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세기 순례’를 출발하면서…

이번 성경공부의 제목을 ‘창세기 순례’(pilgrimage)라고 했습니다. ‘순례’는 사전적으로 “신성한 장소로의 여행”(journey to a sacred place)을 뜻합니다. 하지만 상징적으로는 “신성한 여행”(sacred journey), 즉 “하나님을 향한 여정(journeying toward God)”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25주 동안 성지(聖地)를 순례((巡禮)하듯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순례하고자 합니다. 성지 창세기 안에는 고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을 찾고 만났던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들 속에 감춰져 있는 보물들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순례 출발에 앞서 길잡이로서 길동무인 여러분께 우리가 이번 순례의 지침으로 삼을 금언(金言)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금언은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줄임말로 더 유명한 이 금언은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책에서 한 말입니다. 문화유산의 가치가 아는 만큼 보이듯, 종교유산인 성경은 “묻는 만큼 대답”합니다. 성경은 묻지 않으면 침묵하고, 물으면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 질문 없이 그냥 읽기만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도전이 없고,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식(information)을 쌓는데 있지 않고, 변화(transformation)를 받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번에 창세기를 순례하면서 꼭 질문들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경은 여러분에게 대답할 것입니다. 결단하라고 도전해 올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도전에 성실히 응답한다면, 이번 순례를 통해 확실히 변화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금언은 “‘과거’를 읽기보다는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금언은 고(故) 신영복 선생이 󰡔나무야 나무야󰡕란 책에서 한 말입니다. 선생은 같은 책에서 “역사란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歸還)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역사 공부란 회고(回顧, retrospect)가 아니라 전망(展望, prospect)이다”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뒤를 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을 내다보기’ 위해서입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현재에 대한 비판의 거점을 마련하고, 그 거점을 발판으로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증언’(witness)이요 ‘고백’(testimony)인 성경을 읽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회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망’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 성경 읽기의 목표는 과거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전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참’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 읽기를 통해 저들의 ‘증언’과 ‘고백’은 나와 우리의 ‘증언’과 ‘고백’이 될 것이며, ‘죽은 문자’가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순례란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니, 마음 따라 몸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가장 먼 여행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에서 손발로의 여행’이랍니다. 저는 이번 우리의 창세기 순례가 머리만의 순례가 아니라 마음의 순례, 몸의 순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이번 순례를 마치고 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기를, 아니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창세기 1-2장 길잡이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1:1-2:4a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2:4b-25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과학자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억 년 전에 거대한 가스폭발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big bang 이론). 이 우주 대폭발로 별들이 생겨나다가, 지구는 약 40억 년 전에 생겨났습니다. 이 지구에 대기권, 산소, 그리고 바다와 육지가 만들어진 후 약 1억 5천만 년 전에 생물이 생겨났고, 오늘과 같은 인간은 약 100만 년 전에 탄생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과학 지식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비평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을 가지고 ‘시문학’을 논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 즉 ‘doxology’입니다. [이는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멋진 성경의 시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시를 통해서 저자는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 시를 썼기에, 이 찬미가에는 당시 고대 동방사람들이 상상했던 우주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경 외에 고대 동방의 다른 문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우주의 모습은 대체로 위 그림과 같습니다. 땅(지구)은 둥글넓적한 원반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땅은 창조된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른바 “아랫물”(창 1:7)인 원시바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고대 동방사람들은 견고한 기둥들이 이 땅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지구 원반 위에는 돔(dome) 모양의 창공이 지붕처럼 걸려 있고, 거기에 해·달·별들이 마치 등불처럼 붙박여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이 창공 위에는 이른바 “윗물”(창 1:7)이 있는데, 이 물이 창공의 창문을 통해 비가 되어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또 땅 속에는 죽은 이들이 모여 있는 저승(下界), 곧 죽음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고대 동방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은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 당시의 상식과 지식에는 너무나 잘 부합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옛 사람들이 창조된 우주를 어떻게 상상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주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어보면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표1]에 요약해 놓았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저자에 의해서 씌어졌습니다. 1장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부르고, 2장은 ‘야훼’(여호와)라고 부릅니다. 학문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사제계 문헌(=P자료, 영어 priestly의 첫 글자)에 속하고, 2장은 야휘스트 문헌(=J자료, Yahweh의 독일어 표기 Jahweh의 첫 글자)에 속합니다. 구약성경 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세기의 저자는 적어도 3명 이상입니다. 앞서 밝힌 야휘스트 문헌(J)과 사제계 문헌(P) 외에 엘로히스트 문헌(E)이 더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학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창세기를 읽으면서 서로 중복되고 모순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여러 저자가 써서 그렇구나.”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표1] 창세기 1장과 2장 비교표

하지만 창세기 1장과 2장이 쓰인 각각의 시대 배경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완성된 것은 바빌론 포로기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다”는 것인데,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과 창조를 마친 후 “안식일에는 쉬셨다”는 이야기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이것은 바빌론 지배자들에게 “포로들인 우리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천부의 인권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이며, 하나님이 쉬셨으니 우리 역시 엿새간의 노동 후에 이레 째 되는 날에는 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즉,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첫째 날에는 이것을, 둘째 날에는 저것을 창조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다”는 것과 “모든 인간에는 천부적인 인권이 있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2-3장의 창조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번창했던 다윗-솔로몬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치·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하여 하나님을 잊고, 죄에 빠져 있는 왕과 지도계급, 그리고 백성들에게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한계성과 쉽게 죄에 떨어지는 비참함을 자각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담의 탄생 이야기처럼 고대 이스라엘도 황무지였던 시내 사막에서 건국했고, 에덴동산 이야기처럼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선물로 주어졌으며, 실낙원 이야기처럼 하나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해 유배생활을 떠난 것 등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3장의 창조 이야기는 “너희도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에서 쫓겨나 유배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