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나라’의 정의, 장소에 뿌리내린 정의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3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4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막3:1-6)

전세계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IPCC니 탄소배출량이니 하는 말들이 귀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기후위기는 독특한 위기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이대로 가면 파국적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도 압니다. 이처럼 위기임을 인식하고 있는데도 변하지 않는다는 데 기후위기의 특이함이 있습니다. 위기의 심각성을 안다는 점에서는 찜통 속의 개구리와 다르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찜통 속의 개구리와 똑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문명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어차피 도깨비방망이는 국가가, 관료들이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는 관성적인 믿음 때문일까요? 나의 책임과 행동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력감의 표현이며, 그냥 이대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무력감이지만, 적극적으로 말하면 탐욕입니다.

타이타닉호처럼 거대한 빙산을 향해 전진하고 있지만, 아직 선상의 밴드는 멋들어진 곡조를 연주하고 있고, 거기 맞춰 선남선녀는 춤을 추고 있습니다. 춤을 추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미래를 생각하고 싶지 않고, 허기진 몸을 찬 바닥에 누이고 있을 3등칸, 화물칸의 인간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한욕망추구, 무한소비, 탐욕은 우리가 속한 문명을 추동하는 심리적 동력이고, 이를 위해서는 무한 자산축적, 무한 경제성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구생태계의 실제와 맞지 않습니다. 일단 안전하다는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파국은 걷잡을 수 없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의 위기는 서로 협력하여 걷잡을 수 없는 문명의 위기를 초래할 것입니다.

과학자들, 정책입안자들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기술적 해법을 제시합니다. 탄소포집, 성층권 에어로졸 분사, 나아가서 핵발전과 지구공학적인 해법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니 저들은 저들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술적인 해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핵발전이나 지구공학적인 해법은 더 큰 문제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현재 인류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지 못합니다. 전환을 위한 길은 어느 한 길이 아니라 여러 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회 전체가, 경제와 사회 시스템 전체가 문명적 전환을 이루어야 하고, 혁명적인 정치적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이 끔찍한 무력감과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것은 그럴듯한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온몸과 영혼 전체가 반응해야 합니다. 한동안 우리는 정확한 정보와 논리로 남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한 정보와 논리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득,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무력감과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적 계기가 필요합니다. 세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 가치의 문제와 직접 대면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 안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더 나은 길을 가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의 문화적 자아를 바꾸어야 합니다.

고대 유물에 포함된 씨앗 중에는 물을 주면 발아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오래된 글이나 사상 중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물을 주면 언제든 새로 발아하는 것이 있고,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오래된 믿음의 전통에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동력을 발견하고 방향전환을 위한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가 갔던 길을 따른다면 설사 실패한다 해도 우리가 했던 생각과 실천은 남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적어도 나 자신을 설득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로마제국의 폭력과 수탈에 의해 삶 자체가 파괴되었던 1세기 갈릴리 소농들과 함께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를 상상했고,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는 타자가 단순히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이용대상이 아니며, 우리 삶이 타자에게 의존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이 ‘타자’에는 당연히 인간 외의 다른 생명체도 포함됩니다. 상호관련성과 상호의존성은 생명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지구생태계에 속한 우리는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의존합니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생태적 먹이사슬에서 상층부에 속한 존재일수록 아래 있는 존재에게 의존합니다. 가난한 농민이 부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가난한 농민에게 의존합니다. 나무도, 꽃도, 소도, 돼지도 살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인간은 살기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땅에 뿌리박은 농부의 감수성으로 이러한 삶의 진실을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하느님나라의 정의(正義) 역시 농부의 감수성에 근거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법 지식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의’를 농사를 지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농부의 삶에 근거해서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법을 앞세우는 위선적인 바리새파 지식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막 3:4)라고 물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정의이고 선입니다. 