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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3년
제목 [3.5] 탈(脫)-향(向)의 길 위에서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3-03-11
조회수 59
첨부파일
p230305_질그릇_1단 (2).pdf

 

11: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하란은 롯을 낳았다. 28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땅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31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12:1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4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11:27-12:4)

 

익숙한 증언 제목?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증언 제목을 ()-()의 길 위에서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 같으시지요? ,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2017년에 펴냈던 제 설교집 제목입니다. 그 설교집은 제가 서울제일교회에 부임한 첫해에 했던 설교들을 날짜순으로 묶어서 펴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설교집 제목을 뭐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의 길 위에서라고 했습니다. ‘()-()’이라는 말은 제 스승 안병무 선생님에게서 가져온 것이고, ‘길 위에서라는 말은 우리 교회 제2대 담임목사였던 박형규 목사님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벗을 탈()’자와 향할 향()’자를 합쳐서 안병무 선생님이 만든 낱말입니다. ()탈출한다’,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압제로부터의 탈출, 바빌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벗어남, 이것이 바로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유가 그 목표를 잃으면 방종이 됩니다. 그래서 자유는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 끝나서는 안 되고, ‘무엇 무엇을 향한 자유또는 무엇 무엇을 위한 자유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출애굽의 목표는 가나안이었습니다. 바빌론 포로의 목표는 시온, 즉 예루살렘으로의 귀향이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에는 ()’이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튼 제 스승이신 안병무 선생님은 ()-()’이라는 조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자 했습니다.

길 위에서는 박 목사님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와 같은 낱말입니다. 이는 당신의 회고록 책 제목이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라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당신의 믿음은/정체성은 길 위에서형성되었다고 말하셨습니다. 골방이나 서재가 아닙니다. 예배당도 아닙니다. ‘길 위입니다. ‘길 위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현존하는 곳입니다. 역사의 한복판, 사회적 실천의 현장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 박 목사님은 민중 현장에서 당신 믿음과 정체성을 형성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첫해 설교집 제목을 ()-()의 길 위에서라고 한 이유는 저와 우리 교회가 안병무 선생님의 신학에 기초해서, 박형규 목사님의 삶과 신앙과 목회를 계승하자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증언 제목을 설교집 제목과 똑같이 정한 이유도 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의 길 위에서라는 말이 우리 기독인의 실존과 우리 교회공동체의 지향을 표현하는 데 꼭 알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라!

사순절 둘째 주일인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한 구약 본문은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정확히는 창세기 121절부터 4절까지인데,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1127절부터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원시 역사라고 불리는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우주가 탄생하고 인류가 생겨나 끊임없이 그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것이 점차 인류의 파멸로 귀결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조사로 불리는 12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는 돌연 인류사의 무대가 메소포타미아의 작은 땅 팔레스타인으로 좁혀집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대한 우주의 파노라마가 불과 몇십 명에 그치는 아주 소수 사람의 방랑기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 전환이 시작되는 본문이 바로 오늘 읽은 창세기 121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하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신앙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고,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 명령은 맨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127절로 32절에 있는 데라의 족보를 보십시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입니다(11:27). 그리고 그의 고향은 바빌로니아/갈대아 우르입니다(11:28). 그런데 데라는 아들 아브람 내외와 손자 롯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고향 바빌로니아 우르를 떠났습니다(11:31). , 가나안을 향한 이주는 아브람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 데라가 처음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하란에서 멈추었고, 거기서 자리를 잡고 살다가 205세에 죽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11:31-32).

이어지는 창세기 121절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람에게 주어졌고, 4절은 아브람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떠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장소는 하란이었다고 합니다. 하란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하란은 임시정착지였지 결코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바빌로니아 우르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57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1절의 명령은 원래 아브람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 데라에게 주어졌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라는 고향 바빌로니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그는 하란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왜 멈췄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데라는 고향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났다가 하란에 자리를 잡고 살았고”,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떠났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은 정착했고, 다른 한 사람은 떠났습니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데라가 아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먼저 부르심을 받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따랐느냐가 중요합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데라는 포기했지만,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따랐기에 후세에까지 영원토록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을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왜 아버지 데라가 아니라 아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왜 하나님은 데라에게/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기원전 2000년경 당시에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난다는 것, 그래서 종족에게서 이탈하여 이방 땅에 간다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의 길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를 보안하고 있고, 그래서 안전할 수 있고, 정주(定住)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는 그 자리, 종족이 서로 어울려서 힘이 되어주고 있는 그 자리, 마침내 아비의 집까지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 모든 것이 갖추어진 풍요로운 조건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자기를 무장해서 이것을 미래에도 연장해 보려는 삶의 자세를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이 가리키는 것은 소유(所有), 기성(旣成), 보수(保守) 등입니다. 이것들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개방, 진취, 진보 등을 방해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스승 안병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본문을 읽으면서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떠나라고 하신 곳, 데라와 아브람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빌로니아/갈대아 우르입니다. 그런데 우르는 어떤 곳입니까? 우르는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 중 하나입니다. ‘우르는 영어로 ‘Ur’로 표기하는데, 도시를 뜻하는 영어단어 ‘Urban’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수메르는 인류 최초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곳입니다. ‘신석기 혁명을 통해 문명을 탄생시키고 도시를 발달시킨 곳입니다. 그래서 문명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civilization도시를 뜻하는 또 다른 영어단어 civil은 그 어원이 같습니다. 이렇듯 문명도시는 함께 갑니다.

