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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4년
제목 [4.7] 우리가 만나야 할 "오래된 미래"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4-04-11
조회수 79
첨부파일
p240407_질그릇 1단.pdf

우리가 만나야 할 오래된 미래

 

32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4:32-35)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 교우들의 생활상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시작된 부활절기오순절’, 성령강림절직전 주일까지 7주 동안 계속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일과’(RCL)는 이 기간에 구약본문을 사도행전에서 제시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말씀이 사도행전 432절로 35절입니다.

부활절기독교의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부활 사건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성령강림절교회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계절에 예루살렘 교회 이야기가 본문으로 주어졌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세 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 교회 교우들의 생활상을 집약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집약문이 242절로 47절 말씀입니다.

 

42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두 번째 집약문은 오늘 본문 말씀이고, 세 번째 집약문은 512절로 16절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오늘 증언과 별 상관이 없어서 읽지 않겠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내세웁니다. , 예루살렘 교회는 영영 세세 모든 교회의 본보기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 교우들이 재산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44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2:44-45)

 

32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4:32)


“(사유 재산제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함으로써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 및 운동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공산주의의 원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가슴이 벅차서 마구 뜁니까? 아니면 철렁 내려앉습니까? 어떤 반응이든,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의 취사선택

성경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경전(經典)’입니다. 그런데 그 경전 속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취사선택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씀에는 아멘하고, 또 어떤 말씀은 애써 무시합니다. 저는 그게 잘못이거나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이 써서 인간에게 던져주신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이 불러주고 인간이 받아적은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인간/공동체의 증언(testimony)입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 체험은 완전했을지라도, 그 체험의 증언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을 체험한 인간은 시·공간적인 한계를 가진 존재이며, 증언을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인간의 언어 또한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 계시에 투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말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쓸 것은 골라서 쓰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필수적으로 취사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때 거기에서는 합당했어도, ‘지금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은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된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슨 근거나 기준으로 취사선택하느냐입니다.

많은 경우 임의(任意),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제멋대로합니다. 더 많은 경우 교리가 취사선택의 근거나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적) 예수가 취사선택의 근거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우리는 예수를 믿고 닮고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출애굽 사건과 예언 운동의 맥()을 잇는 성경의 해방 전통위에 서 있기에, 성경의 해방 전통을 근거와 기준으로 하나님 말씀을 취사선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버려야 할 말씀일까요, 아니면 아멘하고 따라야 할 말씀일까요?

 

누가행전의 당파성

사도행전누가복음의 저자는 같습니다. 최근 들어 일부 학자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두 권의 책이 아니라, 같은 책의 1, 2부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개의 두루마리로 만들 수 없어서 1부와 2부 두 권으로 누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요즘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해서 누가행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누가행전은 계속해서 당파적으로 가난한 자편을 듭니다. 제일 먼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불렀던 유명한 찬가에서 마리아는 “(주님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다”(1:53)고 노래합니다. 예수는 권력의 중심권이나 저택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마구간에서 탄생했습니다. 누가는 이사야 611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4:18)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했다고 서술합니다.

마태의 팔복과 달리 누가는 사복 사화를 선포하는데, 복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굶주리는 사람입니다(6:20-21). 마태의 마음/심령이 가난한 사람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는 다릅니다(5:3.6).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면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한 자가난한 이웃에게 인색한 자의 어리석음을 질타합니다(12:13-21). 또 손님을 초대할 때는 “(네게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14:13). 나아가서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16:13)라고 단언합니다.

또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 대해 무관심했던 부자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16:19-31). 반면에 세관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말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19:1-10).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관심

제가 이제까지 인용한 구절들은 대부분 누가의 특수자료인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행전의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해 크게 관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누가의 특성은 누가의 창작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소외된 사람들,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선 것이었습니다. 열린 밥상공동체와 공짜 치유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에게 기쁜 소식, 복음(福音), ‘Good News’였습니다. 단지 누가는 그것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와 돌봄은 성경의 기본정신입니다. 좀 긴 인용이지만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7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의 어느 한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동족이 살고 있거든, 당신들은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 가난한 동족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당신들의 손을 움켜쥐지 마십시오. 8반드시 당신들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십시오. 9당신들은 삼가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빚을 면제하여 주는 해인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인색한 마음으로 가난한 동족을 냉대하며, 아무것도 꾸어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당신들을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당신들이 죄인이 될 것입니다. 10당신들은 반드시 그에게 꾸어주고, 줄 때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과 당신들이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11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15:7-11)