반면 생명을 짓밟고 희생시키는 것, 생명세계의 파괴로 이어지는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입니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의 근저에는 생명을 살릴 것을 격려하고 생명의 파괴에 분노하는 ‘생명의 정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예수의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정의를 생각할 때 이 물음을 진지하고 철저하게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을 살리냐, 죽이냐? 이것이 정의와 평화와 선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의 정의는 특정 장소에 뿌리내리고 자신이 속한 장소와 그 장소에 속한 존재들을 아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장소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의 중심에 농사와 농민의 삶이 있고, 소농의 삶은 장소에 뿌리내린 삶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장소에 뿌리내린 소농의 삶에서 길어올린 지혜입니다. 특정 장소에 뿌리내려 살면서 자기가 속한 장소를 아끼고 무리하게 인간의 의지에 복종시키지 않으면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장소를 돌보는 것, 장소의 본질 자체에 대한 존중은 농업문명의 특징이자 성서를 비롯하여 장소에 뿌리내린 토착적 전통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특정 장소에 뿌리내린다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사물이나 사람들 하나하나에 친밀감을 느끼고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럴 경우 장소에 속한 것들, 전체로서 그 장소에 함부로 손대거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자신의 장소에 뿌리내린 고유한 생명체로서 피조물과 대면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과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장소에 뿌리내린 공동체 안에서 개체와 전체는 하나이며, 둘이 합해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우리는 함께 몸을 이루는 다른 피조물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며, 애정을 느낄 때는 함부로 착취하고 파괴하지 못합니다. 애정을 느낄 때 우리는 추상적 범주들을 깨부수고,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이 뿌리내린 장소에서 살아가는 개체와 만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것은 친숙함과 경외, 애정 같은 것이고, 이러한 감정이야말로 구체적인 장소에 뿌리내린 개별적이며 대체불가능한 사물들, 살아 있는 사물들 자체에 의해 감각적으로 촉발됩니다. 올바름에 대한 감각 역시 그러한 구체성으로부터, 장소성으로부터 감각적으로 자라납니다. 올바름에 대한 예수의 감각 역시 장소성, 즉 구체적인 장소에 속한 인간과 생명 공동체 전체의 건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살던 갈릴리와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생태적 장소성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거주하던 장소인 갈릴리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남자들과 여자들, 어린아이들 말고 무슨 보편적 인류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그의 장소에 속한 구체적인 사람들과 사물을 떠나 추상적 언어로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현재 사는 장소에서 과거부터 이어져 온 삶의 행렬,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 흐름에 든든히 서서 자신의 소명을 자각했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깁던 갈릴리 바닷가, 언제 강도가 출몰할지 모르는 여리고 길,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는 시골 농부의 마당, 그가 기도하던 겟세마네의 올리브나무숲. 이런 것들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예수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삶과 장소를 가득 채우고 있던 구체적인 사물들이고, 하나하나가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것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이처럼 구체적인 장소에 매인 자연 사물들과 사람들, 즉 소농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복음서들이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예수의 세계는 수공업과 농업에 뿌리를 둔 농촌이었고,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한 촌부의 집에 태어났습니다.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였고, 그는 시골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누룩으로 부풀어오른 빵반죽,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엉겅퀴, 어느 틈에 밭을 뒤엎으며 번식력을 자랑하는 겨자풀 같은 것들은 그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고,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내리는 비, 씨뿌리는 사람이 팔을 뻗어 씨를 뿌리는 장면은 늘 가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새와 들판의 풀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느님은 마치 농부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땅 밑을 흐르는 물줄기처럼 그러한 소농의 일상적 삶 속에 자리하고 그 삶을 유지해주었을 것입니다. 어느 안식일 밀밭을 지나다가 밀이삭을 비비는 제자들의 모습 역시 이러한 풍경 안에서 비로소 제 자리를 찾으며, 이 익숙한 풍경으로부터 안식일 제도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예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예수의 비유들은 갈릴리 농민의 가정생활, 그곳의 마을과 들판, 작업장으로부터 구체적인 유비와 예들, 직유와 은유를 끌어들였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을 실제대로, 하느님의 섭리 아래 있는 그대로 서술했습니다. 