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신명기를 통독하게 됩니다. 민수기에 뒤이어 나오는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 성경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또 그 성격이 어떠한지는 책 제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드바림’(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히브리성경 신명기 1장 1절의 첫 단어인데, 신명기가 요단강 동쪽 아라바 광야에서 모세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한 말씀(드바림)임을 잘 드러냅니다.

70인역 성경은 이 책의 이름을 17:18에서 따온 ‘듀테로노이온’(두 번째 법)이라 부릅니다. 이는 신명기가 시내 율법을 다시금 부연 설명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 이름은 이 그리스 역본의 성경 이름을 따른 중국어 성경 이름 ‘申命記’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명(命)하신 것을 되풀이한(申)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의 무대는 모압 땅입니다. 모세오경 안에서 백성의 여정을 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9:1에서 시내산에 도착하여 레위기를 거쳐 민수기 10:10까지 진지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0:11에서 다시 시내산을 출발하여 광야 여행을 계속하였고, 마침내 요단 기슭 모압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신세대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때 지켜야 할 삶의 정신과 태도를 세 차례에 걸쳐(1-4장, 5-28장, 29-30장) 설교합니다. 모세는 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느보산 봉우리에서 약속의 땅 전경을 보고 난 뒤에 주님께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길목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왔는데, 이제 더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 모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아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던 철부지 같은 이스라엘을 홀로 떠나보내야 하는 모세의 애끊는 심정이 물신 배어 있습니다. 생을 마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맞갖은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나이든 지도자의 따사로운 권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로운 생명의 땅으로 한 걸음 크게 내디딜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1장에서 4장의 말씀 가운데 4:9-20에 주목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상(또는 신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제2계명은 오랫동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제1계명의 부록쯤으로 여겨져 왔습니다.(실제로 가톨릭, 루터교, 유대교는 제2계명을 제1계명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2계명의 메시지는 제1계명의 그것과 같지 않으며, 독자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4:9-20에 특별히 제2계명만 길게 서술된 것만 보아도 그 독자성과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2계명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2계명은 “그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을 제한(制限)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희한하게도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첫 장 첫 절과 그 뜻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거기 보면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란 말이 나오는데, 풀이하면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궁극적 실재(도덕경의 道, 기독교의 하나님)는 우리의 제한된 표현을 초월한다는 주장입니다. 즉, 궁극적 실재에 ‘도’라든가 뭐라고 이름이나 속성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그 이름이나 속성의 제한을 받는 무엇으로서 절대적인 ‘도’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2계명의 메시지는 만약 하나님을 형상화하면, 하나님은 더는 하나님일 수 없고 그 형상으로 제한된 한낱 우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역동적(力動的)이던 하나님은 형상으로 말미암아 정적(靜的)인 하나님이 되고, 마침내는 그 형상이 규정하는 이미지에 고정(固定)되어 우상으로 기능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형상화된 하나님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고 얽매어서 진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과 그 형상화의 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각종 신은 갖가지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완벽하게 형상으로 표현된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형상이 그 신의 현존을 나타내고 그 신의 힘을 드러내는 매개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과 형상 자체를 동일시하게 되었고, 신상을 통해 그 신의 능력을 자기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부적을 붙이는 등의 기복신앙도 이와 유사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에도 이와 유사한 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형상화한 성상(聖像)과 성화(聖畵)는 주님을 향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표상이요, 그분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표현물이라는 처음의 제작 의도와 상관없이 마치 그것 자체가 신비한 힘을 지닌 양 오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10세기경 동방교회에서는 이러한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대규모의 성상 파괴가 있었습니다. 또 17세기에는 성경의 문자를 중시한 종교개혁자들이 성화상이 십계명에 위반된다고 하여 파괴의 망치를 들었었습니다. 특히 칼빈은 자기 세력의 중심지인 제네바 근처의 모든 성화상을 모조리 깨부수었습니다. 그런데 제2계명의 메시지는 단순히 “우상(또는 신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즉 “그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을 제한(制限)하지 못한다!”는 것에 핵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단지 갖가지 물질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성상이나 성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에 그려진 형상도 포함합니다. 따라서 “우상(또는 신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제2계명은 지금껏 우리의 마음과 머릿속에 형상화해 왔던 하나님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고 얽매어서 진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이미지가 하나님을 고정하고 제한하여 내 신앙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통독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자신이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 있을 때 처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체포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잘 풀렸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강제 수용소에서는 달리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단지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서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단강 강가에 서 있는 그들은 앞으로 더 큰 믿음의 시험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풍요의 땅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할까요?

