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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성서의 맥
제목 성경통독 "성경의 맥을 따라" 제26주차 길잡이 및 과제물 (20201007)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9-23
조회수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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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26주간 과제물.hwp

성경의 맥을 따라26

 

1. 마태복음의 주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보다 10년 내지 20년 후에 써졌습니다. 그 내용은 1세기말엽 유대계 크리스천 공동체가 다른 유대인들과의 사이에서 경험한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은 가장 유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유대교에 대해서 가장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에 대한 적개심

마태복음에는 유대인을 자기네와 다른 동떨어진 사람들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교 회당인 시너고그를 저들의시너고그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따위입니다. 예수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비난한 것도 마태복음은 더욱 신랄하게 이들에 대해 독설을 퍼붓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3장에서는 이들에 대한 비난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또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라는 말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켜 눈 먼 인도자’ ‘어리석고 눈먼 자’ ‘혹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사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마태복음에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혹은 나라)에게 주실 것이다”(21:43)라고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경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재판 장면을 마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손에서 예수의 피를 씻어내는 장면의 묘사를 덧붙임으로써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아무 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7:24). 오히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시오”(27:25)라는 말로 예수의 유죄 판결에 대한 책임을 유대 사람들과 그 자손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으뜸가는 종교로 자리 잡은 이후로 줄곧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못된 짓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유대교와의 심한 갈등은 물론 마태 공동체의 환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유대 땅을 재점령한 후 성전이 파괴되어 없어졌지만 생존자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토라(Torah)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종교 활동의 중심이 되어왔기 때문에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 유대사회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는 유대 사람들은 참 유대인이 아니라고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주장하고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그가 속한 유대계 크리스천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전통에 충실하다는 내용입니다.

 

유대교와의 연계성

마태복음 저자는 유대인 전통과의 연계성을 강조함으로써 유대교와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복음서 저자보다 히브리 성경을 많이 인용했는데,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것 외에도 기록된 바하고 분명한 인용을 한 것만도 마흔 번이나 되고, 또 그런 표현 없이 인용한 것도 스물한 번이나 됩니다. 그는 예수의 혈통을 유대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록하였고, 또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의 전도를 유대인에게 국한시켰을 뿐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10:6)고 이르셨다고 기록했습니다.

1세기 때의 유대인들이 히브리(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던 율법과 예언서의 전통적 타당성을 예수도 증언했다는 기록은 마태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5:17-18)

 

이 외에도 마태복음 저자는 복음서를 쓰면서 모세의 유형을 활용했고, 마가복음에서 90퍼센트 정도의 자료를 사용했으며, Q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가르침도 덧붙였습니다. 그 외에는 마가복음이나 Q복음서에 없는 것으로 나머지를 채워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료를 모아 마태복음을 쓰면서도 독특한 방법 또한 채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부분으로 분류하고, 이 다섯 부분을 각각 비슷한 말인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라고 끝을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부분으로 묶어놓은 것은 모세오경의 다섯 권의 책을 연상시킵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를 하면서 마태복음 저자는 모세 출생 이야기를 모방합니다. 모세가 출생했을 때 히브리 사내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이집트 왕 바로가 명령하여 모세의 생명이 위협 받듯이, 예수가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내 아기를 다 죽이라고 헤롯왕이 명령해서 예수의 생명도 똑같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는 모세와 같고, 헤롯왕은 이집트의 바로와 같으며,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은 새로운 출애굽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공인으로서의 첫 장면

모세의 유형은 예수의 첫 연설에도 반영되었습니다. 표면상으로 보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가 공인으로서 행한 첫 연설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조금 바꿔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4:17)라고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곧 마태복음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잘 알려진 산상설교의 장면입니다. 이 산상설교는 세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다섯 가지 가르침의 첫 번째에 속합니다. 이 산상설교는 축복으로 시작하여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조적인 두 길을 인용한 비유로 끝을 맺습니다. 즉 한 길은 집을 바위 위에 짓는 지혜로운 길이고, 다른 길은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같은 표현으로 대조법을 써가면서 마태가 살던 공동체의 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 장에 기록된 설교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하면서도 파격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설교를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마태복음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5:1-2)고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이 설교를 산 위에서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같은 설교의 일부를 누가복음에도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설교를 평지에서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평지설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이 설교를 산 위에서 한 것으로 기록했을까요? 이는 모세의 유형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즉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토라를 받았듯이 예수도 산에 올라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태는 예수의 공인으로서의 첫 장면을 묘사하면서 예수는 모세와 같다고 하는,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히브리(구약) 성경도 자주 인용했고, 또 예수의 가르침을 모세오경처럼 다섯 부분으로 묶었습니다. 그리하여 마태는 예수의 공인으로서의 첫 장면을 묘사하면서 이 복음서가 자기 공동체에서 마치 모세오경 같은 구실을 했음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최초 이야기(예수 이야기)요 삶의 길을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문헌 구실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태와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마태복음이 모세오경의 구실을 하긴 했지만 이를 대치했던 것은 아니고, 이미 설명했듯이 마태복음 517-20절에 기록한 것처럼 율법과 예언서는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를 묘사할 때 예언의 성취로 보았고, 또 예수가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고 함으로써 자기 공동체에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던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명하려 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미 마태 공동체에서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세기말엽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전통이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있지 않고, 자기가 속한 유대계 크리스천 공동체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각기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하여 결국 다른 종교로 갈라지게 되지만, 아직은 마태와 마태 공동체에게는 유대인 사이의 내부 갈등이었고 투쟁이었을 뿐입니다.

