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서 개관

(1)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는가?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 가운데 자신이 직접 설립하지 않은 크리스천 공동체에 보낸 유일한 편지입니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로마서가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당시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상황적 필요 때문에 씌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 학자들은 모두 바울의 임박한 예루살렘 방문에 주목합니다. 즉, 예루살렘 크리스천 공동체와의 화해 또는 자신의 선교에 대한 변호의 목적으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대로의 근거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는 바울이 직접 설립하거나 방문해보지 않았다는 점, 그래서 바울 자신이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리라는 점, 잘 알지 못하는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문제보다는 지금 발등에 떨어진 예루살렘 크리스천 공동체와의 관계 회복이 스페인 선교를 계획하고 있는 바울에게 더 절실한 문제라는 점, 14:1-15:13을 제외하고는 로마서 전체가 구체적 상황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권면을 제시하는 형식이 아니라 논리적·체계적·보편적인 논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에 직접 편지를 보내지 않고, 자신이 설립하지도 않고 전혀 방문한 적도 없는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에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논쟁에 대해 썼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로마서가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를 향하여 쓰인 이상, 로마서는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상황과 연관시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로마서는 바울 자신의 상황적 필요성―그 자신의 예루살렘 여행, 미

래의 로마 방문, 복음의 변증, 스페인 선교 등등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 때문에 씌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낼 당시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었을까요?

(2)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상황

성서학자들은 복음이 어떻게 로마에 전파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지역 크리스천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 역시 당시 로마에 있던 유대인 회당(synagogue)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즉, 유대인들로부터 로마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창기의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는 다수의 유대계 크리스천들(Jewish Christians)과 소수의 이방계 크리스천들(Gentile Christians)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20년경에 로마의 역사를 쓴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하면 주후 49년경에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계속하여 소동을 일으키자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바로 이 칙령 때문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왔고, 거기서 바울을 만났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행 18:2 참조).

그런데 주후 54년에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사망하고 네로(Nero) 황제가 즉위하자 유대인 추방령도 해제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경우처럼(롬 16:3) 로마를 떠났던 적지 않은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로마로 귀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로마로부터 추방된 5년 동안에도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는 계속해서 존속했고 나아가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로마로 귀환한 후에는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유대계 크리스천들보다 다수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1:5-6과 15:15-16에서 바울이 두 번이나 이방인들을 위한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한 것도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총 26명의 로마 크리스천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단지 15%만이 유대계 크리스천이라는 사실도 이들이 로마교회 내에서 소수파(minority)였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로마 추방이라는 5년의 공백 기간 동안, 유대인 중심의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는 이방인 중심의 크리스천 공동체로 바뀌었으며, 유대계 크리스천들의 귀환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당시 다수를 차지하던 이방계 크리스천 사이에 정체성(identity) 문제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가 당면했던 구체적인 문제점들