새끼들을 모으며 울어대는 암탉, 겁에 질린 양떼, 밭을 가는 황소,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들과 길 잃은 양. 이 모든 것은 자연적인 그대로 상징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들에 핀 엉겅퀴와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며 인간의 참된 존재양식을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그런 예수가 법기술자였던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궤변, 겉치레를 체질적으로 얼마나 싫어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처럼 노상에서 공개적으로 한 말씀들은 모든 농민문학이 그렇듯이 구전적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가정의 말이 변함없이 그렇듯이 전통적입니다. 그 말씀들은 그 자체로 민중지혜의 보고이며, 격언과 속담, 경구들로 잘 짜인 직조물입니다. 그것은 전통과 독창성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리드미컬한 이행구나 삼행구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많은 리듬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시골 농부와 장인,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이용해서 보편적인 진리와 무한한 실재를 향해 눈부신 빛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농의 삶에 푹 젖어 있는 언어들을 통해 복음서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행위의 본질적 특징들이 신적인 것의 계시임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들은 이처럼 농경적인 풍경에 비추어보아야 그 시적인 솔직함과 리얼리즘을 드러냅니다. 저 높이 하느님의 시선 아래 펼쳐지는 장인들과 농부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성례전적 사건들이 경험됩니다. 구체적인 물질세계가 피조세계로 변하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피조세계와 인간 사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질 한가운데서 거룩을 경험하고 일상성 속에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름에 대한 예수의 감각 역시 이 오래된 농민공동체의 땅에 뿌리박은 삶과 전통에 토대를 둔 것이었습니다. 장소에 뿌리박은 삶의 온전성, 장소에 속한 피조물의 온전성, 즉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 올바름에 대한 예수의 감각의 근저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에게 요구했던 행동 역시 특정 장소와 그 장소에 속한 존재들과의 친밀한 사귐, 즉 이웃사랑이었습니다. 이웃사랑은 장소에 뿌리내린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애가 아니라 이웃사랑을 촉구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 안에서 육화된 사랑, 이웃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승인됩니다. 그 사랑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는”(눅 10:33-34) 사랑입니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오는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그 구체성, 시시콜콜함, 자상함에 있습니다. 이웃사랑은 자상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자상함은 장소에 뿌리박은 존재들과의 육화된 세밀한 사귐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사회의 인간들은 이 시시콜콜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대체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로지 ‘돈’의 추상성에 의해 모든 것이 대체가능한 것으로 균질화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같으면 가치도 같고 실제로도 같은 것이라는 일종의 균등주의가 존재합니다. 개발가치가 같으면 논이든 밭이든 길이든 모두 똑같고, 화장실 변기의 물이나 호수의 물이나 다 같은 H₂O입니다. 이 장소나 저 장소나 이 생명체나 저 생명체나 가격이 같으면 같습니다. 원래 각자 자신이 속한 장소에서 고유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육화된 존재들이었는데, 그 구체성을 잃고 화폐라는 단일한 추상성에 의해 보편화되고, 모든 것이 대체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실은 절대 같을 수 없는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다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생겨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보다 개인이 각자의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고, 그러한 권리의 핵심에는 재산권이 자리합니다. 이런 관념의 근저에는 모든 것을 균질화하여 ‘평균’을 내고 그 평균에 해당하는 정당한 ‘나의’ 몫을 가질 고유한 ‘권리’가 내게 있고 국가는 그러한 나의 권리를 실현해 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는 각자 자신의 권리와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를 요구하는 개인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하며, 그로 인해 정치는 시시각각 요동칩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하고 동질적인 세계 시장 안에 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문화적 배경이나 개인적 기질과 상관없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동일한 것을 열망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수량화하고 수치화하는 기계의 방식을 통해 삶의 안전을 구하는 것은 장소에 뿌리내린 삶 자체를 옹호하는 예수의 방식과 결정적으로 대비됩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오늘날 산업문명은 장소에 뿌리내려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외면한 채 단순히 외형적 발전,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척도에 매달렸고, 수량화해서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 평균화가 가능한 것만이 인간의 삶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정의에 대한 관념은 물질주의에 질식당했습니다. 이것은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이며, 결국 이제는 생명의 자발적인 순수성이 거의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후위기는 이러한 균질화가 내포하는 폭력성이 드디어 자체의 완성에 이르렀음을, 자기파멸에 이르렀음을 말해줍니다. 