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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성서의 맥
제목 성경통독 "성경의 맥을 따라" 제27주차 길잡이 및 과제물 (20201014)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10-08
조회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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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27 길잡이_1단.pdf
통독 27주간 과제물.hwp

성경의 맥을 따라27

 

1.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주제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도 마가복음 이후 10년 내지 20년 사이에 써졌을 것으로 추산되며, 마가복음과 Q자료에서 많은 자료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은 두 권으로 써진 책의 첫 권이며, 두 번째 책은 사도행전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데오빌로에서 헌정된 것인데(1:3, 1:1), 이는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lover of God 또는 God lovers) 일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그 주제와 구성에 있어서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동일한 저자가 쓴 하나의 저술로 봅니다.

누가가 그의 책을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으로 나눠 쓴 결정적 배경은 실천적인 이유 때문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당시의 책은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그 길이와 무게의 한계 때문에 누가는 그의 글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나눠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지역적 확산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유대 모국 땅에서 예수가 유대 사람을 상대로 한 선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유대 모국 땅을 벗어나서 로마제국으로까지 선교했던 초기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는데, 이 선교는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대인들에게서 시작되어 곧 이방인에게로까지 이르게 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운동이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끝나고, 사도행전은 (예수 운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끝이 납니다. 그래서 누가가 쓴 두 권의 책을 통틀어 보면 예수 운동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로마까지 확정되어 끝이 나는 셈입니다.

 

성령-약속과 성취

누가복음의 두 번째 주요 주제는 거듭된 성령의 강조입니다. 마태와 마가도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합니다만, 누가복음에는 이들보다 훨씬 더 자주합니다. 누가복음은 첫 두 장에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 아니라, 엘리사벳과 사가랴(세례 요한의 부모), 그리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시므온도 모두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나 마가와 마찬가지로 누가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고 또 성령이 광야로 인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가 공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할 즈음 다시 성령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4: 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끝부분에 가서 예수는 죽기 전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라고 말합니다. 또한 부활한 예수는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49)라고 추종자들에게 성령을 보낼 것을 약속하는 말로 누가복음을 끝맺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약속하는 예수의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곧 이행되어 예루살렘에 오순절날 성령이 그 공동체에 내리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2:1-4)

 

예루살렘에는 여러 다른 나라에서 와서 각기 다른 나라 말을 하던 유대인이 많이 있었는데 방언의 은사를 통해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상징적인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바람은 구약성경에서 성령을 나타내는 오래된 상징적 표현이었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은사라는 표현은 인간이 서로 다른 언어로 분열되었다고 한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모방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뜻은 바벨탑 이야기와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인류사회의 재결합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성령이 내린다고 말한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뜻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겠다”(2:17).]

사도행전에서는 성령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서 마치 성령이 이 책의 주역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하나의 공동체를 탄생시킬 뿐 아니라, 성령은 그 공동체의 사역에도 많은 진전이 있도록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를테면 빌립이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개종시킨 일, 바울을 개종시킨 일,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백부장을 개종시킨 일,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첫 전도여행을 떠나게 한 일, 바울에게 복음을 유럽에 전하라고 한 일 등이며, 그 외에도 많습니다.

성령은 또 예루살렘 회의도 인도하여 그 운동에 참여하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조건을 붙여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성령과 우리에게 아주 좋은 줄 알았노라라는 말로 끝맺는데, 이런 말은 나중에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이 외에도 누가복음에는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기록을 자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잉태하게 했고, 예수에게 능력을 주었으며, 또 예수를 인도해준 바로 그 성령이

지금은 (유대사람들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의 중심인) 로마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역사하고 있다고 사도행전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공인으로서의 첫 장면

누가복음에서 성령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또 다가올 이방 전도가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나 하는 것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공인으로서의 첫 장면에 잘 포착돼 있습니다. 누가는 마가복음에 기록된 첫 연설(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을 예수의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있었던 예수 이야기로 이를 대치합니다. 그 장면은 예수가 이사야를 읽는 데서 시작되고, 이것이 누가에 기록된 예수의 공적 행적의 첫 이야기가 됩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이 구절은 누가가 본 예수상을 총괄적으로 너무나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행동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회적 예언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첫 장면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예수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두 예언자 이야기를 합니다. 이 두 예언자는 모두 이방인에게 보내졌는데, 하나는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에 사는 한 과부에게 보낸 엘리야이고, 다른 하나는 시리아 사람 문둥병자인 나아만이라는 사람

에게 보낸 엘리사입니다. 좀 전만 하더라도 예수가 다른 성경구절을 읽을 때 좋아서 듣고 있던 회당에 있던 무리들은 이 대목에 와서 화가 나서 예수를 낭떠러지로 떠밀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가운데를 지나 갈 길을 가버리고 맙니다”(4:30).