학자들은 바울이 전체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를 가리켜 ‘에클레시아’(ekklēsia)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주목합니다.[에클레시아란 단어는 로마서 전체에서 16:5에 한번 나오는데, 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house-church)를 가리킬 때였습니다.] 또한 다른 편지와는 달리 바울이 로마서의 수신자를 “로마교회”가 아닌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들”이라고 한 것에도 주목합니다(롬 1:7). 이는 크리스천 공동체가 각각 독립된 가정교회로 따로 따로 집회를 가졌고, 전체가 함께 모이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분열은 14:1-15:13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납니다. 거기서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the weak in faith)”과 “믿음이 강한 자들(the strong in faith)”을 언급합니다. 그동안 학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과 “믿음이 강한 자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논쟁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많은 학자들은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가 처해 있던 사회·역사적 상황을 토대로 믿음이 약한 자들은 유대계 크리스천을, 그리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이방계 크리스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는 당시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다수(majority)였고,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소수(minority)였다는 사회적 역학관계를 볼 때에도 그렇고, 또 믿음이 약한 이들이 채소만 먹고(14:2) 이 날을 저 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14:5) 바울의 언급을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특히 14장에는 “심판하다, 판단하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 krino가 6번이나 쓰이고 있는데(14:3.4.10*2.13.22), 이는 당시 이 두 그룹간의 갈등관계를 반증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진보적인 성격의 다수 이방계 크리스천(믿음이 강한 자들)들이 보수적인 소수 유대계 크리스천들(믿음이 약한 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꺼렸기에 (저들 사이에) 명백한 분열이 발생했다”고 보고, “주로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분열의 책임자이기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로 저들을 겨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고 복음 안에서 드러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공정한 목적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그룹 사이의 증오를 없애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 죄 아래서(3:20) 그리고 복음 안에서(10:12)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평등함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모든 믿는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4:11-12)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방계 크리스천들과 자기를 일치시키며 저들의 잘못된 생각을 훈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갈라디아서와는 정반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죄인인 이방 사람이 아닙니다”(2:15)라고 하며 자기와 베드로 그리고 유대계 크리스천들의 공통점을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2:16)라고 말함으로써 갈라디아 크리스천 공동체의 강한 자들인 유대계 크리스천들의 입장을 반박합니다. 이어 그는 유대계 크리스천들은 이방계 크리스천들과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치를 거부하고 이미 허물어 버린 울타리(경계)를 다시 세우려 함으로써 죄인이 된다고 경고합니다(2:18 참조). 이렇듯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신앙의인(justification by faith) 주장을 통하여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음식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 같은 유대화(Judaizing)의 관행에 반대하여 이방인 개종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반면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하고(1:13-15 참조),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가 당시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로마서의 주된 독자들이 이방계 크리스천이라는 점은 로마서 11:13절의 “이제 나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9장 4절에서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하며 편지 곳곳에서 로마교회의 minority인 유대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1:16절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라고 하면서 복음에 대한 유대인의 우선권을 말합니다. 또 로마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9-11장은 유대인들의 불순종과 종국적인 회복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11장에서 이방계 크리스천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참 올리브나무와 돌 올리브나무에 비유하면서 다수인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反유대교적 관점 아래 스스로 자긍(自矜)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으며(11: 17-24), 14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음식 문제와 관련하여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유대계 크리스천들의 생활태도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 관용으로 용납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특히 14:1-4.10.13.15.20; 15:7), 결론 부분인 15장에서는 이방계 크리스천들과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서로를 인정할 것을 권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참조 15:7), 바울 자신의 최종적인 예루살렘 방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5:25-32).

이처럼 유대인들에 관한 강조는 로마서의 특정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면에 있어서나 구조면에 있어서나 로마서 전반에 걸쳐 핵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으며, 바울은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졌다고 생각하며 우쭐대는 이방계 크리스천에 맞서, 그리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추방 후에 로마의 유대인들이 직면한 곤경에 대한 무관심에 맞서 로마서를 썼던 것입니다.

(4)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메시지 하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겨냥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이방계 크리스천들의 배타주의(Christian-gentile exclusivism)입니다. 로마의 이방계 크리스천들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부했다고,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배제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로마 11장 참조). 그래서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로 하나님의 백성이 대체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이방계 크리스천들이 비민족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새로이 규정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규정은 또 다른 배타주의를 낳았습니다. 결국 갈라디아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는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민족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규정하고 이방계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될 것을 요구했듯이, 로마 크리스천 공동체의 이방계 크리스천들은 비민족적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규정하고 유대계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임을 포기하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둘은 모두 자기가 세운 기준에 따라 상대방을 배격하는 배타주의를 반대했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약자인 이방계 크리스천을 옹호했듯이, 로마서에서는 약자인 유대계 크리스천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똑같이 (차별없이)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거저 의롭게 되며, 아브라함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주장합니다(롬 3:21-4:12). 하나님께서는 할례자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무할례의 이방인들도 모두 할례와 율법 준수와는 관계없이 은혜의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grace)는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즉, 칭의란 인간에 노력에 의해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율법의 행함이 은혜의 믿음으로 대체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롬 3:31에서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믿음으로 대체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칭의의 전제로 필요로 하는 체계를 부정하는 선언입니다. [이에 대해서 보그(Borg)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바울의 칭의 이해는 하나의 필요조건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운 행위 대신 믿음을 요구하신다고 할 때 자주 나타난다. 이 경우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체계는 그대로 남아 있고, 단지 그 내용만 바뀐 것이다. 물론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신 그 하나님을 믿는 것, 그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전체 체계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롬 3:29-30)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인종과 성, 계급과 지역 간의 차별은 곧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칭의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민족적, 문화적, 혹은 사회적 배경을 근거한 어떠한 형태의 자랑이나 우월감을 가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문화적, 민족적 차이나 특수성, 심지어는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규범이나 표준까지도 내세워 자랑할 수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배척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성은 결코 문화적, 민족적 차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여러 문화도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중요함을 뜻합니다.

