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창 16:2)

하나님이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15:5)라고 약속했을 때, 아브람은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길 정도로 온전히 믿었습니다(15:6). 이렇듯 온전히 믿었기에 아브람은 이 사실을 아내 사래에게 전했고, 두 부부는 다시 희망을 안고 자식을 낳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노력도 다시금 헛수고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번만큼만은 자식이 꼭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실망도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래의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남편 아브람에게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15:4)라고 약속하셨는데, 여기서 ‘너의 몸’은 아브람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녀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갈을 통해 남편의 아이를 얻으려고 합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을 낳아주지 못할 경우 몸종을 통해 자식을 낳아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경우 몸종한테서 태어난 자식은 몸종의 자식이 아니라 부인의 자식으로 간주 되었습니다(창 30:6 참조). 이렇듯 사래는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래의 대안은 얕은 신앙과 인간적 욕심이 교묘히 혼합된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점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했던 말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개역개정판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16: 2).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는 성경에 기록된 사래의 첫 번째 말입니다. 이 말은 언뜻 보면 신앙적 태도에서 나온 말처럼 들립니다. 자식을 낳는 일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음을 고백하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말을 보면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브람에게 자기 몸종과 잠자리를 함께할 것을 제안하면서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제3강>에서 출산과 관련하여 주어가 “내”가 될 때와 “하나님”이 될 때의 엄청난 차이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지금 사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얻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자기 식으로 아들을 가져보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혹(시)”라는 말과 “얻을까 하노라”라는 말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자식을 얻어 보겠다는 사래의 조급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약속했으면 성취 방법과 시간도 그분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을 망각한 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겠다는 성급한 인간적 욕심을 드러냅니다.

더 큰 문제는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을 아무런 숙고 없이 덜컥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한 번 약속하시면 그분의 방식대로 언젠가는 꼭 이루실 것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을 제2의 아담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첫 번째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가 준 선악과를 받아먹었듯이, 제2의 아담 아브람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가 준 여자를 받아들입니다. 아브람의 생애에서 그가 믿음의 조상답지 않게 행동한 것은 하나같이 인간적인 방법을 구하며 이를 행동에 옮겼을 때 일어났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뒤에 인간의 순종이 따르는 것, 이것이 순서입니다. 인간적 조급함으로 이 순서를 어기거나 무시하는 데서 모든 인간의 비극이 비롯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아브람과 사래는 인간적인 꾀를 통해 자식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사래의 관계는 비참하게 됩니다. 하갈이 임신했다는 보도 다음에 즉시 나오는 말은 하갈이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16:4)는 말입니다. 이 깔봄(업신여김) 때문에 사래가 분노하여 아브람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고(16:5), 아브람은 가장으로서 책임 있는 해결을 시도하기 보다는 얼버무리고 회피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서 사래 마음대로 하갈을 대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16:6). 그 결과 하갈은 사래의 모진 학대를 견디다 못해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16:6).

4천 년 전의 아브람과 사래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상황은 절망적인데 어떤 응답도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정한 시간표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이 있습니다. ‘긍정의 역설’이라 번역되는 이 말은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실은 처절할 만큼 냉혹하다는 점을 똑바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16:7)

16장 7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천사(‘주님의 천사’)가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천사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13절을 보면 ‘주님의 천사’가 ‘하나님’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천사가 던진 물음은 바로 하나님이 던진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물음을 던질 때는 몰라서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갈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인간을 돕고 싶어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갈이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16:8)라는 물음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를 깊이 세길 수 있다면, 그 물은 자체가 그녀에게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이름(‘하갈’)을 알고 있고, 그녀의 신분(‘사래의 종’)을 알고 있습니다. 또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를 담은 물음(‘어디에서 와서 어디로’)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하갈의 무너진 삶 속에 개입하시어 구원을 주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하갈은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리면서 인격적인 존재로 대접받습니다. 그동안 하갈은 인격체가 아닌 물건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과 잠자리를 같이하도록 했을 때 하갈을 “나의 여종”(16:2.5)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브람도 하갈을 “당신의 종”(16: 6)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갈에 의해서 물건처럼 ‘취해져서’ 아브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아브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녀는 창세기 16장의 거의 모든 문장에 등장했지만 실제로는 주변인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갈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녀의 느낌이나 생각도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광야 우물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인격체로 대접받자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남기게 됩니다.

창세기 16장 13절에서 하갈은 하나님께 이름을 지어 바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갈에게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가 믿는 저들의 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광야 우물가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돌봄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하나님으로 드디어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가리켜 ‘엘 로이’, 곧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누구한테도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 형제, 친지와 단절된 채 그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종의 신분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지의 광야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손수 위로와 보살핌을 주시니, 그녀는 감격한 나머지 하나님을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 엘 로이’라 이름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당신은 줄곧 보고 계셨군요. 나같이 연약하고, 이용만 당하고, 고통만 겪는 이방인 여자까지도 당신은 돌보고 계셨군요. 나는 당신이 족장들, 히브리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 귀한 신분의 사람만 보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요.”

바로 이 체험을 통해 하갈은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환경은 이전과 똑같지만 살아가야 할 의미를 비로소 갖게 된 것입니다. 사라에게 되돌아갔을 때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게 됩니다.

하갈의 무너진 삶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이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지 못한 이들, 곧 소외된 사람,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에게 돌봄을 주십니다. 하갈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계셨듯이, 상처와 비참한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 눈동자처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3)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21:17)

하갈은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 결국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14년을 큰 갈등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 것 같습니다. 그러다 사라가 이삭을 낳으면서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고, 결국에는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하갈은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구원을 경험하고, 그 경험에 감격해 신앙고백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녀가 아들을 임신한 다음에 사래의 핍박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와 배 속의 아기를 돌보아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하갈은 감격한 나머지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의 이름(“엘 로이”)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16:11-13). 참으로 은혜로운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이 체험이 있은 다음부터 하갈이 하나님의 돌봄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면 이번에 쫓겨나면서 그렇게 쉽게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까지 해놓고 그 고백과는 완전히 다른 엉뚱한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하나님의 돌봄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지 않았기에, 그리고 자기가 드린 신앙고백도 가슴에 품고 살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고 목 놓아 울부짖습니다. 하갈이 그동안 하나님이 약속을 잊고 살았다는 점은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21:17) 하는 물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은 “내가 그때 광야 샘터에서 너를 돌보아 주었고, 그렇게 계속 돌보아 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도,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목 놓아 울고 있느냐?” 하시는 물음입니다. 그녀는 지난 세월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살았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돌봄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낼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21: 13)는 약속을 하갈에게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이 약속에 의지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아브라함은 그녀를 격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쫓겨난다는 사실에 사로잡혀서,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아브라함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약속을 귀담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듯합니다. 그 결과 광야에서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곧 죽게 될 것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부짖습니다. 두 번이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돌봄의 약속을 들었지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하갈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돌봄을 체험하면서도 무슨 일만 생기면 과거 돌봄 체험을 다 망각합니다. 다시금 까막눈이 되어 절망하며 울부짖습니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비참하게 받아들이면서 울부짖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시금 나타나시어 “어찌 된 일이냐?” 하시면서 돌보아 주십니다. 다음의 성경 본문처럼 말입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21:17-18).

하갈은 종족상으로는 이방인 이집트인이고, 성별로는 당대 차별을 받던 여성이며, 신분상으로는 자유가 없는 몸종이었습니다. 이런 하갈의 울부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은 누구나 그 혈통이나 성별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