽은죽어있는이라는 말로 바꿔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죽어있는 사람의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있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초대 교회의 부활 로고스가 들어있는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가 선포된 상황(context)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치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312절부터 제시되었는데, 그 바로 앞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와서,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11절이 말하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문’(美門) 곁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그를 구걸하게 하려고 사람들이 떠메고 왔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를 떠메고 왔던 사람들의 부림을 받는 앵벌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을 오후 세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시오하고 말을 건넵니다.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니 기대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3:6)

 

이렇게 말하고는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앉은뱅이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사건이 초대 교회의 부활 로고스가 들어있는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바로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우연일까요?

 

죽어있는자는?

앞에서 초대 교회의 부활 로고스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강일상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어있는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로 번역했다고 했습니다. 성전 아름다운 문앞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일으켜졌습니다.그렇다면 그 앉은뱅이가 죽어있는 자가 아니었을까요?

창세기 216~1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그런데 3장으로 넘어가면 뱀은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했고, 뱀은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구 말이 맞습니까? 저들이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까? 뱀의 논리로는 살아있고, 하나님의 논리로는 죽어있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아도 죽어있습니다.’ 이것이 타락 설화가 말하는 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때문입니다. 죄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죽어있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죄 가운데 사는 죄인들을 성경은 죽어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는 개인적인 죄도 있지만, 세상죄도 있습니다. 이 세상죄를 다른 말로 하면 구조악(systemic evil)입니다. 악인은 물론이고 의인도 이 구조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 누구나 자()를 본()으로 삼는 사회체제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고, 우리가 모두 죄에 종노릇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죄/구조악의 사슬에 얽매여 사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고, 살아있는 것 같아도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피라미드구조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희망도 없이 죽지 못해서 사는 진짜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의 구조악이, 온갖 힘과 세력들이 그들을 질식시킵니다. 거기에는 절름발이가 되게 하는 세력, 속박하는 세력, 소외시키는 세력, 꼼짝달싹 못 하게 하는 세력, 무력하게 하는 세력, 굳어져 마비가 오게 하는 세력 등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태생 앉은뱅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온갖 폭력적인 세력으로부터 짓눌려서 단 한 번도 사람답게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기 형편과 처지를 팔자나 운명으로 알고 체념한 채, 자기를 꼼짝달싹 못 하게 하는 세력에 굴종하며 쥐 죽은 듯이 신체적·정신적 앉은뱅이로 살아왔습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당신은 이 아니라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앉은뱅이를 보고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체념하고 주저앉아 있지 말라는 말 아닙니까? 팔자나 운명에 가위눌려 포기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말 아닙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떨치고 일어서라는 말 아닙니까? 세상은 원래 다 그렇다며 절망만 하고 있지 말고, 그 세상에 대해서 봉기하라는 말 아닙니까? 이렇듯 일어선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게 죽어있는 자로부터의 일으켜짐이고, 성경이 말하는 부활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실제 내용입니다.

앞에서 인류는 죄 때문에 죽어있다고 했습니다. 그 죄는 개인적 죄를 넘어 세상죄/구조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죄는 무엇이고, ‘구조악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힘 가진 소수가 힘없는 다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든 힘을 쟁취해서 남 위에 올라서서 지배하든지, 아니면 힘 가진 자 앞에서 납작 엎드려 복종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전자는 힘 가진 지배자로 사는 길이고, 후자는 힘없는 피지배자로 사는 길입니다. 전자는 으로 사는 길이고, 후자는 으로 사는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선택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으로 태어나면 으로 살고, ‘으로 태어나면 으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으로 전락하는 일은 가끔 있어도, ‘으로 올라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사회는 늘 이 구별되어 있었고, 소수의 이 다수의 들을 지배하는 시스템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인류 역사에서 돌연변이 같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사건은 이 자기가 이 아니라 이라는 진리를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으로 태어났으니 평생 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내 팔자요 운명인 줄 알았는데, 나도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당대에도 으로, ‘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게 세상 이치고, 도리고, 팔자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주제에 으로 사는, 이제까지 전혀 없던 길을 제시했습니다. 세상 이치를, 세속의 도리를, 자기 팔자와 운명을 거슬러 살라고 했습니다. ? 우리는 이 아니라 이니까, 로마 황제나 그 하수인들인 지배계급만 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자녀니까,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꿈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실현하라고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동역자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7)라고 말씀하시며 전권을 주지 않았습니까? 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고(고후 6:16), “하나님의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소입니다(고전 3:16). 여러분은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며(고후 2:15),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잘것없는 질그릇일지라도, 그냥 질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보물이 담겨있는 질그릇(보물상자)입니다(고후 4:7). 또 베드로전서는 우리를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 아니라 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읽었을 때, 성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한 것은 결국 당신은 이 아니고, ‘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으로 사십시오라고 말한 것과 같았습니다.

 

자기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기

그런데 베드로와 바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했을까요? 예수는 놈은 놈이고, 님은 님이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놈은 놈으로 살고 님은 님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지배자의 선전을, 세상의 풍조를 믿고 따르며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일어선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제자들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이후에 오순절 성령감림 사건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어선 사람예수를 믿고 닮고 따르고 살아냈습니다. 그들도 일어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기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15절이 말하는 그의 증인들이 바로 우리입니다라는 말이 뜻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증인목격자가 아니라, ‘자기 삶에서 예수를 살려낸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에는 조금 전에 일어선 사람이 된 미문 곁 걸인도 포함됩니다. 그는 자기가 인 줄 알았던 옛사람에 대해서 죽고, 이제 자기가 인 줄 아는 새사람으로,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살라, 윤리적으로 살라, 죄짓지 말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던 삶의 방식과 삶의 가치에서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해 온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배를 영속하기 위해서, 혹은 약한 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서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내면에 열등의식을 각인시킵니다. 이 열등의식이 지배자의 선전에 의한 의식의 조작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풍조입니다.

이 세상 풍조의 굴레를 뚫고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허위의식 속에서그 쳇바퀴 속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촛불집회를 비롯한 각종 집회에 나가서 외치고, 망각해서는 안 될 억울한 사건들을 애써 기억하고 기념하며, 투표를 통해 잘못된 정치세력을 심판합니다. 이렇게 저항하고 또 저항해도 변화는 우리 마음처럼 빨리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고 속이 상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절망 속에서 희망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저앉지 말고 다시 일어섭시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고 계속 일어선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그 길에 십자가 죽임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끝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