바울이 14장 1절부터 15장 13절까지 이방계 크리스천들과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각각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를 길게 서술한 것은 앞의 주장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는 조건으로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거나 반대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문화적, 민족적 범주도 우리에게 특권의식을 갖게 하지 못하며, 또한 어떤 특정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 필요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특정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뭔가를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곧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한 율법에 따라 사는 것으로 의롭게 되어 보려는 부질없는 망상일 뿐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주장대로 할례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들의 문화적, 민족적 특수성을 내세워 자랑하며 서로 갈라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민의식, 율법 그리고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우월감 때문에 이방인들을 차별하거나 배척하고, 반대로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지 않은 다른 문화와 그들 나름대로의 특별한 역사를 내세워 유대인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에 따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차이나 특수성, 심지어는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표준까지도 자랑할 수 없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배척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화해와 동등성은 결코 민족적 혹은 문화적 차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이 인정해 주고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주는 것이 됩니다. 즉 서로의 차이를 상대화하지 말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칭의론은 배타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와 같이 칭의론은 본래 inclusive한 역할을 한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동안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오히려 exclusive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율법의 행함 대신에 예수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그리스도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며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타적인 입장은 칭의론의 본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진리 종교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서로 협력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다룬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성”은 오늘날 “크리스천과 타종교인과의 관계”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7절에 나오는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씀은 지난 2천년 동안 그 맥락에서 떼어내어, 정부가 명령하는 거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맥락 속에서 읽을 때 이 구절이 뜻하는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첫째로, 이 말씀의 전체 맥락은 로마서 12장 14절부터 13장 7절까지이며,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거의 축자적으로 인용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14-31의 말씀을 마태 5:39-48(=누가 6:27-37)에 나오는 산상설교, 즉 새로운 시내산에서 새로운 모세가 준 새로운 율법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 주제는 예수와 바울 모두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과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던 간에 그들에 대해 비폭력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 또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눅 6:27-28) 하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롬 12:14)라고 가르칩니다.

이제는 그 서문에서 바울이 어떻게 강조점을 바꾸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는 “악한 사람에게 앙갚음하지 말라”(마 5:39)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12:21)라고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는 ‘거역/저항’(resist)이라는 말을 세 번 사용해서 “권위를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역하는 자가 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13:2)라고 말합니다. 이 ‘거역/저항’이라는 말은 모든 저항을 금지시킵니까?

마태복음 5:39에서 “저항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안티스테미’ (antistemi)는 그 맥락에서 폭력적인 저항을 뜻합니다. 즉 예수가 금지시킨 것은 악에 대한 폭력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로마서 13:2에 나오는 또 다른 ‘저항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안티타소’(antitasso)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 역시 똑같은 의미이지만 비폭력적인 저항을 더욱 강조하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사전은 이 단어가 “특히 전투에서 반대편에 서다, 포진하다”를 뜻하며 “맞서다, 전투에 대면하다”의 뜻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13:1-7에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무엇인지를 그 전체 맥락인 12:14-13:7 안에서 볼 때 비로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물론 로마가 요구한 조세와 관세에 관한 것이며, 정확히 그런 세금을 폭력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크리스천들에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금을 거부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우려했던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로부터 네로 황제로 바뀌는 때에 로마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폭력적인 세금 거부 사태(반란)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태에 대해 바울은 너무 끔찍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 바울은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매우 현명하지 못하고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은 주장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크

리스천들이 살인을 자행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로마가 크리스천들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로마에 맞서서 대응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뿐 아니라 바울도 악에 대해 크리스천들이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도록 가르친 것은 로마의 핵심적 가치, 즉 폭력적 승리를 통한 평화라는 핵심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불행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폭력에 근거해서 인간의 비폭력을 가르쳤습니다(마 5:43-48, 눅 6:27-36의 “원수를 사랑하라” 참조).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폭력에 근거해서 인간의 비폭력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롬 12:19-20)

이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한 성경은 신명기 32:35과 잠언 25:21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폭력을 거부하라는 것은 분명히 훌륭한 명령이지만, 그 원천을 하나님의 비폭력에서 찾기보다 하나님의 폭력이 인간의 비폭력을 대체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비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행하지만 예수가 주장한 것을 바울이 전복시킨 것입니다.▩

로마서 16:1-16은 바울의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사도의 직분에서 평등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거나 적어도 이름을 알고 있던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인사하면서, 여자들과 남자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의 동쪽 항구로부터 로마의 크리스천 공동체에게 가져간 사람, 그래서 그 편지를 읽고 설명한 사람은 바로 여자였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님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prostatis),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롬 16: 1-2). 뵈뵈는 바울의 후견인이었습니다.

둘째로, 결혼한 두 부부가 특별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한 부부는 최초의 크리스천-이방인 부부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16:3-4). 여기서 브리스가를 동역자로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부부는 최초의 크리스천-유대인 부부입니다. 즉 “나의 친척이며 한 때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 중에 탁월하며(새번역에는 “그들은 사도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고”),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16:7).