 

26주 첫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

1:1-4:16

72


 

마태는 자기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그 첫 머리에 예수의 계보(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1:1). 즉 마태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입증하려고 독자들에게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16절에서 곧 문제에 부딪힙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1:16).

그 전까지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1:2)처럼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보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16절은 야곱은 요셉을 낳고, 요셉은 예수를 낳았다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는 것이 이 족보의 본래 의도였다면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로 서술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으로 그려집니다. 11-15절까지는 다윗 가문인 예수의 부계혈통이 서술되었는데 반해, 마지막 절정인 16절에서는지금까지 이름을 열거했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리면서예수가 분명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소개됩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118-25절의 동정녀 탄생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만약 예수가 요셉과 상관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면, 도대체 이제까지 말한 요셉의 족보와 예수는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이런 시각으로 예수의 계보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창세기에 실려 있는 여러 족보들과 달리 예수의 족보는 좀 특이합니다. 그 특이점은 예수의 족보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네 이방여인입니다. 다말, 라합, ,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이들은 이스라엘 족장사에서 위대한 여인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킨 사람들입니다. 기생으로 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한 다말(38), 히브리인들에게 자신의 도시(종족)을 팔아넘긴 여리고의 기생 라합(2, 6), 타작마당에서의 하룻밤을 빌미로 보아스와 결혼한 모압 여인 룻(3), 다윗과 간음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만약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으로 그리려는 것이 본래의 의도였다면 마태는 이들을 등장시키지 말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이방여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말은 여성의 존재 이유를 부계혈통의 계승에 두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사회의 희생자였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지극히 효성을 다한 이방인 며느리 룻은 공적인 사회의 뒷전으로 밀려난 여성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오로지 남편에게만 의지하는 여성들, 의지할 남자가 없어지면 인간으로서의 기본생존권마저도 위협받아야 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녀 라합은 자신과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떳떳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희망했고, 하삐루(히브리)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해 용감하게 정탐꾼들을 받아들여 역사의 변혁기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운 여성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아의 아내마태는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해서 다윗의 불륜을 드러내 놓고 말하고 있는데, 그 우리아의 아내는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여인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의 족보는 가부장제사회에서 희생당한 여성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이 여자들이 도도하게 이어지는 왕들의 명단 속에서 그 흐름을 역류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왕들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이 여인들의 후손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1장이 증언하는 동정녀 탄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그저 약속의 성취나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여성신학자들은 그것이 남성의 역할 배제에 초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라는 인물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인간역사의 과오를 밝히 들추어내고, 그 역사를 심판하는 일을 한다는 점을 드러내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26주 둘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선포된 하늘나라

4:17-9:38

147


 

마태복음 53-12절에는 여덟 개의 복을 소개한 팔복(八福)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 620-26절에는 네 개의 복과 네 개의 화를 소개한 사복사화(四福四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가복음의 것이 예수가 말씀하신 원형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거기 보면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글자 그대로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피 우는 자에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 써진 때는 예수가 활동하던 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고국 땅에서 모두 쫓겨났습니다. 본격적으로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땅에 살던 유대계 크리스천들 역시 실향민, 디아스포라가 되어 이방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저들은 교회공동체를 의지하며 살았는데, 그 가운데 마태라는 사람이 속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것이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문제였습니다. 마태의 공동체도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서도) 소수인 우리 유대계 크리스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교회가 속해있는 이 민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민족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분명하게 이스라엘을 강조합니다. 이는 민족의식을 분명히 해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결성 해야겠다는 마태교회의 의지가 깔려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의 입을 빌어 마태교회가 한 말입니다.

