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지리라 믿은 여인들
39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42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43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44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45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46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48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49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50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51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52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53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54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39-55)
두 여주인공의 공통점과 차이점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인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RCL)가 제시한 복음 말씀은 누가복음 1장 39절로 55절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이 두 여자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둘 다 남편 또는 정혼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했거나 곧 결혼할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관습으로 ‘정혼’은 ‘결혼’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특히 순결 의무에서 그랬습니다.
둘째, 두 사람은 모두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중에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지만, 축복된 일입니다. 또한 임신과 출산은 남성은 절대로 체험할 수 없는, 오직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셋째, 두 여인의 임신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준 이는 (사람이 아니고) 천사 ‘가브리엘’이었습니다. 이는 두 여인이 출산할 아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두 여인의 임신이 평범하지 않고 특별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서’ 임신할 수 없었고, 마리아는 ‘처녀’이기에 임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여인 모두 불가능한 임신을 했던 것입니다.
이 세 번째 공통점은 둘의 차이점으로 이어집니다. 이 둘 다 불가능한 임신을 했지만, 엘리사벳의 임신은 축복받을 일이었고, 마리아의 임신은 정반대였습니다. 행복한 일이 아니라 불행한 일이고, 축복이 아닌 저주, 축하가 아닌 비난 받을 일이었습니다. 아니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신 22:23-24 참조). 왜? 태중의 아이는 정혼자 요셉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둘 다 임신 소식을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들었지만, 세례 요한의 경우는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라 아버지 사가랴가 들었고, 예수의 경우는 아버지 요셉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따를 때 그렇습니다. 이와 달리 마태복음은 천사가 아버지 요셉에게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갸랴의 믿지 않음과 마리아의 믿음
누가복음은 제사장 사가랴가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수태 고지를 받은 것은 본인이 속한 아비야 조가 차례가 되어서 제사장 직분을 담당했을 때, 제비 뽑혀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천사가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13“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14그 아들은 네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눅 1:13-14)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가랴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 (눅 1:18)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같은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공동번역 눅 1:18)
이렇듯 사가랴가 자기 말을 믿지 못하자, 천사 가브리엘은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은 벌을 줍니다.
“보아라, 그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눅 1:20)
그 뒤에 얼마 지나서,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했습니다. 여섯 달 후에,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요셉의 정혼자 마리아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30“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31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눅 1:30-31)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깜짝 놀라 천사에게 묻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눅 1:34)
‘알지 못한다’는 말은 처녀(virgin)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답합니다.
36“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37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눅 1:36-37)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비로소 용기를 내 하나님 뜻을 받아들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눅 1:38)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천사의 수태 고지가 기쁜 소식이었음에도 믿지 않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수태 고지가 비난받을 소식이었음에도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랐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자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라 아버지 사가랴가 수태 고지를 받은 것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가 그 첫 번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남부지방 유대에서 살았고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하지만 이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을 때, 그 잘못은 온전히 아내 몫이었습니다.
성서에는 자녀 없는 부부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엘가나와 한나가 대표적입니다. 당시에 불임은 하나님의 벌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신다”(창 16:2)고 말합니다. 또한 씨받이 하갈이 임신한 후에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창 16:4)라고 하고, 그래서 사라는 “고통받고, 멸시받았다”(창 16:5)라고 합니다. 한나의 경우도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다”(삼상 1:5)라고 하고, 엘가나의 다른 아내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삼상 1:6)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분이나 남편 사랑 등에 상관없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비천한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늘그막에 임신하고 숨어 살았지만,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 (눅 1: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가톨릭 새번역, 눅 1:25)
그렇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두 번째 차이점은 ‘불임’이 여자에게는 ‘부끄러움/치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마리아는 ‘임신’이 부끄러움이요 치욕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아이가 정혼자의 아이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을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눅 1:37)라고 하면서 친척 엘리사벳이 늙어서 임신한 사실을 예로 듭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확인하고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야기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나이 차이가 클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 임신할 수 없다고 했으니, 엘리사벳은 40대 중반 이후였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마리아는 결혼이 가능한 10대 중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의 나이 차이는 적어도 30년 이상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라며 깍듯이 예우합니다. 또한 “태중의 아이도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그를 통해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그의 존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10대 중반의 한 소녀였지만 우리 신앙의 모범입니다. 앞에서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전갈을 듣고 놀라운 고백을 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종은 아닙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으로 사용되어도 좋습니다. 나는 주의 것이니 주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이게 마리아의 결심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전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너의 몸이 필요하다”라는 것이었는데, 마리아는 이런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온전히 바쳤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조차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내놓기 꺼리는데, 마리아는 자신의 미래 전체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46절부터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마리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곳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아픔도 알고,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도 잘 압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세상을 낳기 위해 자기 몸을 바쳤습니다. 그게 어째서 가능했을까요?
많은 여성 학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여성성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여성 학자인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남성들이 여성성을 확보할 때 인류는 평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여성의 몸이 갖는 특수성에 대해 말합니다. “여성의 몸은 병이나 거부반응, 생체 조직의 죽음을 유발하지 않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는 특수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해 보면, 유기체로서의 우리 몸은 이물질이 들어오면 온갖 면역 체계를 동원하여 그것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혈액 속에 있는 백혈구는 혈액과 조직에서 이물질을 잡아먹거나 항체를 형성하여 감염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임신’입니다. 자궁 속의 태아는 자기만의 체계를 가진 유기체이기에 이물질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몸은 그와 10개월이나 공존하는 길을 택합니다. 여성들이 남성과 비교해서 타자와 공존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그러한 몸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철학자 강신주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최고인 세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타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세상일 것입니다. 공존과 상생은 힘을 상징하는 남성성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반대인 여성성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여성성에서 나온다는 말은 참이고, 오늘의 주인공인 마리아가 그 모델입니다.
이번 탄핵 집회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8년 전 박근혜 탄핵 집회와 달리 촛불이 응원봉으로 진화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은 여성들입니다. 여의도에 수유와 기저귀 교환을 위해 등장한 ‘키즈버스’도 한 아이 엄마가 휴가비를 모두 기부해 이루어졌답니다. 따듯한 음식과 음료를 무료로 나누고, 핫팩과 방석 등을 공짜로 나누어주는 풍경도 남성적이기 보다는 여성적입니다.
따라서 포용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듯 보이지만 강하며,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찬가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마리아는 여성인 자기 몸을 빌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다봅니다. 주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실 것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 힘에 도취했던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천대받던 이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들을 먹이시고, 남의 배고픈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이들은 빈손을 떠나게 하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런 주님을 잉태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할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뜻이 이 땅에 실현될 수 있게 하려고 자기 몸을 자궁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결코 연약한 여인이 아닙니다. 역사의 변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친 강한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성모(聖母)인 것은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자궁이 되어줄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도란 하나님의 ‘자궁’이 되어 드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빌려
성탄을 앞둔 대림의 계절에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하듯이, 주님에게도 우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배제한 채 새 세상을 일구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일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기꺼이 응답하는 이들과 더불어 당신 뜻을 펼치십니다. 비록 힘겹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수난의 가능성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주님을 잉태하는 자궁입니다.
주님은 그의 몸이 되어 드리기로 작정한 이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이제 마리아의 용기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차례입니다. 주님의 자궁이 될 차례입니다. 내가 있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꿈이 육신을 입을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