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주의 시대의 인간과 영성

1. 왜 생태주의 시대인가?

인류 역사의 시대구분은 어떤 기준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흔히 근대와 전근대로 나누곤 한다. 근대의 시작이 언제부터인가도 학자에 따라 다 다르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결정지어준 산업혁명이 일어난 18, 19세기로 잡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산업혁명은 인류역사에 있어 두 번째로 큰 혁명적 사건이었다. 첫 번째 혁명은 대략 5천 년 전쯤에 일어난 농업혁명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간은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여 살았다. 작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길들여 사육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정된 식량공급과 정착생활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가져왔고 이 무렵에 지구의 곳곳에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인간생활을 지배하는 정치조직과 종교가 생겨났으며 이후 오랜 세월동안 정치와 종교는 인간사회 지배를 위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게 된다.

농업혁명을 통하여 인구가 급증했다고 하지만 농업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자연조건의 제약을 많이 받는 것이라서 자연에 대한 생태적 파괴는 결코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모든 작업이 기계로 대치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이전에 간단한 도구와 동물의 힘을 빌어했던 작업량의 수십 배 또는 수백 배를 단 하루 만에 해치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농촌이 해체되어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에 몰려 살게 됨으로서 거대한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대규모 단작농업이 행해짐에 따라 환경파괴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공장과 그 공장에서 생산된 기계들은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오염물질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환경파괴적인 산업 활동이 끝없이 생산을 증가시켜야만 체제가 유지되는 자본주의 방식에 의하여 이루어짐에 따라 지금 인류는 삶의 토대가 통째로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시대는 싫건 좋건 간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이 조금만 더 계속되면 인류는 물론 다른 생물종들도 다 함께 공멸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 뿐인 지구에 살아남기 위해 생태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하고자 하는 생태주의 시대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2. 서구문명과 인간

사실 산업혁명이니 생태위기니 했지만 이 모두가 서구문명이 세계를 지배한 데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위기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구문명의 본질을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문명이 인류사의 진보에 기여한 바가 많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오류로 인해 세계를 지금과 같은 위기상태로 몰아넣었다고 본다.

첫째, 신과 인간의 분리이다. 서구인들은 신을 인간의 관점에서 타자화하고 절대화했다. 그리하여 인간을 신의 의지에 매달려 있는 종속물로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권력자(세속권력이건 종교권력이건)들은 신의 의지를 내세워 전쟁과 탄압을 정당화했다.

둘째, 인간과 자연의 분리이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듯 인간은 자연을 지배한다. 신은 인간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자연을 마련해주었으므로 인간은 마음대로 자연을 착취 이용할 수 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자연자원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고 있어 문제가 된다.

셋째, 인간과 인간의 분리이다. 서구인들은 신이 선택한 종으로서 나머지 인종들을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인도할 의무가 있다. 또는 적어도 자신들과 같은 ‘문명인’으로 만들 의무가 있다. 심지어 다른 인종을 마치 자연물처럼 생각하여 가축을 도살하듯 마구잡이로 죽이고 말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러한 ‘분리와 지배’는 서구 합리주의와 결합하여 인간사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은 인간의 의도에 따라 변형되었고,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되었다. 이 변화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결합하여 철저한 분절사회(compartmentalized society)로 나아가고 있다. 분절화는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사회현상으로 그 안의 개인은 원자화, 도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형아파트나 종합병원, 대기업 사무실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분절사회는 소수의 전문가와 대기업이 주도하며 이것은 “대량 생산 - 대량유통 - 대량소비 - 대량폐기”를 특징으로 하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지탱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3. 대안으로서 생태공동체의 등장

서구 자본주의 문명은 부의 증대와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효과적인 체제로 입증되었으나 반면에 인간사회와 지구 생태계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그 상처는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다. 소외문제,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생태계 파괴 등이 그것인 바, 이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문명의 종말은 물론 종으로서 인간의 멸절까지 예측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안으로서의 생태공동체는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의 결점을 보완한다기보다 지금의 문명을 대체할 새로운 문명으로서 제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현재의 서구문명이 자연과 사람과 사회 사이를 분리하여 지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생태공동체는 이들 간의 일치와 조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극단적인 물질추구로 인하여 인간을 상품의 하나로 전락시킨데 대하여 생태공동체에서는 인간을 영성 가득한 신령스런 존재로 복원하고자 한다. 생태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생태적이다. 생태공동체에서 사람은 다른 생물종과 똑같이 지구 생태계의 보존과 유지에 복무하는 생물종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태공동체는 살림살이의 모든 구조와 양식이 생태주의 원리에 근거하여 만들어진다. 생태건축, 쓰레기 제로, 재생에너지, 생태농업, 생태마을, 생태도시 등이 그 내용이다. 이로써 사람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이룬다.

둘째, 공동체적이다. 생태계 내의 생물들이 군집(community)를 이루어 살고 있듯이 사람도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우며,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겨우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마을공동체 안에서 살아왔으며 또 그 안에서 진화를 거듭해 왔다. 때문에 인간은 다른 어떤 사회조직보다 마을공동체 안에서 안정감과 정체성을 가진다. 문제는 오래된 공동체 구조를 어떻게 현대화하느냐이다. 공동체의 기본 단위는 '마을공동체'이지만, 적절한 다양성과 자립을 위해 '지역공동체' 또는 '생명지역' (Bio- region)을 전략적 단위로 삼는다. 이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를 이룬다.

셋째, 영성적이다. 인간은 하나의 생물종에 불과하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생물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영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인간의 영적능력을 고양시키기보다 자연을 파괴하고 다른 종족을 지배하는 일에 더 힘을 쏟는 바람에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지속가능한 문명은 인간 영성의 계발 여하에 달려있다. 생태공동체는 영성계발을 위한 가장 적합한 사회체제이다. 이로써 사람과 신 사이의 조화를 이룬다.