그런데 문명과 함께 가는 것이 도시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power)입니다. 인류가 수렵과 채집에서 목축과 농경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석기 혁명덕분인데, 그 결과 인류는 정착과 집단생활을 시작합니다. ‘사회(社會)’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회에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을 논밭에 대기 위해서는 토목공사가 필요하고, 토목공사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통제할 체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 통제체제를 담당할까요? 바로 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듯 힘 있는 사람의 통치는 문명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통치자가, 다스리는 자가 시민을 보살피고 돌보기보다는, 지배하고 군림하고, 착취했다는 것입니다. ? 힘을 가졌기에 신석기 혁명을 통해 발생한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 즉 생산자가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한도 이상으로 생산한 것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때부터 인류는 힘을 추구하고 힘을 숭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1주일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큰 사건이 여럿 일어났습니다. 먼저 정순신 사태, 그리고 민주당의 비명계 반란,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망언 등이 그것입니다. 이 셋은 각각 다른 사건 같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자기가 이미 가진 것을 놓지/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사건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오해할까 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과 마찬가지로, 가치 중립적이고,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사익(私益)을 위해서 쓰느냐, 공익(公益)을 위해서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쓸 때, 힘은 악()이 됩니다. 반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쓸 때는 선()이 됩니다. 나아가 힘의 추구를 넘어 힘의 숭배가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힘의 숭배는 다릅니다. 숭배는 ‘ism’, 신념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의 숭배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신앙과 대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16:13)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맘몬은 금력(金力), 돈의 힘과 같은 말입니다.

설명이 길어졌는데, 더 하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추가설명이 필요한 분은 제가 지난 215일에 했던 생명을 택하여라!”라는 제목의 증언을 꼭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가? 정확히는 왜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는가? 제가 찾은 답은 이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우르는 소위 힘이 최고다라고 말하는 문명의 정상성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지배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거기에 지구라트’(ziggurat)라고 불리는 네모반듯한 계단 모양의 고대 성탑, 즉 바벨탑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쌓은 탑 아닙니까?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한 것 아닙니까? ‘힘의 숭배를 위한 성전 아닙니까? 제가 215일에 했던 생명을 택하여라!”라는 증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적 예수 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문명의 정상성하나님의 급진성을 말합니다. 문명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힘은 참 좋은 거야. 힘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거든. 그러니 힘을 가져. 못 가지겠거든 힘 있는 자에게 납작 엎드려서 복종해. 그러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거야. 그게 잘 사는 방법이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이 답이야. 정의가 답이야. 그래야 혼자가 아니라,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사람답게 잘 살 수 있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나누고 섬기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야. 가져야 행복한 게 아니라 나눠줄 때 행복한 거야. 섬김을 받을 때가 아니라 섬길 때 진짜 긍지를 느낄 수 있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할 때 참된 보람을 느끼는 거야. 이게 나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이야. 이게 하나님의 나라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데라에게/아브람에게 바빌로니아/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던 이유는 그곳이 힘이 최고다라고 말하는 문명의 정상성의 요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기를 탈출해서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문명의 정상성과 다른 하나님의 급진성을 실현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가 ‘12지파 공동체라는 평등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200년간 실현했습니다.

 

탄소금식과 그린엑소더스

사순절을 맞아 지금 우리 교회는 탄소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년에도 했지만, 올해는 특별히 모든 기장교회와 함께 우리 교회가 제안한 안을 가지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탄소금식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은 최소화하고, 탄소흡수원을 늘리는 운동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는 문명 대전환이 깔려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성장 위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 결과가 기후위기입니다. 아니 기후비상사태입니다. 이대로 그냥 살면 인류는 멸망하고야 맙니다. 그러니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 궁극적 목표는 탈성장입니다. 성장주의로부터 탈출하는 것, 벗어나는 것 외에 다른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탄소금식은 탈성장 문명에 대한 훈련입니다. 우리는 (경제)성장이 없으면 죽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전거의 패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멈추고 쓰러지는 것처럼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성장하면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색성장, 그린뉴딜 등은 다 눈가림이고 속임수입니다.

오늘 본문에 빗대어 표현하면 그것은 하란입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하란이 죽음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람의 죽은 동생의 이름도 하란이었습니다. 그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기 전에 죽었습니다(11:28). 죽은 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여행을 떠날 수 없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행자에게 하란에 머무는 것은 죽음입니다. 만약 하란이, 녹색성장그린뉴딜이 답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힘 숭배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 옛날 히브리는 가나안 산지에서 12지파 평등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가나안 현지민보다 풍요롭지 못했을지라도 저들은 200년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 멸종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러려면 반드시 기후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가진 자만 떵떵거리며 잘살고, 못 가진 자는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디스토피아는 인류 멸종을 앞당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기후위기 시대에, 기후재난기후비상사태 시대에 우리는 함께 가려고 다른 기장교회들과 함께 탄소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여정에 들어섰으니 부디 하란에 멈추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보조를 맞춰 조금 앞서 걸어가 끝내 가나안 복지에, 탈성장을 하면서도 사랑과 정의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 길 위에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