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에는 ‘계약(契約, covenant)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무작정 신앙의 여정에 나선 아브람의 삶은 힘겹고 고달팠습니다. 그 삶을 지탱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런 삶의 도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 내가 꼭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만년에 그와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이 계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방적인 ‘약속’과는 달리 ‘계약’이란 쌍방이 똑같이 구속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과 주종관계에 있지 않고 그와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격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역사 창조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동역자(partner)로 허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5장 9절, 10절, 17절을 보면 짐승을 둘로 가르는 의식이 나오는데, 이는 고대 근동의 계약 체결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조약이 깨졌을 때, 이를 중재해 줄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약의 증인들로 동원된 신들이 조약을 깨뜨린 당사자들을 징벌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신들 앞에서 장엄한 맹세를 했고, 이 맹세의 효력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맹세 의식이 무척 중요했습니다. 맹세 의식은 보통 짐승을 두 쪽으로 가르는 행위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시리아의 도시 마리(Mari)에서 발견된 기원전 18세기 점토판을 보면 당나귀를 두 쪽으로 가르는 맹세 의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시리아의 세피르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따르면, 조약 당사자들은 매번 짐승을 둘로 가를 때마다 ‘계약을 깨뜨리는 자는 황소가 둘로 갈라진 것처럼 갈라지리라’는 저주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때에 행한 창세기 15장의 맹세 의식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2. 창세기 15장 산책

(1)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창 15:17)

창세기 15장 7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이 문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낸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람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8절)

앞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약속했을 때 아브람은 보증이나 징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15:1-6 참조). 그런데 자손과 달리 땅에 대해서는 확실한 보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삼 년 된 암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져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서 서로 마주보게 차려 놓았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 아브람이 잠들었을 때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가위에 눌린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그의 후손이 400년 동안 남의 땅에서 종살이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둠은 하나님이 나타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연기 나는 화덕’와 ‘타오르는 횃불’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났음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이 놓아둔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람이 계약을 맺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짐승을 둘로 쪼개서 가운데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공간을 확보하고 서로 마주보게 놓은 것은 계약 당사자 중 어느 편이라도 계약을 어길 경우에는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계약을 계약의 한쪽 당사자인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대로 살지 않으면 쪼개진 짐승 신세가 될 것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본문을 절반만 읽은 것입니다. 계약의 다른 쪽 당사자인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만일 하나님이 맹세를 어긴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맹세를 어기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계약 관계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배경을 잘 살펴보십시오. 이 본문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람이 보증을 요청해서 벌어진 일, 곧 양자가 계약을 맺는 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브람의 신실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땅을 주겠다는 약속에는 아브람이 지켜야 할 의무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땅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약속이 지켜지느냐 지켜지지 않느냐는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함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맹세를 어겼을 때 쪼개진 짐승 신세가 될 쪽은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뭔가를 약속하고 맹세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입니다.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약속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 약속을 하거나 계약을 맺는 것은 스스로를 약속에 묶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계약은 ‘맹세를 동반한 관계 맺기’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노아가, 하나님과 아브람이, 모세를 중재자로 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윗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약에 와서 하나님과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계약을 맺었다는 말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계약의 당사자인 양쪽 모두가 그 관계에 자신을 묶어서 스스로를 구속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계약관계를 깨뜨린다면 쪼개진 짐승 신세가 될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과 아브람은 운명공동체가 됐습니다. 어딜 가든 함께 가야 하는 동반자가 됐습니다.

흔히 ‘하나님’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요? 힘? 권능? 무한한 지식? 전지전능? 무소부재? 주권? 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신 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모든 것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절대 자유하지 않으면 힘도 권능도 지식도 다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딘가에 매여 있다면, 그 큰 권능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에도 거리끼지 않고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절대 자유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절대자유한 하나님이 계약관계에 스스로를 묶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맹세를 아브람에게 함으로써 자신을 부자유한 상태에 몰아넣은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하나님은 모든 걸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맹세한 게 있으니 그것을 어기지 못하고, 그러니 그분은 절대 자유가 아닙니다. 아브람이 맺어달라고 애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맺은 계약이니 그걸 먼저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쪼개진 짐승 꼴이 될 텐데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절대 자유’인 하나님이 당신 백성과의 계약관계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서 스스로 묶인 상태에 놓인 지점이 바로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사람과의 “계약”을 통해 스스로 묶인 하나님! 이는 후에 신약성경의 “성육신” (incarnation)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있는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답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자유’일 것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이 이를 잘 웅변해 줍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이 ‘자유’는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된 사건에 다름 아닙니다. 즉,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처음 경험한 하나님은 바로 자신들을 ‘자유케 하신 분’이었습니다. 또 죄로부터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심판으로부터의 자유 등등 모든 형태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유는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해방을 받았다고 합니다(갈 5:13).

이렇듯 우리 모두는 자유를 ‘선물’ 받았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선물로 받은 자유를 잘 보존하고, 계속해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느냐 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해답을 갈라디아서 5장 1절과 13절에서 각각 제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새번역이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라고 번역한 구절을 공동번역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라고 했고, 개역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번역했습니다.

자유인으로 살려면 “종살이하지 말아라”(5:1)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종노릇하라”(5:13)는 말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종살이하지 말아라”는 말과 “종노릇하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 말고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설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 자신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었는데,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 이것이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스스로의 정체성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우리에게 ‘자유’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복종’입니다. 복종이 싫어서 자유를 추구했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를 얻었는데 이제는 스스로 그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하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자유’가 아니라 ‘복종’을 청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람과의 “계약”을 통해서 스스로 묶인 하나님! 즉 절대 자유를 포기하신 하나님 아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된 그리스도인! 즉 자유인 아닌 자유인! 둘이 참으로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 않습니까?

이렇듯 서로에게 콩깍지가 씌인 하나님과 사람이 ‘계약’을 통해 운명공동체로 묶이고, 그 계약에 충실하고자 애써온 역사가 구원사(救援史)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늘 한결같았는데, 사람의 사랑은 끊임없이 변덕스러웠던 것이 그 구원사의 내용은 아닐까요?

(2)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창 15:13)

창세기 15장 13절에는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이 언급됩니다. 약속과 성취 사이에 놓인 이 “사백 년”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나의 “사백 년”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