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마당 > 설교

설교

카테고리 2023년
제목 [2.19] 산밑으로...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3-02-23
조회수 92
첨부파일
p230219_질그릇_1단.pdf


산밑으로

 

12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 13모세가 일어나서, 자기의 부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다. 14올라가기에 앞서, 모세는 장로들에게 일러두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아론과 훌이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니, 문제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에게로 가게 하십시오.” 15모세가 산에 오르니, 구름이 산을 덮었다. 16주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다. 이렛날 주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다. 17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 18모세는 구름 가운데를 지나, 산 위로 올라가서, 밤낮 사십일을 그 산에 머물렀다. (24:12-18)

 

변모주일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고, 이번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사순절 직전 주일인 오늘을 (산상)변모주일(Transfiguration Sunday)로 지킵니다. 우리는 그 기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가 있은 지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모습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했습니다.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이사랴 빌립보헤르몬산4km 떨어져 있기에, 예수께서 세 제자와 올랐던 산이 2,814m 높이의 헤르몬산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성서가 말하는 높은 산은 비일상적인 삶의 자리, 하나님의 현존 앞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인 출애굽기 24장의 말씀 역시 하나님의 현존 장소였던 시내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원래 출애굽기 19장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산, Axis Mundi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시내 광야에 이르러 산 아래에 장막을 쳤습니다(19:1-2). 그런데 하나님은 산 위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라고 하십니다.

 

4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5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19:4-6)

 

이 언약은 20장부터 23장까지 선포된 십계명’(20:2-17)여러 법규’ (20:22-23:19)로 구체화하였는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과 법규를 모두 전하니,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대답합니다(24:3).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시내산 꼭대기로 내려오셨고, 또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19:20). 그런데 모세만 하나님을 산에서 만났던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전통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모리아 땅, 일러주신 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22:2). 모세가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곳도 호렙산이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5).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다보면서 죽은 곳도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산의 비스가 봉우리였습니다(34:1). 이렇듯 산()은 구약의 전통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 전통에서 신의 현현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 특히 높은 산이 신의 현현 장소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은 신이 사는 이상적인 세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잇는 공간으로써, 하늘에 가장 가까운 높~은 산의 정상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신이 자신을 계시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학자 중 한 사람인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가 속() 가운데 성()이 드러나는 성현(聖顯, hierophany)의 장소로서 ‘Axis Mundi’(세계의 축)를 말할 때 성산’(聖山)이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산 위로

오늘의 구약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서게 된 직후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12)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서 엿새 동안 구름이 덮인 산에 머무릅니다. 일곱째 날에 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모세를 부릅니다. 그 광경에 대해서 출애굽기의 저자는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17)고 합니다. 모세는 이 부르심을 따라 구름을 뚫고 산 위로 올라가서 사십일 밤낮을 그 산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까지 아주 길게 성막과 거기에 관계된 온갖 기물과 성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지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말씀을 다 마치시고, 당신이 손수 돌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셨습니다(31:18).

오늘 본문에는 네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르다(alah)라는 동사입니다. 먼저 1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말씀대로 일어나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13). 15절과 18절을 보면 모세는 그 산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 산에서 밤낮 40일을 머물렀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매우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의 40,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걸었던 40년의 여정, 엘리야가 호렙산에 가기까지 걸린 40,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로 보냈던 40일 등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모두는 어떤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준비하는 수련의 기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40일은 하나님을 무작정 기다리는 수동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성막(聖幕)이란?

모세가 40일 주야로 준비하며 하나님의 산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막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0장부터 23장까지에 선포된 십계명이나 여러 법규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것들입니다.

성막이 무엇입니까? 만남의 장막인 성막은 하나님이 현존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 위에 오른 모세에게 하나님은 산밑에 당신 머물 거처를 마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전까지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만 했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속 이동하며 움직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머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변모주일인 오늘은 구약 본문만으로는 메시지를 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계시던 높은 산꼭대기를 떠나 산밑으로 내려오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계속 산꼭대기로 오르기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성서일과(Lectionary)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 171~9절에는 변모 사건 이후 산에서 내려가는 예수 일행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승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놀라고 흥분한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17:4)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기꺼이 이런 놀랍고 신비한 종교체험을 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지속해서 그런 체험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 위에서 머물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산밑으로 내려가자