4. 동양의 인간관과 생태공동체

물질과 정신,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추구했던 서양의 주류 철학과 달리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사람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아 마음닦기(수행)에 따라 우주와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천지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특히 한국의 전통사상인 삼재론(三才論) 또는 삼신사상(三神思想)은 생태공동체의 이념을 구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삼재론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라는 전일론적인 사상으로 생태공동체의 세 구성요소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하늘은 영성과, 땅은 생태와, 사람은 공동체와 각각 짝을 이룬다. 고조선의 건국정신인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 역시 삼재론과 연관이 있다. 홍익인간이 되라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임을 아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훌륭한 생태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의 물질주의 문명에 세뇌되어 우리 것을 홀대하고 남의 흉내만 내다가 사회와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생태공동체의 이념과 정확히 부합하는 우리의 전통사상은 생태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침이 될 수 있다.

5. 영성에 대하여

삼재론에 의하면 생태 안에 공동체와 영성이 다 들어있고, 공동체 안에도 생태와 영성이 다 들어있다. 따라서 생태영성 또는 공동체 영성이라는 말이 생긴다. 영성을 어떤 측면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영성은 쉽게 말해 종교 이전이다. 모든 종교는 영성에 특정 문화의 옷을 입힌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기독교는 영성에 그리스-로마-유럽 문화의 옷을 입힌 것이며, 이슬람교는 영성에 아랍문화의 옷을 입힌 것이다. 영성은 아직 종교가 성립하기 이전 인간이 천지자연의 일부로서 나와 남의 구별이 없던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혼융된 상태에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모든 요소들이 분화 발전함에 따라 영성은 제도화되어 종교 또는 특이한 신념체계로 변해갔다. 유사 이래로 대부분의 끔찍한 전쟁들이 종교의 다름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종교에서 추구하는 영성이란 것이 심각하게 변질되었거나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태주의 시대는 영성의 회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전 시기에 영성을 제대로 추구했다면 지금과 같이 생태계가 망가지고 사회가 각박해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아주 쉽다. 가령 우리들에게 친숙한 말이 되어버린 “밥이 하늘이다.” 또는 “밥 한 알에 天 地 人이 다 들어있다.”와 같은 경구를 조용히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영성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바대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영성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론: 영성에 대하여

생태공동체의 성공 여부는 영성적 요소에 달려있다. 종교공동체도 아닌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기존 종교에서 추구하는 ‘오직 믿음’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기존 종교에서는 ‘믿음’을 위하여 다른 세속적 가치의 희생을 요구하지만 생태공동체에서는 세속적 일상 속에서 ‘영성’을 추구한다.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이 곧 속된 것이고 속된 것이 곧 성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일상의 성화(聖化)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것은 일종의 수행(修行)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수행은 출가 수도자들의 행위로만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성과 속을 분리하여 보통사람들의 성화를 가로막고 성이 속을 지배하는 결과를 빚었을 뿐이다. 이제 수행은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의 기쁨’을 발견하는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내가 있으니 참 기쁘구나!”

“네가 있어 참 기쁘구나!”

“우리가 함께 있으니 참 기쁘구나!”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하는지, 저 사람은 왜 있어서 나를 괴롭게 하는지, 우리는 왜 함께 있음으로서 이런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지 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많은 고승대덕들이 ‘한 생각’만 바꾸면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간다고 가르침을 주었지만 그게 쉽게 될 일이 아니다. 쉽게 안 되니까 머리를 깎고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다. 괴롭다는 것은 마음에 걸림이 많다는 것이므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끊임없이 버린다는 뜻인데 우리네 일상은 사실 버림보다 얻음이 더 많다. 판단하고 움직이는 순간순간이 다 얻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일상을 통해 버림과 얻음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버림 쪽에 더(많이도 필요 없다) 무게 중심이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이것이 바로 김지하 시인이 말하는 ‘기우뚱한 균형’이다. 예컨대 내가 지금 사탕이 5개가 있는데 내가 3개를 먹고 친구에게 2개를 줄까 혹은 내가 2개를 먹고 친구에게 3개를 줄까를 고민 고민 하다가 후자를 택하게 되면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내가 다 먹을 수도 있고 친구에게 다 빼앗겨 버릴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서 갈등을 겪다가 나보다 남의 입장을 더 고려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성(聖)스러워 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나 남을 위주로 하여 살 수는 없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늘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사는데 그럴 때마다 혹은 전체적으로 보아 버리는 쪽에 조금이라도 더 무게중심을 두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을 곧 수행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갈등이 많은 일상의 삶이야말로 수행의 최전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 소식하겠다고 속세를 버리고 산 속 토굴 속에 들어앉은 수도자가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을 버린 것 같지마는 사실은 마음속이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자는 사실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요약컨대 수행이란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음’과 ‘버림’의 동적평형(Dynamic Balance)을 잃지 않되 ‘버림’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공동체가 수행을 위한 최적의 장소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남을 짓밟고 속이기까지 하는 기존의 사회에서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수많은 명상수련원과 피정센터가 난립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성화(聖化)에 나선 이 단체들이 상업주의와 전문가주의(道士연하는 것도 하나)에 빠져있지 않나 하는 것이 필자만의 우려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 있어 참 기쁘다!” 할 때 우리는 존재의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다. 여기서 ‘우리’를 인간에 한정하게 되면 ‘종교적 영성’이 되고, 생물에까지 확대하면 ‘생태적 영성’으로 되며, 그것을 사물에까지 확대하면 ‘우주적 영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종교적 영성이라 하여 꼭 인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형태론적으로 분류하자니 그리 된 것이지 여기에도 일즉다, 다즉일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은 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