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 (창 35:4)

야곱의 아들들이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인 뒤, 인근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이 야곱의 집안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금 야곱에게 들려옵니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1절).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세겜’인데, 그 곳을 떠나서 ‘베델’로 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30여 년쯤 전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살기등등한 형을 피해 유랑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야영하다가 하나님의 환상을 본 곳이 바로 베델입니다.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늘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여 있던 야곱이 혼자 광야를 여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가련한 처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그 두려움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델은 두려움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위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위로가 교차되던 그곳으로 다시 가라는 명령은 현재 야곱이 처한 상황이 그 때와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또 다시 짐을 꾸리게 된 자초지종은 창세기 34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0년 전에는 자기가 아버지와 형을 속인 탓에 살던 곳을 떠나야 했는데, 이제는 아들들의 난폭한 행동 때문에 다시 살던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더 이상 세겜에 머뭇거리지 말고 베델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야곱은 30년 전의 경험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있다가 삶의 희망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그 베델은 야곱에게 구원의 땅이었습니다. 삼십 년 전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인 지금, 베델을 기억하는 야곱에게 다시 희망이 솟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식구와 하인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2-3절).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참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끝없는 나락에 떨어져버리고 말지만, 그것이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위기를 극복해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의지할 대상을 돈이나 권력이나 사람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확대하고 강화시킴으로써 위기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입니다. 그런 대상은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입니다. 예컨대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듯 야곱의 열한 아들들은 야곱에게 큰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들로 인해서 다시 큰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위기 때 의지할 대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어야 합니다. 성서는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야곱은 그 사실을 인식하고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 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개역개정)이라고 증언합니다.

베델로 가서 제단을 쌓아 바칠 준비를 하는 야곱의 가족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이방 신상들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들을 모두 야곱에게 내어놓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것들을 느티나무 밑에 묻어버렸습니다(4절). 이방 신상들을 땅에 묻었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거기에 왜 귀걸이가 포함되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이와 다른 근동의 신앙 사이에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해명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어떤 역사적 행위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낼 뿐이지 구체적인 형태로는 나타내지 않습니다. 반면에 근동의 여러 이방 종교들은 자기들의 신을 형상화했습니다. 양측의 특징을 수사적으로 표현하자면, 구약성서는 들음(聽)의 종교이지만 근동의 종교는 봄(視)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앙은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것인데 반해서 근동의 신앙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중심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무게를 둔 근동의 종교로 인해서 그들의 실제적인 삶도 역시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여러 모양의 액세서리를 걸쳤습니다. 귀걸이, 팔지, 심지어는 코걸이까지 등장합니다.

귀걸이와 목걸이 등을 걸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장식품은 대개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걸친 사람마저 어느 정도는 아름답게 보이게 합니다. 이런 감각적 작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건지 아니면 모두가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지 세계 모든 민족들이 그런 장식품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행위 자체를 나무랄 건 없습니다. 야곱의 식구들이 귀걸이를 했다는 사실도 역시 그것 자체로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핵심은 그런 장식품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야곱이 이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바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즉시 남의 나라 신과 귀걸이를 모두 땅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 사물이 자기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위에서 설명했듯이 근동의 이방 종교가 갖는 특징과 귀걸이를 통해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인간의 심성은 서로 통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근원이 바로 우상과 귀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귀걸이로 대표되는 장식품에 너무 마음을 많이 빼앗긴 시대를 살아갑니다.

야곱은 자기 식구들의 우상만이 아니라 귀걸이까지 몽땅 땅에 묻어버린 후에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 바치기 위한 길을 떠났습니다(5절). 이들은 이제 우상에 대한 미련과 남에게 보이기 노력을 일체 포기하고 전혀 다른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대충 이방사람들과 비슷한 가치관으로 살면서 그저 교회만 다니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것들 일체를 땅에 묻고 다른 세계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면 모든 세속의 삶을 접어두고 순수하게 종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 살아가는 자리가 세속이지만 전혀 다른 삶의 내용을, 그 영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보다 잘나고 남보다 예쁘고 남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게 아니라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에 마음을 둔다는 뜻이겠지요.