 

이 말씀은 칠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빚을 탕감해 주는 해에 지켜야 할 여러 계명 중 하나입니다. ‘계명(誡命)’은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자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와 돌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버려야 할 말씀이 아니라, ‘아멘하며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물론 그 실천이 어렵고, 그래서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싶지만 말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이런 부담스러운 말씀을 만날 때 우리는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14:38)고 솔직히 말해야지, 말씀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실천할 수 없다고 해서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참 계시까지 부정하면, 우린 하나님 예배자가 아니라 맘몬 숭배자/추종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참 계시를 읽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하고, 그것을 힘써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사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당장 수용 불가능한 예수의 명령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0:21)고 하신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명령 앞에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이 디다케(Didache)일명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 불리는 초대 교회의 문서에 나옵니다.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에는 예수를 본받아 이곳 저곳을 떠돌며 무상 치유와 열린 밥상공동체를 재현한 유랑하는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안정적인 삶을 사는 집 있는 사람들을 방문했을 때, 집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비전의 실현을 위해 자기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랑하는 선교사처럼 당장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고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런 저들을 향해 디다케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만약 주님의 모든 멍에를 질 수 있다면, 당신은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Do what you can).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래서 부담이 되고 멍에가 되는 일을 억지로 의무감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박이지 해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바라셨던 바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선은 자신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일단 시작하면, 그 지평이 점점 넓어집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도, 나중에는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쏠렸습니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땅이나 집을 팔아서 이웃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복지국가아닙니까? 또 근래 들어서 대두된 기본소득개념 아닙니까? 우리가 사유재산을 다 포기하고 공산사회를 만들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일 수 있지만,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만큼은 성장했습니다. 단지 법과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같이 잘살아 보자는 생각보다, 남은 모르겠고 나만이라도 잘살아 보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만 잘사는 사회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안전할 수 있습니까? 평안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는 미국에 1997년에 처음 갔을 때 가장 이상했던 것은 방범 장치(security)였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당시의 미국처럼 집집마다, 방마다 잠금장치가 있습니다. ? 범죄를 예방하려고요. 당시 미국과 우리나라는 빈부격차에서 크게 차이가 났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빈부격차가 큰 나라는 범죄율도 높습니다. 안전하지 않고, 평안하지 않고 불행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방범에 큰돈을 씁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면 범죄율이 줄어서 오히려 안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회복지 혜택을 늘리고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 나의 주변만 안전하게 하는 것보다 사회 전체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내가 더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가는 곳곳을 24시간 안전하게 지키려면 너무 큰 비용이 들고, 또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완벽히 안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오래된 미래

오늘 증언 제목을 우리가 만나야 할 오래된 미래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은 두 개의 책 제목에서 가져온 것인데, 하나는 스웨덴의 여성 언어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대표작 오래된 미래라다크에서 배운다입니다. 헬레나는 1970년대 중반 인도 북부 라다크 마을을 방문해서 자연에 순응하고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인류의 미래를 찾았다고 그 책에서 말합니다.

또 다른 책은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스웨덴 쇠데르턴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생활하며, 스웨덴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 온 최연혁 교수가 스웨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목소리를 통해 복지사회의 실체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한 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저는 매 학기를 시작할 때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자의 미래를 예측해보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학생들이 한결같이 적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의 미래는 낙관적이다. 나의 미래는 스웨덴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재하고 사회보장제도가 나를 보호하는 한 나는 실패가 두렵지 않다. 국가는 내가 힘들 때 도움을 주고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에 대한 믿음을 갖고,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잘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스웨덴 국민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탄탄한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땅이나 집을 다 팔아서 공유하는 것은 하지 못해도, 세금 조금 더 낼 수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부자라도 부자 감세하자는 정당 말고, 부자 증세하자는 정당에 투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좀 손해를 봐도 기꺼이 그럴 수 있어야 기독교인입니다. 내가 여유가 있다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도 헌금할 수 있어야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야 우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 신학자가 예수의 부활이란 내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 앞에서 어떤 방법으로 내 삶에서 예수를 살려내시겠습니까? 각자 이 답을 찾아내어 실천하는 이번 한 주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