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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5년
제목 [1.5] 빛 가운데로 걸어가라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5-01-08
조회수 3284
첨부파일
p250105_질그릇 1단.pdf


빛 가운데로 걸어가라!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4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6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7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요 1:9-18)

 

‘짐승’의 세상에서 부르는 ‘인간’의 노래

2025년 새해 첫 주일을 맞아 만복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임 가운데 충만하기를 빕니다.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지만 여느 해와 달리 우리 마음이 무겁습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일으킨 후폭풍과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때문입니다. 새해를 이런 심경으로 맞은 것은 난생처음인 것 같습니다.

새해 첫날 저녁 뉴스를 보니 사람들로 북적였을 전국의 해돋이 명소들도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또한, 일출 명소 대신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발걸음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우리 국민이 자랑스럽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새해 첫 주일에 성가대가 「인간의 노래」라는 일본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 곡은 기독교 찬양곡이 아닙니다. 몇 주 전에 성가대장님이 이 노래를 찬양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곡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장했지만, 첫 구절 가사가 너무 좋아서 새해 주일에 불러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깊은 상처 안고 사는 지친 어깨에

작은 눈길 건네는 친구가 있는가

고통 속에 누워 서러웁게 식어가는

차가운 손 잡아줄 동지는 있는가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동지’가 되어준다면 한 해를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왜 ‘인간의 노래’일까가 궁금했습니다. 또 마지막에 나오는 가사도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나는 부르리 자유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정말 깊은 사연이 있는 노래였습니다. 1987년 4월에 일본 국철의 분할 민영화를 전후해서 노조원 200여 명이 자살했답니다. 사업장에서 목을 맨 젊은 노동자들이 줄을 잇는 등 노동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갔습니다. 그때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살아서 싸우자며 간절히 염원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이 곡 「인간의 노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곡은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짐승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유, 평등, 평화, 사랑이 넘치는 ‘사람 사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하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인간’의 노래이고, 사람 사는 세상을 희망하며 연대해서 싸우는 모든 사람의 노래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끝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고, 그 십자가 길에 함께 나선 동료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서로서로 힘을 북돋아 주며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하는 것입니다. 2025년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말씀, 불이비일(不二非一)

‘성서일과’(RCL)가 제시한 오늘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로 18절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머리말인데, 창세기 1장에 있는 천지창조 이야기처럼 일종의 ‘찬가’입니다. 이는 마치 ‘오페라의 서곡’처럼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 전체 내용을 미리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찬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요 1:1-4)

 

너무나 익숙한 구절인데, 그 뜻은 알쏭달쏭합니다. 과연 ‘하나님’과 ‘말씀’은 어떤 관계일까요? 이현주 목사님은 그것을 ‘불이비일’(不二非一)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불이비일’(不二非一)은 문자 그대로 ‘둘은 아닌데’(不二), ‘하나도 아닌’(非一) 묘한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인데 둘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닙니다. 뭔 소린지 이해가 가시나요? 이는 마치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개념과 비슷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창세기 1장도 보시겠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수단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지창조는 하나님이 한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한 걸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둘일까요 하나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구별’은 되는데, 결코 ‘분리’는 할 수는 없는 관계를 ‘불이비일’(不二非一)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요한복음 머리말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구약의 지혜전통을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증언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님’과 ‘그 말씀’의 관계처럼 ‘불이비일’(不二非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뒤에서 수차례에 걸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라고 증언하고(10:38, 14:10.11.20, 17:21.23),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도 증언하는 것입니다(10:30, 17:11.22).

 

말씀과 생명 그리고 빛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말씀과 생명과 빛’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 3~4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요 1:3-4)

 

여기서 ‘그’가 가리키는 것은 ‘말씀’이고,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는 본문 14절이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증언하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4절은 “말씀—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라고 바꿔 읽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생명(生命)이란 무엇입니까? 한자를 직역하면 ‘살아있는(生) 명(命)’이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생(生)을 동사로 읽으면, 생명이란 ‘명(命)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명은 ‘하늘의 명’, 곧 천명(天命)을 뜻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평하게 내려받은 하늘의 명령을 말합니다. 누가 이 명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3절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명을 살아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 명을 짓밟고 비웃고 욱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순천(順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천(逆天)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사람은 산 사람이고(順天者存), 뒤의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逆天者亡). 예수 그리스도는 순천자의 본(本)입니다. 따라서 4절 후반부는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천명을 좇아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의 외길 인생이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빛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라고 나아갈 바—우리의 목표요, 동시에 그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는 밝음에 속한 자요, 어둠을 이긴 자입니다. 북극성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한, 여행자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빛은 우리에게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밝혀줍니다. 따라서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말은 “그의 삶은 사람들이 바라고 나아갈 바 목표이자 그리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라고 바꿔 읽어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삶의 본(本)이요 또한 그렇게 살도록 부추기는 힘입니다.

