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세기 11:1-9 길잡이

2. 창세기 9:17-11:26 말씀 순례

(1) 노아의 아들 함이 받은 저주에 대하여(창 9:18-29)

구약에서 벌거벗음은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품위를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조상 함은 그의 아버지 노아가 벌거벗은 채 술에 만취되어 누워있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가 손상된 것을 회복시켜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노아가 술이 깨어 막내아들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되고, 이어 아들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린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함의 잘못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주지 못한 데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기본 요소는 부족 내의 질서와 세대 간의 전통입니다. 따라서 윗사람이나 윗세대에 대한 존경은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이를 무시한 막내아들에 대한 저주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이야기는 당시 다윗-솔로몬 왕조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가나안족을 마구 부린 것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씌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는 이 이야기를 윤리적으로 퇴폐한 가나안의 종교의식과 그들의 발달된 농경문화로의 유혹을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도 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와 그 후손들이 가나안의 음란한 제의에 바치는 것을(레 18장; 왕상 14:24) 경고하며, 그들이 야훼 신앙을 올바로 지켜나가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해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아프리카 흑인들이 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들을 노예로 쓰는 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 성경에는 왜 지루한 계보나 족보가 많이 등장할까요?

홍수 이야기 뒤, 10장 1-32절에 민족들의 일람표(노아의 아들들의 족보)가 기록된 이유는 홍수 이후에 내린 하나님의 축복, 곧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9: 7)는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며(10:32 참조), 인류가 한 형제임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고 보존하며 축복한 민족이라는 점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타 민족이나 타 인종에 대한 저주와 멸시는 성경의 입장과 명백히 어긋납니다.

민족들의 일람표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이스라엘이 결코 가장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세대를 이어온 평범한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기원은 단지 셈족인 아르박삿의 후손이라고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허다한 민족들이 그들의 우월한 기원을 부각시키려고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갖은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하여 자기 민족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여 왔고, 결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체험하고 이를 고백했습니다(신 7:7-8 참조).

11장 10-26절에 있는 셈의 족보는 5장과 연결되는 사제계 문헌입니다. 5장이 창조에서 홍수 이전까지의 조상들의 족보를 10대에 걸쳐 기술하였듯이, 11장에서는 홍수 이후부터 아브라함까지를 10대로 정리하였습니다. 5장에서 10대째인 노아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처럼, 셈의 족보에서도 10대째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또한 두 족보 모두 세 명의 자손(셈, 함, 야벳 / 아브람, 나홀, 하란)으로 끝납니다. 사제계 저자가 셈의 족보를 기록한 이유는 원역사(原歷史)를 끝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셈의 후손에게까지 계속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지만”(수 24:2), 창조주 하나님은 그들까지도 축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 11:9)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흩어지다’라는 단어입니다. ‘흩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푸츠’가 아홉 절로 이루어진 이 짧은 이야기에 무려 세 번이나 쓰였습니다. 사람이 탑을 쌓으려 했던 목적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목적은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8절). 그 결과 사람들은 온 땅에 ‘흩어졌습니다’(9절). 이렇듯 같은 단어가 반복 사용됐다는 사실은 이 단어가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흩어지지 않으려는 시도가 하나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사람들이 탑을 쌓아 이루려 했던 목적이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흩어짐을 면하려 했다는 데만 관심하고 계십니다.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이름을 날리려는 목적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흩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시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으려 했고, 반대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애써 흩으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좀 더 시야를 넓혀 창세기 1-11장 전체에서 바벨탑 이야기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역설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홍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됐으나, 이와 더불어 죄악도 번성하여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창 6:5). 그래서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홍수 후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이야기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진 이야기(창 9:19)가 이어집니다. 창세기 10장에는 그렇게 퍼진 노아의 후손들의 족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11장의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창세기 1-11장을 관통하는 주제들 중 하나가 바로 히브리어 ‘푸츠’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인류의 흩어짐’입니다. 이 주제는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어, 흩어지지 않으려고 탑을 쌓는 인간의 시도와 이를 좌절시켜 기어코 인간을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일차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탑의 건축은 이야기의 소재에 불과하고, 주제는 ‘인간의 흩어짐과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로써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흩어지라는 명령이 곧 공동체를 이루지 말고 개별적으로 홀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는 대체로 좋은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정이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지옥 못지않은 가정도 있고, 교회가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분쟁이 생기면 지옥 저리 가라 할 정도가 되는 예도 많습니다. 대화보다는 강압이 앞서고 양보와 희생보다는 이해관계가 앞자리를 차지하는 집단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세워야 할까요? 우리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시날’에 탑을 쌓고 거기에 영구히 머무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견고한 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3절).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시도였습니다. 그들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가 재발했던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은 얼마동안 가만히 지켜보신 후 드디어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문제의 뿌리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6절)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조차 이를 막을 수 없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려면 ‘동질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동질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이 한 족속이라는 사실과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그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공동체 세우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흩어져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받들어 실행하는 참 공동체를 제대로 세워보라는 뜻으로 저는 읽습니다.

하나의 말만 있는 사회, 한 목소리만 크게 울려 퍼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암울한 독재시절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압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고, 그 목소리들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사회가 참으로 건강한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참 공동체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언약의 상징인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말입니다.

3. 창세기 11:27-12:20 길잡이

창세기 11장 27-32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특히 12장 1-4절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머리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성조(聖祖) 이야기와 이스라엘 역사 전체의 머리글이기도 합니다.

떠돌며 살던 아람인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은 하나님께서 밑도 끝도 없이 아브라함을 불러낸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이 명령은 신들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던 당시의 신앙태도와는 전혀 다른 신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장차 보여 줄 땅은 보증도 없는 말뿐인 약속에 불과합니다. 지금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르시는 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는 응답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여정은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 덕분에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12장 10절 이하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머니인 사라가 위험에 던져지는 상황이 이야기됩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충격적이었을 이와 같은 사건은 성조 이야기에만도 세 번이나 나옵니다(12장, 20장, 26장).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동일한 전승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고, 원래부터 독립적인 각각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