모든 것을 균질화해서 오로지 숫자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결코 그 숫자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화폐의 추상적 보편성, 모든 것을 돈의 추상적 합리성에 근거해서 결정하는 경향이 인간 삶의 자연적 토대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산업문명은 죽을 때까지 제 몸을 파먹는 괴물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근대적 합리성의 근원적 불합리성이 삶 자체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후위기는 느린 속도로 진행하지만, 인지하는 순간 어떻게 손쓸 도리 없이 압도해오는 위기이며, 강력한 장소연관성을 지닌 위기입니다. 장소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고 장소에 결부된 고유한 사물에서부터 변화가 감지됩니다. 익숙한 철새가 늦게 도래한다거나 봄꽃이 유난히 일찍 핀다든가 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면, 벌들이 사라지고 오랜 세월 장소에 뿌리내린 식생의 형태가 급격히 달라지며 재앙적인 기상이변이 이어집니다. 초기에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범상치 않게 받아들이는 데는 일종의 공감능력, 땅에 뿌리내린 농부의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말 농부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까요? 흙묻은 농부의 심장을 가진 농사꾼이 얼마나 될까요?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 전해오는 신성한 믿음과 그러한 믿음에서 연원하는 장소에 대한 지식, 과거의 선조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 장소에 속한 모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물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존감에서 비롯하는 존재의 편안함, 이러한 것들을 체현한 집단은 오늘날 소수 토착원주민 사회뿐인지도 모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것은 근대 산업사회가 장소와 땅에 뿌리박은 문화를 말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장소에 뿌리내린 삶을 옹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아니 종교가 존재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장소에 뿌리내린 삶, 우연과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을 옹호했습니다. 장소에 뿌리내릴 때 구체적인 개체 하나하나가 주체가 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누가 12:16-21)에 등장하는 부자는 곳간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고 이제는 안전하다고 장담하지만, 바로 그 날 밤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은 그의 목숨을 되찾아갑니다. 삶은 유동적입니다. 그가 어리석었던 것은 죽기 전에 자기 재산으로 자선을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껍데기로, 바보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돕더라도 무슨 윤리적 정언명령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충실성으로, 자발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 행동했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삶의 신비에 대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마음이 움직여져서 신비와 만났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신이 만난 신비로운 인물에게 고이 간직해온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 그것을 판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우선합니다.(막 14:3-9; 마 26:1-5; 눅 22:1-2) 분주히 일하는 언니 마르다를 도와 착한 동생이 되기보다는 사모하는 분 옆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인생에서 해야 할 한 가지 좋은 일입니다.(눅 10:38-42)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 자신이 가졌던 것을 다 버리고 따릅니다. 키작은 삭개오는 예수를 보려고 나무를 오릅니다.(눅 19:1-10) 모두가 자발적으로 마음이 움직여져서 열린 마음, 따뜻한 가슴으로 한 일들입니다. 마치 이른 봄, 나무에 물이 오르고 호랑이 몸에 윤기가 나듯 살아 있는 인간이 그 자신의 활기찬 생명체로 발돋움하겠다는 유일한 목적에서 한 일들입니다. 그 앞에서 모든 숫자와 기계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돌멩이처럼 앉아서 구걸하던 한 사람의 눈먼 거지도 그 앞에서는 유일무이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독특하고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수치로 환원해서 다른 인간과 비교하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있는 실제 인간이 해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라는 것은 어떤 사회조직, 정치제도라도 그 근거로 삼아야 할 진리입니다. 그것은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은양 한 마리를 찾아나설 때 가슴에 품었을 진리입니다. 그 진리 편에 섰을 때 우리는 생명의 정의, 예수의 정의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우리 삶에서 가격표가 붙은 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결정적으로 줄여야 합니다. 인간 삶의 사회적, 문화적 토대로부터 벗어난 미친 경제가 압도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기후위기의 시대에 요구되는 문명전환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동시에 장소에 뿌리내린 예수의 정의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때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예수의 세계가 농부와 농사의 세계였다는 사실입니다. 농부 예수에게 인간 삶의 자연적 형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구원의 은총과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법칙, 리듬은 장소에서, ‘땅’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금융과 산업으로부터 파생한 인위적인 부의 기준이 아니라, 진정한 부의 원천으로서 땅을 보존하는 것은 참된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대립,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것은 땅과 장소에 토대를 둔 삶에 대한 유기적이고도 통전적인 견해와 경제적 물질주의 사이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