셋째로, 로마서 16장의 목록에 나오는 전체 27명의 크리스천들 가운데, 10명이 여자들(뵈뵈,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머니, 율리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자매)이며, 17명이 남자들(아굴라, 에배네도, 안드로니고,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헤로디온, 루포,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롤로고, 네레오, 올름바)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칭찬받은 사람들 가운데 5명의 여자들(마리아, 드루배나, 드로보사, 버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머니)과 6명의 남자들(에배네도,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루포)은 특별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헌신적인 사도의 활동을 뜻하기 위해 “수고를 많이 한다”는 동사(kopiao)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 동사를 자신에게 두 번 적용했습니다(갈 4:11; 고전 15:10). 그러나 여기서는 네 차례 적용하며 모두 여자들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즉 마리아(16:6),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16:12)에게 사용했습니다.

끝으로, 유니아(16:7)에게 다시 되돌아가는데, 기독교 역사의 처음 천 년 동안에 주석가들은 유니아가 여자 이름이라고 올바르게 인식했습니다. 그녀는 안드로니고의 아내였습니다. 브리스가가 아굴라의 아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두 번째 천 년 동안에는 유니아를 남자로 둔갑시켰습니다. 유니아는 유니아누스라는 남자 이름을 간략하게 줄인 형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사실이 아닌 이유는, 비록 고대 세계에 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250명이 넘었지만, 그 중에 유니아누스라는 이름을 줄인 형태로서 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억지 주장을 했던 이유 역시 분명합니다. 즉 만일 유니아가 여자로 남게 된다면, 그녀가 “사도들 중에 탁월하다”는 말 때문에, 여자도 사도가 되는 것이 명백하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물론 성별과 기능이 결합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신다고 믿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의 결혼과 가정에서 존재했던 성별간의 평등성은 공동체 모임과 사도 직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 책의 이름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에 속하는 첫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서신은 모두 개인이나 교회 앞으로 편지를 띄우지만, 공동서신은 편지를 받는

지역이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편지를 띄우는지만 첫머리에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약 1:1)라는 내용에 따라 ‘야고보서’라는 현재의 책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2) 저자

야고보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한 최초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이 서신의 저자를 단순히 ‘야고보’ 또는 ‘사도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행 15:13; 21:18)이며 “주님의 형제”(갈 1:19)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 1:1)이라는 간략한 소개와 “자유를 주는 완전한 율법”(약 1:25)을 지키라는 권유가 유대교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야고보를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야고보의 설교와 문체가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기후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을비와 봄비)”(약 5:7)라는 언급도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서신에 쓰인 그리스어 문체가 갈릴리 농부 출신치고는 너무 유창할 뿐 아니라, 주님의 형제로 오래도록 생활해 온 것에 비해서는 예수 자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행동을 다루고 있음이 의아하다는 점을 들어, 익명의 저자가 야고보의 이름을 빌어 집필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3) 집필 연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썼다면 야고보가 순교하기 전에는 집필되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베스도와 알비누스가 유대 총독으로 이·취임하던 62년 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 들어오던 67년에 숨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면에 야고보서가 차명서한이라면, 80-100년경에 집필되었을 것입니다.

(4) 집필 목적

교회는 지역상으로도 도시와 농촌에 걸쳐 있고, 직업상으로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그 안에 모여들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김새나 차림새를 보고 박대하거나, 선행은 뒷전에 밀쳐놓은 채 믿음만이 최고라는 환상을 갖기 쉽습니다. 이에 야고보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일러주고자 이 서간을 집필했습니다.

(5) 특성

이 서신은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전언입니다. 유대교의 모든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바꿉니다(1:25; 2:8.12). 그리스도교가 외치는 평등(2:1-4),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2:5-7), 적극적인 사랑(2:14-17) 등 이 명령의 요구가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에는 착취가 들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에서 부자들에게 맞서는 신약성서의 가장 강력한 대목을 만납니다(5:1-6). 여기에서 믿음은 활동을 낳고 구체적인 활동으로 표현될 때에만 성숙하는 활력으로서 제시됩니다(2:20-26). 이 믿음은 개인주의적인 그 어떠한 영성 또는 종교심도 물리치는 믿음입니다(1:26-27). 이와 똑같은 형태로, 참된 지혜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3:13-16).

야고보는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서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따로 떼어놓는 그 어떤 축성된 구분도 물리칩니다. 정신없는 육체가 주검이나 다름없듯이, 믿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즉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시체나 다름없습니다(2:26). 이 맥락에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이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2:15-16; 마 25:35-3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