광야에서 성장한 이스라엘의 신세대는 다른 문화권의 유혹들, 즉 이방인들의 사악한 우상 종교, 물질적 풍요로 인한 도덕적 타락과 같은 유혹을 별로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러한 유혹으로 가득 찬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의 고통보다도 더 위험스러운 이러한 유혹을 걱정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뒷전에 제쳐놓은 채 자신들의 힘만으로 성공하려고 발버둥 칠까 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출애굽의 역사, 황량하고 광대한 광야에서의 시험들, 광야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시고 부르신 이 모든 것을 기억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앞일을 내다보시는 하나님께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그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뒤에, 그들이, 살이 찌도록 배불리 먹으면, 눈을 돌려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업신여기고, 나와 세운 언약을 깨뜨릴 것이다”(신 31:20). 신명기에 이어지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모세의 두려움은 결국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성공하면 더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약소의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에는 그에 따르는 더 큰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할 때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모세의 설교집으로 소개된 신명기는 실제로는 유다의 히즈키아 왕(기원전 715-686년경)부터 바빌론 유배 시기(기원전 587-538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되어 지금의 형태로 완성된 것입니다.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의 북왕조가 아시리아에 망하고, 남부 유다왕국에서는 야훼신앙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므낫세의 통치(기원전 687-642) 중에 지하에 숨어 있던 예언자들이 원(原)신명기를 준비했으리라고 추측됩니다. 왕 앞에서 바른말을 하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기에 예언자의 목소리가 끊겼던 박해의 암흑시기가 지나고, 요시야 왕이 등극하여 종교를 개혁할 때, 성전 보물창고에서 발견한 신명기를 지침서로 삼았습니다. 그러한 신명기 개혁으로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야훼신앙을 되찾은 듯했으나, 실제는 오랜 폐습으로 뿌리내린 우상숭배와 사치에 빠졌고,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부정부패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당대의 왕, 귀족, 평민을 다 책망했는데, 신명기는 그러한 예언자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인 신명기는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의 경험을 배경으로, 변화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서 다시 쓰인 ‘제2의 법전’이기에, 그 안에는 모세가 직접 한 말도 있겠지만 후대 저자들의 교훈도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는 기원전 1300년경의 모세 시대와 그로부터 700여 년이 지난 기원전 600년경, 요시야 시대의 두 청중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다음 3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알려 줍니다. 첫 번째로는 모압 평원에서 설교한 모세의 유언과 두 번째는 요시야 왕의 설교와 계약갱신, 세 번째는 현재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서 이 성경의 말씀을 듣고 있는 나 자신의 상황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이렇듯 시간을 초월한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그 메시지를 잘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과 내일 읽을 신명기 12-26장은 신명기 법전이라고 불립니다. 이 법 규정들은 십계명의 우선순위를 따르고 십계명의 몇몇 조항들과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12-13장은 제1계명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15-16장은 제4계명 “안식일과 축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를, 17-18장은 제5계명 “부모와 웃어른을 공경하라”를, 19-21장은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22-23장은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를, 23-24장은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를, 25장은 제9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를 각각 다룹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섬기라(敬天)는 의무에 이어 이웃에 대한 의무(愛人)가 뒤따릅니다.▨

모세오경을 읽어보면 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성경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민 18:20-32, 레 27:30-33, 신 12:5-19; 14:22-29; 26:12-15). 이것은 십일조 규정이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십일조 제도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히브리들의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26장을 보면 “제 선조는 떠돌아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출애굽 한 히브리들이 그들의 역사 한복판에서 고백한 것입니다. 출애굽 한 히브리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해마다 야훼 하나님께 햇곡식을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감사를 드리면서 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고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신들의 역사 속에 현존해 계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다는 믿음에 대한 역사적인 고백입니다. 물론 이 역사적 사건의 토대는 야훼 하나님께서 노예살이하던 히브리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을 해방해 땅을 주고 그 땅에서 형제애에 넘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하신 출애굽 해방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 은총의 사건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응답으로 햇곡식을 가져와 야훼 하나님께 바치고 그를 예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끝은 함께 즐거운 애찬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애찬에는 땅의 소출로부터 소외된 레위인과 떠돌이들도 함께 참여시킵니다.

이것이 후에 매년 ‘열 가운데 하나’를 바치는 기준이 정해져서 십일조 제도로 발전합니다. 또 소외된 이들과 함께 나누는 애찬의 정신은 3년째 되는 해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신명기 26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당신들은 당신들의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따로 떼어서,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당신들이 사는 성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십시오.”

