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세기 20-22장 말씀 순례

(1) “당신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요” (20:9)

창세기 20장의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이야기는 앞의 여섯째 날 여정에서 다룬 ‘이집트로 간 아브람’(12:10-20) 이야기의 변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를 떠나 오늘날 가자(Gaza) 지역에 해당되는 가나안 땅 그랄에 머무릅니다. 그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고 합니다(2절). 여기서 아비멜렉의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이미 앞에서(12:10-20) 기술되었기 때문에 생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의 부인을 불러 온 아비멜렉의 잘못을 꾸짖으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의 부인을 취하는 행위는 남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죄이며 신성하게 공인된 법령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그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신 22:22). 본문에도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3b절)라고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주님’(아도나이)이라고까지 부릅니다(4절).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라고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 그는 비록 객관적으로는 유죄이지만 실제로는 마음과 손이 깨끗하다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아비멜렉의 무죄를 인정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해야 할 바를 일러 주십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잘못을 따집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 때문에(11절)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남을 속였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사라를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함으로써(12절) 아브라함의 잘못을 덜어주려고 하지만 결국, 아브라함의 변명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이르신 대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낼 뿐 아니라 많은 선물까지 줍니다. 이는 그에게 가해진 어떤 압력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사라의 결백을 보증하는 돈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16절). 고대 사회에서 여자는 돈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의 모든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집안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17-18절).

우리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늘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비단 이스라엘 사람만이 가진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모두 지닌 종교적인 경건한 심성과 태도입니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사람을 두려워한 데 비해 이방인인 가나안 왕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유죄로, 아비멜렉은 무죄로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다만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일러 주셨습니다(마 10:28- 31, 눅 12:4-7).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신앙적 자만심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또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이들도, 그 행동거지에 있어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려고만 하는 신자보다 하나님의 질서에 더 일치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대신에 사람이나 제도에 더 의존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21:1)

21장 1-7절은 ‘이삭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앞 열한째 날 여정에서 공부한 롯의 두 딸이 낳은 모압과 벤암미의 경우와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손의 번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불임인데다 나이도 많았습니다. 조급했던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대를 잇게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이행은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이행은 인간의 재간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사라가 아흔 살이고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 살일 때, 즉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에 사라가 임신을 하고 이삭을 낳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출산이 불가능해 보이고 희망이 사라진 것 같고 미래는 불투명하여 두렵고 하나님의 약속은 허황한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조상에게 한 약속을 이행할 길을 여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 저자는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21:1-2)라고 증언함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김없이 지켜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21:18)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을 인류 역사에 있어서 한 세대의 종식 후 새로운 인간상으로 등장시키는데, 그 출발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것은 ‘희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손 안에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오직 ‘믿음’에서 보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롬 4:18). 이것은 절망 속에서의 희망, 불가능 속에서의 가능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희망은 낭만적인 유토피아적 환상이나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한 전망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절망 속의 희망입니다.

이삭을 낳은 후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내야 하는 난국에 처했습니다. 그는 떡덩이와 물 가죽부대를 주고 두 모자를 떠나보냅니다. 하갈은 정처 없는 길을 헤매다가 브엘세바라는 광야에서 기진했습니다. 먹을 것도 물도 다 떨어져서 주저앉고 맙니다. 죽어 가는 자식을 도울 길 없는 하갈은 차마 그를 정면으로 볼 수 없었음인지 그를 떨기나무 그늘 밑에 눕혀 놓고 멀리 마주앉아 통곡을 합니다. 그가 처한 상황으로 볼 때 그에게는 죽음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는 지금 죽어 가는 어린것의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통해서 그녀는 절망의 현장에서 그 아이의 미래로 눈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즉 희망을 통해서 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 눈이 밝아져 그녀는 그 앞에 샘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에는 가려졌고 모든 길은 꽉 막혔지만, 희망에서 힘을 얻었을 때 삶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한 아들 이스마엘은 죽음의 절망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희망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 함은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은 내가 희망(믿음)을 가지는 것과 동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믿음)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한 믿음입니다. 절망은 희망,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또한 성서의 희망은 언제나 행위와 직결시켜 읽어야 그 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갈이 절망 상태에서 탈출한 것은 결단의 행위와 더불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갈은 절망적 상태를 숙명적으로 받아 통곡만 하지 않고 샘물을 찾아 나섰을 때 절망에서 살아날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희망, 믿음의 현실과 상부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이나 믿음은 체념의 소굴일 수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졌어도 솟아나려고 몸부림을 쳐라!”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잃지 말고 살길을 찾아 행동하라!” 그럼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믿는다 함은 곧 행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곧 행위입니다.

(4)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 번제물로 바쳐라” (22:2)

창세기 22장 1-19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시험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약 1:13)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시험하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할까요?

그것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쓰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을 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페이라스모스’(동사형은 페이라조)라는 헬라어 명사가 있습니다. 이 ‘페이라스모스’라는 단어는 ‘시험’(test)이라는 뜻도 있고, ‘유혹’(temptation)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과 ‘유혹’은 매우 큰 차이가 납니다.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유혹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고자 하시는 일이고, 유혹은 사탄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짓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나올 때는 그 문맥에 따라서 ‘시험’이라고 번역할지 아니면 ‘유혹’이라고 번역할지를 잘 결정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역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야고보서 1장 13절의 경우, 공동번역은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라고 옳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개역과 새번역은 ‘유혹’대신 ‘시험’이라고 오역을 했습니다. 또 주기도문의 경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보다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옵고”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을 연단(鍊鍛)하고자 시험하시는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청해야 할 것은 악의 세력이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과 유혹은 동시에 함께 온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입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시험하셨고,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시험과 유혹은 각기 다른 주체로부터 오지만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과 어둠의 세력이 주는 두 가지 상충된 가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에 근거해서 우리의 행위가 옳은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별의 기준은 하나님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시험이나 유혹이 공통으로 건드리는 것은 우리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즉, 우리 삶의 중심으로 무엇을 택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철저한 순명(順命)을 요구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전자의 “가라”는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하신 것이요, 후자의 “가라”는 “미래와의 단절”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 준 ‘첫 믿음’은 아무 것도 보장돼 있지 않은 미래를 향해 조건 없이 내어 딛는 발걸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되는 일체의 것－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렇듯 새로운 인간 아브라함의 특징은 ‘떠남’ 즉 ‘탈출’(脫出)로 규정됩니다. 가진 것에서 자기를 느끼고 그것으로 보장을 삼으려는 사람은 새로운 가능성에서 차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새로운 보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차단하고 있는 세계에서 과감히 자기를 탈출시키고, 이 탈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불가능 속에서 태어난 이삭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희망은 이제 현재 속에 싹트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희망은 순수 미래적인 것이 아니고 현재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눈을 미래로 향하지 않고 여기 있는 현재의 이삭에게만 집중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적어도 미래의 한 끝을 손에 잡았고, 그러기에 미래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속된 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제 이 줄만 착실히 잡으면 됩니다. 이삭을 잘 키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현재에 정좌할 자리가 마련됩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줄을 늦추어도 됩니다. 아니 놓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미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을 꽉 잡고 잘 키우기만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이렇듯 이삭의 출생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변질될 위험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로 이 한 가닥 희망의 닻줄을 제 손으로 끊습니다. 미래의 보장인 이삭을 과감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삭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 자신을 죽이라는 그런 뜻 아니었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죽이지 않고서는, 자기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소유가 삶을 보장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허튼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야 산다,” “포기해야 얻는다”는 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야야기를 통해 “나의 이삭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고, 또 아브라함처럼 그것을 버릴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