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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3년
제목 [1.15] 스스로 질문하게 하라ㅣ이은주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3-01-19
조회수 33
첨부파일
p230115_질그릇 1단.pdf

스스로 질문하게 하라!

 

7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9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1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13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15그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4:1-30. 39-42)

 

Introduction

여성이라는 주제로 UN이 국제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입니다. 첫 모임은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습니다. 20년이 지난 1995년에 제4차 세계여성대회가 북경(北京)에서 열렸는데, 이 북경(北京)대회에는 세계 189개국 정부 대표, 유엔 관련 기구, 그리고 소수의 민간단체 대표들이 참가하여 세계 여성 정책을 세웠습니다. 이 대회 참가자들의 다수가 정부가 파견한 대표들이었기 때문에 남자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성 평등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를 경험할 수 있는 모임은 이 회의 바로 전에 열리는 비()정주포럼입니다. 북경대회 때는 Huairou라는 곳에서 비정부 포럼이 열렸는데, 5만 명의 여성이 참여했고, 미국장로교회도 30여 명의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 명으로 갔는데 그때 한 유럽 여성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나누려고 합니다.

1990년경에 이 여성은 아프리카의 여성들의 실태를 알고 싶어서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답니다. 여행하는 중에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갔는데, 그 마을의 우물가에서 먼 거리를 걸어서 물을 길으러 온 여성을 만났답니다. 그 여성은 물을 길으러 온 아프리카 여성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 여성들은 집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기 때문에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이 여성의 말을 들은 아프리카 여성이 참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신네 나라의 여인들은 참 외롭겠네요라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가는 행위가 그저 힘든 노동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유럽 여인에게 이 아프리카 여인의 응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우물은 물론 우리가 사는 데 꼭 필요한 귀한 물이 있는 곳이지만, 이 아프리카 여인에게는 우물이 또한 다른 여성들을 만나 어울릴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유럽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마치 자기의 경험만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할 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편견 때문에 다른 여성들의 경험을 폄하하고, 잘못된 문제 제기를 하여,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요.

 

우물과 결혼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도 우물가에서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도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에 우리의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가 보지 못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도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오간 대화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내려온 해석도 어쩌면 우리의 경험에 기준으로 한 편향된 해석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미 많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성공회 주교이셨으며 성서학자로서도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John Spong은 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야기가 실제 사건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예수 체험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랍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저자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썼을까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상과 세계관 속에서 우물의 기능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물이 20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사교 장소인 것처럼, 먼 먼 옛날에 사마리아에서 살던 여인들에게도 여인들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의 영역에 남성이 등장했습니다. 이건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우물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소환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우물을 찾아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물을 마시기 위함이 아니라 아내가 될 사람을 찾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유대인들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삭의 아내감을 찾기 위해 자신의 하인 중 가장 연장자를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는 이야기가 아주 상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한 부분을 읽겠습니다.

 

그 종은 주인의 낙타 가운데서 열 마리를 풀어서, 주인이 준 온갖 좋은 선물을 낙타에게 싣고, 길을 떠나서, 아람나하라임을 거쳐서, 나홀이 사는 성에 이르렀다. 그는 낙타를 성 바깥에 있는 우물 곁에서 쉬게 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였다. 그는 기도하였다. “주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오늘 일이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여기 우물 곁에 서 있다가, 마을 사람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면, 제가 그 가운데서 한 소녀에게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하겠습니다. 그 때에 그 소녀가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주겠습니다하고 말하면, 그가 바로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의 아내로 정하신 여인인 줄로 알겠습니다. 이것으로써, 주께서 저희 주인에게 은총을 베푸신 줄을 알겠습니다.” (24:10-14)

 

이렇게 해서 우물로 나온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불과 다섯 장 뒤, 이번엔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인 야곱이 자신의 아내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쓰여 있는데, 우물은 이때 또다시 등장합니다. 야곱이 아내를 찾으러 자신의 외삼촌, 즉 자기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는데 야곱은 목동들이 돌을 치우고 자신들의 양 떼에 물을 먹이고 있는 우물에서 라헬을 만납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라헬을 야곱은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이어서 혼인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우물은 다시 한번 짝을 찾기 위한 장소의 역할을 했고, 라헬은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도 우물이 아내를 찾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나서 파라오의 분노를 피해 광야로 도망친 모세가 우물을 발견하고 그 옆에 앉았는데, 양 떼에 물을 먹이려고 그 우물에 온 미디안 지역의 제사장의 일곱 딸이 남자 목동들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을 본 모세가 일어나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 물을 먹이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딸들의 아버지는 고마움에 자기의 딸들을 보호해준 모세를 집으로 초대하고, 자신의 딸 중 하나인 십보라를 모세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11-22; 스퐁, 134--138)