이렇듯 십일조는 하나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기쁨의 응답이요, 나눔의 축제입니다. 먼저 해방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감격스러운 은총을 감사하고 기쁨으로 나누는 축제가 바로 십일조의 뿌리입니다. 억압과 착취로 고통당하던 히브리들이 해방의 감격을 축하하고, 이제부터는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려고 한 것이 그 근본 취지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열 배 백 배의 축복을 튀겨 내는 도깨비방망이도 아니요, 당첨이 보장된 복권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해방과 구원의 은총 속에 사는 기쁨의 구체적 나눔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향한 소유의 나눔입니다. 즉 경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토대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나누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일조가 감사와 기쁨과 나눔이라는 본질은 상실하고 형식만 남게 된 데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아니, 그것이 거꾸로 나눔을 차단하고, 오히려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억누르는 짐이 될 때는 그것은 역겨운 것이 됩니다. 예언자들이 엄히 경고한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에게 십일조의 근본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 23:23).▨

이스라엘 진영의 모든 사람이 매우 기뻐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토록 고대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의 기쁨에 쉽게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툭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그들이 상황이 바뀐다고 해서 옛 습관을 버릴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관적인 내용이 신명기의 마지막 몇 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에 너무나 자주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이번이 그들에게 하나님 언약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모세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8장에서 모세는 우선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는 것이 어떤 유익을 가져오게 되는지를 간략하고 우아한 문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어길 때에 임할 재앙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어조는 사뭇 달라집니다.

그들에게 단지 말로만 경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모세는 이제 마음속에 생생히 새겨 주기 위해 일련의 절차를 이행토록 했습니다. 그는 석회를 입힌 돌판에 율법을 새긴 후 그것을 장차 가나안에 입성하면 에발산에 세우도록 명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마치 거울을 보듯이 그것을 봄으로 늘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신 27:1-8). 또한, 그는 장차 가나안에 입성하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언약의 말씀을 큰소리로 외치도록 명했습니다(신 27:11 -26). 이것은 한쪽 산에서 율법 준수에 따르는 말씀이 울려 퍼지고, 또 맞은편 산에서는 율법의 불이행에 따른 저주의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함으로써 그 대조를 통해 하나님 언약의 양면성을 깊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모세는 노래를 하나 지어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신 32장).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암송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앞두고 이스라엘 민족은 일종의 국가(國歌)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국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희망의 말보다는 오히려 심판의 말씀이 강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역사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과 심판을 뚜렷이 구분함으로써 역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심판은 그 과정마다 결행되는 청산입니다. 실낙원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역사는 흥망성쇠의 과정마다 철저한 단절과 새 약속들로 점철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목표는 구원이지만, 심판이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새것은 낡은 것이 소멸할 때에만 생겨날 수 있고, 철저한 단절이 없으면 분명한 연속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 민족의 역사가 산 역사로 발전되는 것은 언제나 결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결단해야 할 때 날 세운 칼로 자르듯이 과거를 단절하면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며, 그 새 출발의 터 위에서 새로운 민족사는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 민족사는 무의미의 연속이 되거나 소멸하고 맙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신학적 역사관입니다. 이런 신학적 역사관을 삶으로 구체화한 대표적 인물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와 더불어 이집트를 탈출하여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해 대행군을 했습니다. 그리고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하며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피나는 행군이었습니다. 광야 40년에 히브리들의 삶은 희망 속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전진한 면도 있었지만, 목적을 잊어버리고 좌절하고 방종 하는 죄악으로 점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야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와의 약속대로 저들을 목적지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하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히브리는 한 운명공동체로 성장했으며, 한 민족을 형성할 바탕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은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게 됩니다.

파란만장한 역경을 극복하면서 모세는 마침내 자기의 집단 히브리를 목적지 바로 앞에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날을 위해서 지난 40여 년을 고투한 것입니다. 그때 모세의 감정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감격에 벅차 울음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모세를 오르게 하여 모세에게 신천지를 보여주십니다. 이제 한 발만 내디디면 모세는 그 신천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뜻밖의 단서가 붙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신명 34:4b).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입니까! 이 장면에 대한 약간 다른 기록이 신명기 32장 48절 이하의 말씀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도, 네가 오른 이 산에서 죽어서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기록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신천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죽음보다 더한 선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2장 51절에 따르면 신 광야의 사건에서 모세가 죄를 범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7장 1절 이하에 서술된 이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모세가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광야배회 중 르비딤에 진을 쳤을 때 마실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하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모세는 저들의 부당한 공격을 책망하는 한편, 하나님께 부르짖어 호소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호렙산의 바위를 쳐서 생수를 나게 함으로 저들의 불만을 해결했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내용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모세의 잘못을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모세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실은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의 대행진의 뜻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즉, 모세 개인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렸듯이 말입니다. 이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왜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고 하나님께 항의하지 않습니다. “40년을 기다린 저 땅을 밟아보기만이라도 하겠다”, “저 땅에서 살지는 못하더라도 묻히게라도 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결단을 일치시킵니다. 비록 장엄한 행군이었으나 광야 생활 40년 동안 오염되고 죄진 과거는 ‘청산’해야 한다는 결단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를 헤맨 40년의 기형적인 역사가 더는 연장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한마디로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단절, 낡은 것에 대한 청산을 통한 새 출발, 심판을 통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역사관을 모세는 자기 죽음으로 철저히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