이것은 물론 역사적 기록은 아닙니다. 나사렛 이웃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와중에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웃들이 죽이려 했다는 것은 예수가 나중에 처형당하게 될 것을 암시했을 뿐입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첫 연설 장면과 같이 누가가 그린 주제 설정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공통된 주제를 미리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예수의 사역, 그리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기독교운동을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연장되고 확대된 사역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사역이 시작될 때 예수에게 기름 부어 주었던 성령이, 이제는 오순절 사역에 즈음해서 크리스천 공동체의 사역에 같은 능력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예수의 사역을 세상에 나가서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7주 첫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예수의 탄생 및 유년 시절

누가 1-3

89

 

27주 둘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갈릴리에서의 활동

누가 4-8

144

 

우리가 누가복음을 읽으며 꼭 주목해야 할 경구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는 말씀입니다. ‘자비’(compassion)는 예수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말씀이 선포된 상황’(context) 속에서 찾아져야만 합니다.

예수가 살던 1세기 유대 사회는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19:2)는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사회였습니다. 당시 사회의 최대 규범이었던 거룩함은 불결하고 부정하고 죄 된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과 구별되는 순결(純潔)이나 정결(淨潔), 그리고 성결(聖潔)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정결제도”(purity system)인데, 당시 유대 사회는 이런 정결제도에 의해 지배받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순결하냐 부정하냐,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구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의 나이가 몇인지, 본관이 어디인지, 양놈인지 상놈인지 등을 제일 먼저 알아보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그 사람이 거룩한지 부정한지, 정결한지 불결한지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럼 누가 정결한 사람이었을까요? 정결법을 포함한 여러 율법들을 잘 지키면 깨끗하고 의롭지만, 율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또는 잘 지키지 못하면) 부정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장애인도 정결하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번영하는 게 당연하므로 가난은 의롭지 못하다는 반증이었습니다. 기타 성별이나 인종에 의해서도 정결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이 갈리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정결제도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제도여서,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당시 유대 사회는 명확한 경계(boundary)를 가진 사회로서 의인과 죄인, 건강함과 병듦, 온전한 자들과 불구자들, 남성과 여성,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정결한 편에 선 사람들이 부정한 편에 선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배척하고 정죄하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자비”(compassion)를 전면에 내세우셨습니다. 자비는 그 어원상 풍부한 함축성을 가집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 모두에서 그 어근은 자궁입니다. 자비롭게 된다는 것은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영양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하고 보듬어 보살피는 어머니의 태/자궁을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 ‘compassion’‘passion’이라는 말 앞에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com’을 붙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passion’열정이란 뜻도 있지만 고난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compassion남의 수난에 함께 동참한다,” “함께 아파한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것은 자선(mercy)과는 다릅니다. 자선은 나와 남을 비교해서 내가 남보다 우월하니 그 차이때문에 남을 동정하고 시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compassion은 남의 아픔과 슬픔이 그만의 아픔과 슬픔이 아니라 나의 아픔과 슬픔으로 느껴지는 차원, 그래서 그의 고난과 아픔에 내가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정결과 반대되는데, 가장 주목할 것은 포용성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결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경계선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삶은 본질적으로 경계선을 넘어섭니다. 아니 기존의 모든 경계선들을 부숴버립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바로 이런 자비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는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11:28)고 말씀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불러 모았습니다. 이렇듯 예수는 배척이 아닌 포용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인 예수 공동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한 책에서 우리의 현재 형태의 교회생활이 예수와의 연속성을 반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깨뜨리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자비를 가르치고 실천했던 분이라고 배웠습니다. 자비는 끌어안고 경계를 허물고 포용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

도 배웠습니다. 이런 빛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해 봅시다. 과연 오늘날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를 실천한 예수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깨뜨리고 있습니까? 과연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포용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배타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 당시의 사람들처럼 각자 경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경계는 물질(재산)일 수도, 재능일 수도,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별이나 인종, 심지어 종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나와 남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하고만 편협한 사랑을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학력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종교차별주의자 등등 어떤 종류든 차별주의자라면 자비를 가르치고 실천했던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차별금지법). 비록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할지라도 말입니다. 과연 나의 현재 생활 형태는 예수와의 연속성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깨뜨리고 있습니까?

 

27주 셋째 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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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도

스승 예수

누가 9-13

40

 

27주 넷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누가 14-17

112

 

27주 다섯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누가 18-21

24

 

27주 여섯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이루어진 구원

누가 22-24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