유대인인 예수는 자신이 속한 문화가 우물에 부여하는 이러한 의미를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혼혈 인종이라고 또 혼합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라 해도 여전히 그들은 야곱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믿고 있고, 야곱의 우물에 와서 물을 긷는 사마리아 여인 또한 이러한 우물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이야기를 들으면,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이 여인의 장소인 우물에 온 유대 남성인 예수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예수의 요청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만나고 있는 예수는 그 사회가 아주 섬세하게 짜 놓은 판을 너무 많이 깨고 이 여인에게 다가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성서에서 우물이 남녀의 결혼 사건마다 등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을 이런 시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성을 다 가지신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우리의 신앙적인 감성은 예수의 남성성을 인정하는 것을 어렵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감성으론 받아들이기 참 어렵지만 스퐁은 이러한 사회 문화적인 여건을 보았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좀 달라는 예수의 요청을 유대교 남성의 구혼행위일지 모른다고 의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마리아 여성의 입장에서 그러한 유대인 남성의 추근거림을 차단하기 위해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대화의 방향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분열의 역사에 대한 것으로 전환시켰다고 이해합니다. (스퐁, 139)

 

스스로 질문하고, 신학 하는 사마리아 여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 대화는 신약 전체에 나오는 대화 중 제일 긴 대화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에 상당히 매료되어 왔는데, 저를 매료시킨 것은 대화의 내용보다도 대화 그 자체였고, 사마리아여 인의 태도였습니다. 처음부터 선생이라고 알아본 예수에게 마치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느낄 정도로 대담한 질문을 던지고, 확실한 대답을 하는 이 여인이 참 신기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서 있는 땅이 가파른 경사진 땅이지 평평한 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마치 예수와 자기가 평평한 땅에 서서 평등한 입장에서 상대하는 양 당당하게 예수에게 서로 사이에 놓인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도전적인 질문을 했고, 질문을 받은 예수도 장벽을 넘어 대답하면서, 아주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그것도 여자와 남자가, 주고받고 하는 대화를 이어갔다는 것 자체가 제겐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첨예한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장벽을 넘는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이 지금도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으로 나오기 전 3년 동안 유대교,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인 세 신앙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는데, 거기서 이 대화방식에 대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학습 방법이 상대방과의 대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말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깨우쳐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예수와 사마리아여 인의 대화는 전통적인 학습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가 특이한 것은 서로의 상대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피지배자가 그렇듯이 지배 세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첫 질문은 나는 당신과 같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유대인이면서 내게 물을 달라는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으로 들립니다. 그러자 예수는 물을 달라고 했던 사람이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네가 너에게 물을 달라는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고, 나는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여인은 예수에게 그럼 생수를 주겠다는 당신이 우리의 목마름을 채우는 우물을 준 우리의 조상 야곱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이야기냐?”며 반박하죠.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이 여인은 여기에서 한 개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을 대표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주는 생수는 단순히 육체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우물의 물이 아니라 영원한 목마름을 채워주는 흐르는 물이라고 답을 함으로써 이 대화는 점점 더 신학적인 깊이를 더 해 갑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이 , 그렇다면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는 생뚱맞게도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라고 하고, 여인은 남편이 없다라고 대답하죠. 이 대답으로 인해 이 여인은 오랫동안 성적으로 부도덕한 죄 많은 여인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뜻이란, 열왕기하 1724-34에 쓰여있는 대로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아시리아의 왕이 다섯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의 도시들에서 살게 했는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의 신 야훼만 섬기지 않고 이렇게 이주해 들어온 다섯 나라 사람들의 우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로 치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인들을 사마리아 여인으로 상징화해서 전개된 것이죠.

사마리아 여인은 이처럼 두 그룹 간의 틈을 계속 들어내는 대화를 이어가다가, 드디어 예배에 대한 두 그룹의 대립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유대인인 예수는 구원이 유대에게서 난다고 유대인의 편견을 들어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어서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라는 대답으로 지금까지 들어냈던 두 그룹 사이의 틈새를 없애 버립니다. 저는 이 대답이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고, 대화를 통해 예수가 깨우친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서 예수는 내가 바로 네가 기다려 온 그리스도라고 천명하기에 이르고, 여인은 남자 제자들이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나섰듯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뉴스를 전함으로써 예수복음의 첫 선

교사가 되는 것으로 climax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전한 소식으로 인하여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황제에게만 쓰이던 세상의 구주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천대받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는, 요한공동체의 핵심멤버들이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묵상하며 오래전에 읽었던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허병섭 목사님이 1987년에 쓰신 스스로 말하게 하라입니다. “선교활동은 ... 지역사회 주민 스스로가 자기들의 문제를 의식하고 스스로 힘을 모아 조직화된 세력에 의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환경을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쓰신 민중교육방법론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의 내용입니다.

 

오늘이 기장의 여신도회주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신도회주일에 여성들은 무엇을 해야할까요? 저는 사마리아 여인같이 자신의 경험에 반추해서,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고, 그동안 마음에 있어도 하지 못했던 질문, 정말 목마름을 채워줄 질문들을 아주 많이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했듯이 여성들끼리 서로 마주 보고 질문하고 답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깨달은 진리만이 참 자기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여러분과 교회를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여신도회 주일에 서울제일교회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저는 여성들이 스스로 질문할 수 있도록, 경사진 땅을 평평하게 만드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신도회 주일에 서울제일교회의 남성멤버들은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저는 서울제일교회 여성들이 대화하자고 할 때 서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대화하셔서 서로를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주저 말고 나서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역사는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다는 말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고, 주체적인 질문을 하여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신앙의 조상으로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