신학적 상상력에 있어서 목사인 저보다 뛰어난, 빼어난 작곡가이자 작사가인 류형선 선생이 아주 오래전인 2004년에 <뉴스앤조이>에 변모 사건을 소재로 우리 다시, 산밑으로 내려가자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된 거룩하고 장엄한 광경을 보고 베드로는 여기 머물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다시 산밑 마을로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물론 성경에 예수님의 이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17:1-9 참조). 단지 류형선 선생이 그렇게 상상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찬송가 442저 장미꽃 위에 이슬의 가사를 이 사건에 빗대어 풀이합니다. 이 찬송은 C. S. Miles가 작사·작곡한 곡입니다. 그는 이 곡에서 잠시라도 수난의 현장인 속세(俗世)를 떠나 꿈과 같은 피안(彼岸)의 자리에 머물고자 한 제자들의 심정을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하지만 시인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기에 머물자는 베드로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3절에 이렇게 담아냅니다.

 

3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후렴]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런데 Miles동산세상으로 대비해서 묘사한 것을 류형선은 산 위산 밑으로 대조해서 노래합니다. 그는 국악찬송 산밑으로 내려가자에서 변화산 이야기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산밑으로 내려가자 산밑으로 내려가자

주의 발길 따라서 산밑으로 내려가자

 

1 우리 힘은 작지만 아주 작지만 주께서 쓰실 때는 크게 쓰시니

2 우리 믿음 새롭게 더욱 새롭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맑게 씻은 우리

3 허리끈을 동여매라 일하러 가세 주와 함께 동행하면 어디나 하늘나라

 

변모 사건이 일어난 자리

오늘 우리는 증언 후 감사찬송과 마지막 보냄찬송으로 442저 장미꽃 위에 이슬과 국악찬송 산밑으로 내려가자를 부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시인 Miles와 류형선의 신학적 상상력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시인이 이런 상상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변모 사건이 일어난 자리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변모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가 있은 지 엿새 뒤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먼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주전 20년경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 대왕에게 준 땅이었습니다. 주전 19년에 헤롯 대왕은 판(Pan) 신을 섬기던 동굴 앞에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2년경에는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Philip)이 여기에 커다란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이 통치하던 빌립보 지역의 수도로 삼았으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한다는 의미에서 황제를 칭하는 카이사르(Caesar)와 자신의 이름을 합해 도시 이름을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식 기획 도시였고, 체제 선전을 위해 로마 황제가 신적 존재로 추앙받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베드로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나사렛 출신의 농부 예수야말로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실로 장엄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밝힙니다.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거기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거라는 것이었습니다(16:21). 섣부른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붙들고 말립니다.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16:22).

베드로는 좋은 제자였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솔선수범하여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두려운 침묵이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엿새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변모한 주님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말씀을 주고받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놀라운 신비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수난이라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산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주님의 모습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산밑으로 내려옵니다. 앞서가시는 주님의 발길을 따라서 산밑 삶의 현장으로 내려옵니다. 그 발걸음은 두렵고 떨립니다. ? 이 세상은 험하고 우리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숭배하는 문명의 정상성을 좇는 세력은 강대하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좇는 무리는 약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저하는 우리에게 주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16:24). 그러니 담대하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각자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이 고난의 길처럼 보여도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길은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자격없는 우리를 불러 당신의 구원사역을 맡기신 하나님의 길이기에,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Miles442장 후렴에서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사순절 탄소금식

우리는 사순절 순례 여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재정립하는 절기입니다. 특별히 이번 사순절에는 전체 기장교회가 탄소금식을 다 같이 실천한다고 했습니다. 탄소금식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왔던 방식에 대한 도전입니다. 지금까지처럼 살면 인류가 곧 망하겠기에,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자는 담대한 전환입니다. 그러니 하는 척 흉내만 내지 말고, <사순절 탄소금식 실천 지침>을 철저히 살아내십시오. 그래서 경건과 절제를 생활화하십시오. 몸에 밴 습관이 되도록 훈련하고 또 훈련하십시오. 그때에 우리가 부를 찬송 가사처럼 우리 힘은 작지만, 아주 작지만 주께서 쓰실 때는 크게 쓰십니다.” 이런 우리의 여정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