(2)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하였는데... (35:22)

창세기 35장 16-22절은 야곱의 영원한 연인 라헬의 죽음을 보도합니다. 남편에게 아들을 하나 더 낳아주고 싶어서 맏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또 다른 아들 하나를 더 주시면 좋겠다”(30:24)고 한탄하던 라헬이 그렇게도 바라던 둘째 아들을 낳고 나서 운명합니다. 야곱은 그 아이에게 “내 오른손의 아이”라는 뜻으로 ‘베냐민’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사실 이 이름은 레아가 첫 번째로 낳아준 르우벤에게 갔어야 했습니다. 이런 차별을 받아서 그랬을까요? 35장 22절은 르우벤이 라헬의 몸종 빌하를 범하였다고 보도합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고 비통에 잠긴 야곱을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라헬의 맞수였던 레아도 받아주지 않았고, 레아의 아들들도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했던 아버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맏아들 르우벤은 위로하기는커녕 빌하를 범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 동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아버지에 맞서는 행위였습니다. 성장한 자식으로서 특별히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사용할 권한이 있음을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고인이 된 왕의 아내가 그 계승자의 아내가 되는 예를 보이고 있습니다(사울과 다윗). 또한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은 궁궐에 남겨진 아버지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건드립니다. 사실상 야곱은 라헬의 죽음 이후에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채로 비통 속에 살게 됩니다.

(3)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37:20)

창세기 37장부터 시작되는 요셉 설화는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다른 아들보다 더 사랑했다고(창 37:3) 창세기 기자는 설명합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옷은 왕족의 예복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셉은 노동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야곱에게 많은 종들이 있었겠지만 가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들들도 노동해야만 했습니다. 자기들은 매일 양을 키우고 있는데 요셉은 예복이나 입고 앉아 있었다면 약 오르지 않을 형제들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다는 이 사실로 인해서 결국 사건이 발생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세겜으로 양떼를 몰고 갔을 때 야곱은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요셉은 물어물어 형들이 양치는 곳까지 갔습니다(17절). 그런데 요셉이 오는 모습을 발견한 형들은 그를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18절). 그들이 이렇게 의논했다고 성서 기자는 표현합니다.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19-20절). 이 때 맏형인 르우벤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는 흘리지 말자. 여기 들판에 있는 구덩이에 그 아이를 던져 넣기만 하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자”(22절). 이 말에 따라서 결국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처넣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7장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요셉이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고자질을 하고, 자기 꿈 이야기를 떠벌리던 요셉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아버지가 결국 이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내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살려 달라. 당연히 이런 말을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성서 기자는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요셉을 둘러싼 사람들의 주장과 고함과 격론은 분분한데 요셉은 정반대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서 기자의 관심은 요셉의 말과 행동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성서 기자는 요셉의 운명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어떤 손길을 보고 있습니다. 사려가 깊은 독자라면 요셉이 침묵하고 있는 바로 이 대목에서 ‘행위’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미면서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20b). 이들의 입을 빌려 성서 기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요셉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요? 구덩이에서 굶어죽습니까, 아니면 르우벤의 계획대로 나중에 구출됩니까? 이야기는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 순간에 길르앗으로부터 낙타를 몰고 오는 이스마엘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마침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형제들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자,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자. 아무래도 그 아이는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피붙이이다”(26-27절). 형제들이 유다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아넘겼습니다(28절).

이어 또 다시 요셉의 형들이 꾸민 음모가 계속됩니다. 그들은 요셉의 장신구로 꾸민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의 옷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야곱은 평생 상복을 벗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아들들과 며느리들의 위로를 마다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울면서, 나의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가겠다”(35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야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과 아버지와 삼촌을 기만하던 야곱이 결국 자식들에게 기만당하며 끝없이 깊은 슬픔 속에 빠져드는 장면입니다.

앞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질 때 침묵했다고 지적했듯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게 참으로 우리가 따라잡기 힘든 인간 삶의 모순이며 질곡입니다. 한쪽에서는 요셉을 어떻게든 처리하려는 형제들의 음모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거짓은 늘 말이 많은 법입니다. 아들들에게 속은 야곱도 말이 많습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휩싸이는 사람도 역시 말이 많은 법입니다. 이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 말이 없습니다. 요셉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요셉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결코 요셉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서 텍스트를 곰곰이 읽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요셉에게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행위에 관해서 독자들에게 해명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요셉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빠진 요셉이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침묵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입니다. 인간이 침묵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아니 우리는 늘 사람의 말을 통해서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런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침묵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침묵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순례

2. 숙제: 창세기 38-41장을 꼼꼼히 읽어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