 

빛 가운데로 걸어가라!

그런데 이 세상은 왜 이리 어두울까요? 본문 9절은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은 빛이 없어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분명 빛은 존재하지만 그래도 어둡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다음인 10절과 11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이 세상에 참 빛이 왔지만, 빛의 백성들이 그 빛을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맞아들이다”라는 말에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맞아들이려면 자기가 맞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내가 맞아들이려는 사람이 오른편에 있는데, 왼편을 보고 맞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로써 빛이 비치지만 우리가 어둠 속에 사는 이유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빛을 등지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로등을 향하여 밤길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가로등이 있는 동안은 길이 환합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내 뒤에는 그림자(어둠)가 따르고 있습니다. 가로등에 멀수록 그림자는 크고, 가까울수록 작아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로등 빛이 정수리에 쏟아질 때 길은 가장 밝고, 그림자는 내 몸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어둠은 없습니다. 이제 가로등을 등지고 걷습니다. 빛을 등지는 순간 내 앞에 그림자가 생기고, 빛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그림자(어둠)는 점점 커집니다. 만약에 다음 가로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림자는 자꾸자꾸 커지고 마침내는 내 몸까지 어둠에 삼켜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빛을 등지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등지고 서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어둠을 밟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빛을 영접하면 됩니다. 빛을 향해 돌아서면 됩니다. 빛을 향해 돌아서서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어둠 없이 참 생명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성’ 말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요한복음 8장 12절과 12장 46절을 보시겠습니다.


12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8:12)

 

46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12:46)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의 자녀가 아니라, 계속 어둠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아 빛의 자녀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나를 따르는 사람’의 정확한 의미는 ‘나를 계속해서 따르는 사람’입니다. ‘따르다’의 그리스말 동사(ἀκολουθῶν)는 계속되는 행위를 가리키는 시제—‘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계속해서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빛을 선택하는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반복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처럼 2025년 한 해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서고, 그 빛 가운데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증언 서두에 말했듯이 2025년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어둡습니다. 내란과 참사의 와중에 묵은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란이 아직 완전 종식되지 않아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대통령이 내란죄를 저질렀고 외환죄까지 저지르려 했던 것까지 폭로되고 있는데, 헌법수호를 서약했던 대통령은 법을 무시하고 경호처 뒤에 숨어서 버티고 있습니다. 이를 목격한 국민은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서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버티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빛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민명(民命)이 천명(天命)”입니다. 국민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그 명령을 좇아 빛 가운데도 걸어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빛의 혁명’은 2016 ‘촛불 혁명’과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하나는 촛불이 응원봉으로 바뀐 것입니다. 촛불은 바람 불면 쉽게 꺼졌지만, 형형색색 LED 응원봉은 더 밝고, 더 오래가고, 더 강력합니다. 다른 하나는 비장한 운동가요 대신 활기찬 K팝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가 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특징이 87년 체제를 넘어 올해 새롭게 시작할 25 체제의 청사진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소녀시대의 데뷔곡인 ‘다만세’는 대중가요지만, 2015년부터 퀴어문화축제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해 왔고, 2016년 이화여대 학생시위에서 불리면서 2030 여성들의 저항가요가 되더니, 이번 탄핵 집회에서 완전히 민중가요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2030 여성들은 아무 생각 없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들이 어떻게 장애인을, 빈민을, 농민을,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를, 성소수자를, 이주노동자를 사람으로 보겠는가?”라고 물으며, 차별이 종식되고 소외된 이들을 호명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꾸며 이 노래를 목청껏 불러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87년 민주화 체제를 업그레이드한 25년 민주화 체제는 한 색깔의 촛불이 형형색색의 다양한 LED 응원봉으로 바뀐 것처럼 서로의 다름을 배제하지 않고 인정하는 체제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대를 넘어 환대’로 나아가는 체제일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열린 밥상공동체’처럼 말입니다. 새로운 25년 민주화 체제는 여성, 장애인, 빈민,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가 차별받지 않는 자유, 평등, 평화, 사랑이 넘치는 ‘사람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이 희망을 안고 더 힘차게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