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야곱 인생의 제3막에 해당하는 ‘하란을 떠나 고향에 돌아오기까지의 전체 귀향 여정’(31-35장) 중 일부(31-32장)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그 언약이 우리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세” (창 31:44)

형 에서를 속인 대가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아 14년을 공(空)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게 되고, 결국 외삼촌 라반과 새로운 계약을 맺고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이런 야곱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얼마만큼 미워했는지는 양털 깎는 자리에 야곱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양털 깎는 일은 한 해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이 일은 친인척들이 모여서 짧게는 한 주일, 길게는 두 주일까지 함께하는 공동체적인 행사였고, 이 행사 중에 큰 잔치도 벌였습니다(삼하 13:23-27 참조). 그런데 이 행사에 야곱과 그의 아내들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31장 15절에서 레아가 했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아주 딴 나라 사람으로 여기십니다”라는 말은 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분개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어느 한 집안이 왕따를 당했다면 왕따를 당한 그 집안 사람들의 서러움은 너무나도 컸을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두 아내의 동의를 얻어 20년 만에 하란 땅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라반이 자기의 귀향을 허락해 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털 깎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야곱은 그들이 바쁜 틈을 이용해서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섬기는 수호신상(드라빔)을 훔쳐 달아납니다(31:19). 여기서 수호신상이란 재앙이나위험에서 사람과 집안을 보호한다고 여겼던 신상을 말합니다. 대개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조그맣게 만들어져 집안에 세워 두었습니다(그림 참조).

라반은 사흘이 지나 야곱이 식솔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떠난 것은 물론 집안의 수호신상까지 훔쳐갔다는 사실을 알고 일가친척을 이끌고 서둘러 추격합니다. 단단히 화가 나서 야곱을 잡으면 그를 죽여 버리고, 딸들과 손자들 그리고 야곱이 가진 재산 모두를 다 빼앗아 버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개입하시어 야곱과 시비를 따지지 말 것을 라반에게 경고하십니다.

그 결과 라반은 결국 야곱과 계약을 맺고, 돌무더기를 쌓아 그 증거로 삼았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영토의 경계에 관련된 계약을 맺곤 했는데, ‘돌무더기’를 그 증거로 세웠습니다. 계약을 ‘기념하는 돌무더기’는 종이에 쓰인 계약서보다 더 지속적이고 영구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는 표이기도 했습니다(31:51-52). 그러니까 이 계약은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이었습니다.

둘은 상호 불가침 협정을 맺은 후 화해의 돌무더기 앞에서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화해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화해는 용서와 다릅니다. 화해라는 것은 잘못한 편에서 자기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 피해를 본 쪽에서 그 청을 받아들일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며, 야곱 또한 라반을 용서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둘은 함께 살아갈 공존의 길을 찾아 화해했습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친밀한 관계가 깨지면서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는 이들이 보다 빨리, 보다 효과적으로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으면 우선적으로 용서보다는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갈등관계에서 상대에게 꼭 용서를 받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갈등의 골만 더 깊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변화시키겠다는 바람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바람입니다. 우리는 소원해진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을 용서할 수는 없어도 화해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 다음 시간을 갖고 용서와 치유를 향해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보내고 난 다음에... (창 32:22-23)

이 짧은 두 구절 안에 무려 세 차례나 (얍복강을) 건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신화나 역사에서 강을 건넌다는 것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강을 건넌다는 것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감을 뜻합니다. 로마 역사에서 율리우스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말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에게 있어서도 얍복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의 생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감을 상징합니다. 강을 건너는 행위 말고도 창세기 32장 23-33절에 나오는 다른 여러 가지 상징적 이미지들은 야곱의 내적 변화를 나타냅니다. 즉, 밤과 여명, 어두움과 빛의 대비, 상처, 이름의 변화 등은 다 야곱의 깊은 변화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얍복강을 건넌 다음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종들, 그리고 가축 등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뒤 자신은 홀로 강가에 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야곱은 어두움을 응시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인간은 어둔 밤 깊은 정적 속에 홀로 깨어 있으면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나 정직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또 지나간 생을 가식 없이 반성할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은 홀로 있는 고독의 자리에서, 자기 생의 어두운 부분들을 바라다보며 깊은 의문에 잠깁니다. 지난 20년간 고향을 떠나 살면서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부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장자의 축복은 받았지만 과연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많은 자손들을 퍼트릴 수 있는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일어납니다.