이렇듯 마태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겪고 있던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해 교회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씨름하여 맺은 결론을 자신의 복음서 속에 산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마태교회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당시 바리새파가 주도한 라삐 유대교처럼)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언뜻 보면 배타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들은 민족을 말하지만, 유대 민족만의 구원이 아니라 세계 구원을 추구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새 이스라엘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함으로 가능하다고 보았고, 교회는 그 사명으로 불림 받은 공동체라고 자부했습니다. 팔복의 말씀을 비롯한 마태복음 곳곳에 분명한 증거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팔복은 누가복음의 것이 예수가 말씀하신 원형에 더 가깝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6:20). 이것이 예수의 메시지였습니다. 가난에 찌들어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저들이 살 수 있었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가난한이란 말 앞에 마음이’/‘심령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5:3). 예수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했는데, 마태는 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 대상을 애매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자이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과연 어떤 의도로 이 말을 덧붙였을까요?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영에 있어서 가난하다는 말은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 가난, 즉 의식적인 가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자발적 가난을 뜻하는 말로, 구약의 전통으로 말하면 의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누가는 그 다음으로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6:21). 예수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 먹을 것이 없는 사람, 그래서 밥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냥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니라 의에”/“정의에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바꿨습니다(5:6). 그냥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남의 도움이 필요한 소극적인 상태의 사람이라면, 후자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래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남을 돕기 위해 나서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상태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으로 누가는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6:21)고 합니다. 이것이 처음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5:4, 개역)고 합니다. ‘슬피 울다라는 말은 애통하다라는 말과는 다른 표현인데, 전자는 남이 때리니까 슬퍼 운다든지, 누가 죽어서 슬피 운다든지 하는 소극적인 의미라면, 후자는 이제 비상한 때에 이르렀구나, 정말 박해가 왔구나 하는, 그래서 울분에 견딜 수 없어서 통분해 하는 그런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마태는 전자를 후자로 바꾼 것입니다.

팔복이 가리키는 사람들을 교회 구성원이라고 생각할 때, 저들은 단순히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피 우는 자였습니다. 이는 젖을 달라고 우는 상태와 같았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는 입장을 달리합니다. “영에 있어서 가난한 자는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저들은 의도적으로 가난했습니다. 가난의 의미가 엄청나게 확대된 것입니다. 깨달은 것입니다. 또 저들은 그냥 굶주린 것이 아니라 정의에 굶주렸습니다. 여기에는 투쟁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얻어맞아서 우는 약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로 통분해 하는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의 팔복(八福)에는 누가의 사복사화(四福四禍)에 없는 말들이 등장합니다. “온유한 자”, “자비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가 그것들입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노력이 없이는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태가 가리키는 복 있는 자들은 모두가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인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마태는 여기에 평화를 이루는 자를 덧붙입니다. 피스메이커(Peace Maker),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러 나서는 사람은 결코 수동적일 수 없습니다. 그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마태복음의 팔복이 가리키는 복 있는 자들은 결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이제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마태의 팔복에는 밤낮 받아만 먹지 않고 이제는 주어야겠다는,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성도/거룩한 무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표출되어 있습니다. 누가와 비교하면 교인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누가의 교인들은 그저 가난하고 굶주리고 억눌려서 얻어맞고 슬피 우는 자였습니다. 무엇인가 결핍되어있는 자, 피해자, 소외자였습니다. 그래서 남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태에 있어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시혜자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자의식, 그런 주체의식을 가진 크리스천으로 바뀌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주체의식은 팔복의 말씀을 넘어 마태복음 전체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한 이야기가 마가복음 8장에 나옵니다. 베드로의 이 메시아 고백에 대해서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가 항의하자,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마가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승받아 자기 복음서에 실었는데, 여기에는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꾸지람을 한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8-19).

이를 주인의식이라고 해도 좋고, ‘성도의 자의식이라 해도 좋습니다. 앞서 팔복에 나온 주체의식이 지금은 얼마나 앞으로 나갔습니까? 여기서 베드로는 결코 개인이 아닙니다. 공동체입니다. 여기에 마태교회에 속한 이들의 의식이 어디까지 올라갔느냐 하면, “하늘나라의 열쇠를 우리가 가졌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권을 주셨다고 하는 의식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랐고, 이제는 바위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까지 결단하게 된 것, 이것이 마태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8장에 주목할 말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스라엘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마태공동체에게 부활한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교했던 처음 그 산에 다시 나타납니다. 거기서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는데, 이 말은 마태공동체의 자의식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8:19- 20). 이는 마태공동체의 일원인 우리는 이제 성령을 받았고, 세상을 뚫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명령을 받았다. 예수가 가르친 말씀을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사람들을 새 삶으로 전환하게 하며, 예수가 명한 모든 것들을 실천으로 옮기며 세계 혁명의 전선에 나서겠다. 내 뒤에는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신다. 나는/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런 자의식을 웅변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체험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들은 마침내 비좁은 이스라엘을 넘어, 예수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성령의 힘을 받아 세계를 변화해 갈 전선으로 나서는 선전포고를 했던 것입니다.

소극성에서 적극성으로, 불쌍한 민초에서 깨달은 선민으로, 패배의식에서 도전의식으로, 첫 예수의 제자들과 60년 후 예수운동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바뀌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전에는 고만고만했지만, 이제는 부쩍 성장했습니다. 성숙했습니다. 믿음이 진일보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연 우리의 신앙은 진보해 왔습니까?


26주 셋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그리스도 공동체

10:1-16:12

145

 

26주 넷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예수를 따르는 길

16:13-20:34

95

 

26주 다섯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도래한 하늘나라

21-25

63

 

26주 여섯째 날

내용

읽을 본문

시편 기도

수난과 죽음과 부활

26-2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