홀로 고독의 자리에서 지나간 생을 바라보면서 엎치락뒤치락 내면적 숙고를 계속하던 야곱은 갑작스레 나타난 ‘어떤 이’와 씨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얍복강 어두움 속에서 ‘어떤 이’와 벌였던 싸움은 보통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동이 트기까지 계속된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통해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신원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자기 생을 막고 있던 지난날의 어두운 모습들을 딛고 일어서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사실 야곱에게는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움켜쥐는 자’(25:26) 또는 ‘빼앗는 자’(27:36)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목표물이 생기면―그것이 장자권이든, 축복이든, 사람이든, 재산이든―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쟁취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한다면 하는 사람’, 집념의 인간이었습니다. 영리한 머리, 강한 의지력, 그리고 굳어버린 양심으로 인하여 그 무엇도 그의 앞길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이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누군가가 그를 무력으로 항복시켜 한계와 무기력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씨름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씨름을 시작한 사람은 야곱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어떤 이’였습니다. 어두운 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어떤 이’는 야곱의 허리를 휘감고 싸움을 걸었습니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야곱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변화와 성장을 위한 내적 싸움이 어떤 역동적 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변화의 주도권은 ‘어떤 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베델의 은총 체험도, 20년 하란 땅에서의 혹독한 체험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야곱의 호두알 같은 자아 세계를 깨고자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 이야기는 실상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을 변화·성숙시키기 위하여 야곱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통해 야곱은 더 이상 지난날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난 20년간 그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속임수와 교활함, 모든 거짓말과 불경한 행위를 버

려야 한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또 그를 ‘움켜쥐는 자’요 ‘빼앗는 자’로 살게 만들었던 내면의 그림자, 그동안 항상 외면해 왔던 내적 어두움의 세계와 정면 대결해 승부를 내야 한다는 도전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도전하여 그의 싸움 상대가 되었던 이 ‘어떤 이’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호세아 예언자는 그를 ‘천사’라고 했습니다(호 12:4). 하지만 야곱이 그를 신적인 존재로 인식한 것은 씨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 즉 동이 틀 때쯤입니다. 상대가 야곱의 엉덩이뼈를 부러뜨리자 야곱은 그가 초인적인 힘을 소유한 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적인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허리에 매달린 채 그가 축복해 주기 전에는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이때까지도 성경 본문은 그를 하나님의 천사로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싸움이 다 끝나고 축복을 주는 자리에서입니다. 32장 28절에서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라는 말이 나오고, 30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는 말이 나옵니다. 요약하면, 야곱은 이 ‘어떤 이’를 처음부터 하나님의 천사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을까요?

첫째,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자 상속권을 둘러싸고 야곱과 씨름했으며 내일이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형 에서’입니다. 둘째, 그는 야곱이 젊은 시절 내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씨름했던 ‘아버지 이삭’입니다. 셋째, 그는 야곱이 도외시하면서 억압했던 내면의 그림자들, 특별히 어머니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랫동안 개발하기를 소홀히 했던 ‘남성적 세계’입니다. 넷째, 그는 야곱이 에서가 내미는 복수의 칼날에 맞아 쓰러질 때 그를 맞으러 올 ‘죽음의 사신’입니다. 다섯째, 그는 야곱이 정말로 움켜쥐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 다섯 가지 모두가 다 그에 해당됩니다. 성경의 문맥이 이를 입증합니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창 32:28).

야곱은 위에 열거한 모든 존재들의 그림자와 씨름하는 가운데 자기 변화와 통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먼저 내일이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형 에서와 씨름하다가 아버지와 씨름을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그 주위에서 서성거렸던 지난날을 보던 중 싸움은 어느새 자기 자신의 어두운 세계로 넘어갑니다. 그러다가 낯선 세계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씨름합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밤새 내면적 숙고를 거듭하는 가운데 동이 틀 때쯤에야 야곱의 숙고는 하나님으로 향합니다. 이렇듯 씨름의 대상이 모든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으로 바뀌면서 야곱은 비로소 정리된 마음, 통합된 자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싸움의 막바지에서 야곱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 질문은 지난 20년 전에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장자상속의 축복을 눈먼 아버지에게서 받아내려 했을 때 아버지 이삭이 물었던 질문입니다(27:18). 그때 야곱은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제 똑같은 질문을 받고 야곱은 정직하게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즉, “저는 움켜쥐는 자요, 탈취하는 자, 남을 속이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솔직히 고백하는 야곱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은 재물이나 영예, 성공과 같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차원의 축복으로서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이름만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 자체의 변화를 뜻합니다. 그의 전 생애를 바꾸어 놓는 위대한 변화체험, 은혜와 거듭남의 체험을 가리킵니다.

얍복강은 우리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생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오기에 우리의 양심과 관련해서, 우리의 가치관과 관련해서, 우리 인간 됨됨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때에 우리는 야곱처럼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지를 추켜올린 채 격렬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꾸밈도 없이, 더 이상 외면함이 없이 우리의 변화와 구원을 방해하는 실존적인 문제들과 대면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이 씨름은 우리의 감성적, 심리적 힘은 물론이요 육체적 힘까지 고갈시키면서, 엉덩이뼈를 다친 야곱처럼 우리 안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이스라엘도 만들어낼 것입니다.순례

2. 숙제

창세기 33장부터 35장까지를 꼼꼼히 읽어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