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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3년
제목 [1.8] 내가 너를 불렀다ㅣ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3-01-12
조회수 38
첨부파일
p230108_질그릇 1단.pdf

내가 너를 불렀다!

 

1"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2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3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4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5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7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8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9전에 예고한 일들이 다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새로 일어날 일들을 예고한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다." (42:1-9)

 

주님의 세례일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First Sunday after Epiphany)입니다. ‘주현절은 부활절과 성령강림절 다음으로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경축일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보다도 오래되었습니다. ‘주현절(主顯節)’은 영어 이피퍼니(Epiphany)’의 번역인데, 교파에 따라 공현절(公現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영어 에드벤트(Advent)’를 교파에 따라 대림절(待臨節)’이나 대강절(待降節)’로 각각 다르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영어 이피퍼니(Epiphany)’는 그리스어 에피파니아(epiphania)’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나타남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에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이 분명하게 나타남/드러남을 뜻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에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현(主顯)’주님의 나타남/드러남, ‘공현(公現)’공식적으로 나타남/드러남을 각각 뜻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당신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까? 누가복음에 따르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목자들 앞에서 그랬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동방박사들에게 그랬습니다. 또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그때까지 갈릴리 나사렛에 묻혀 살던 주님이 역사 속에 비로소 당신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주현절에 이 세 사건 모두를 기념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주현절에서 성탄절이 분리되어 나갔고, 16일 주현절과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을 구분하게 되면서, 주현절에는 동방박사들 앞에 당신을 드러낸 사건을, 주현절 후 첫째 주일에는 주님이 세례를 받은 사건을 각각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을 주님의 세례일’(Baptism of the Lord)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세례일인 오늘은 주님이 세례받은 사건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이에 비추어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날입니다.

 

어떤 세례를 받았는가?

여러분 대부분은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례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기독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물로 씻는 예식인 세례에는 세 가지 형식이 있습니다. 몸 전체를 물속에 담그는 침수례’(浸水禮), 머리 위에 물을 붓거나 떨어뜨리는 주수례’(注水禮), 그리고 물을 뿌리는 살수례’(撒水禮)가 그것입니다. 살수례는 베드로가 본인의 오순절 설교를 받아들인 삼천 명의 군중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형식입니다. 요즘도 군 복음화를 기치로 군 훈련병에게 하는 진중 세례식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침례를 받으셨지만, 침례만 올바른 형식은 아니고, 앞서 소개한 세 가지 형식 모두가 교회의 전통입니다. 따라서 어떤 형식으로 세례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고 내용일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내용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결단 하에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적절한 예인지 모르겠는데, 전 세례받는 것이 소설 사이공의 흰옷에 나오는 주인공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선택 중 하나로 말한 입당(入黨)’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1960년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생사를 건 투쟁을 벌였던 한 여학생의 실화를 소설로 옮긴 것인데, 거기서 주인공은 결혼과 입당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인생에서 가장 진중하게 결정해야 할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누구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아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결정이라고 합니다. 그때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당의 강령(綱領)에 동의하여 평생을 거기에 헌신하고자 입당하는 것이 기독교에 입교하고자 세례받는 것과 비숫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의 내 정체성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입당이나 세례는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세례 전에 3년을 교육받아야 했고, 철저한 심사도 거쳐야 했습니다.

전 대학교 3학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제 부모님은 저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나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야 겨우 세례를 받을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에 사순절 기간 내내 세례 교육을 받았고, 성금요일에 다른 세례 후보자들과 철야하고, 토요일 세례 문답 때 당회원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한 후에, 부활절 때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받을 당시에 참 많이 감사했고, 또 감격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 부모님은 저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베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뜻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교회법에 따라 저는 유아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세례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친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예수처럼 살 자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으라고 했고, 아버지는 예수처럼 살 자신이 없어서 평생 세례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아버지는 제가 목사 되는 것도 몹시 말리셨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나중에 임종을 앞두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병상에서 또렷한 음성으로 세례 문답을 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갑자기 예수처럼 살 자신이 생긴 것은 아닐 테고, 그제야 부족한 당신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품어 주실 것은 확신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세례를 받았는지 기억해 보자는 것입니다. 먼 전생의 기억처럼 가물가물하십니까? 아니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십니까? 우리의 기억이 어떻든 중요한 것은 세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방향 전환일 뿐입니다. 세상 풍조를 좇아 살던 내가, 예수를 따라 살겠다고 삶의 방향을 180도 전향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래서 세례 다음에 성화(聖化)의 과정이 남아있습니다.

 

세례()의 참 의미

이 성화의 과정을 돕기 위해서, 교회는 주님의 세례일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을 합니다. 서구 교회에서는 익숙한 예식이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매우 낯선 예식입니다. 그래서 저도 5년을 망설이다가 6년째인 작년에 처음으로 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올해 다시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 교회가 기독교 신자를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세례를 남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중 세례로 대표되는 일단 주고 보는 세례는 본회퍼 목사가 말한 싸구려 신앙인만 양산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 폐해가 지금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안티기독교의 출현, 신천지와 같은 이단과 사이비의 횡행, 전광훈과 같은 무늬만 기독교인 극우 수구꼴통 세력의 득세 등등.

그래서 저는 과거에 우리가 어떤 준비 과정이나 형식을 통해 세례를 받았든, 이 예식을 통해 세례의 의미를 회복했으면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를 재확인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제가 거의 매년 주님의 세례일마다 말씀드렸으니,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거나 못 들은 분은 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사야서 본문만 잠깐 언급하고자 합니다. 예수의 세례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답해줍니다. 동시에 세례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우리가 누구인지도 답해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서 42장은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이기에 가장 낮지만, 그냥 이 아니고 주님의종이기에 가장 높기도 합니다. 주님의 명을 받아 주님을 대신해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일을 수행하게 하려고 사람을 세우십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우리의 손과 발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주님의 종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무너진 온갖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직무입니다. 본문 6~7절은 이를 한 번 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의를 이루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갇힌 사람을 해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감히 부족한 내가 어떻게 그 큰 사명을 감당하냐며 뒷걸음칩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고, 나는 자격이 안 된다고 발뺌합니다. 하지만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불신입니다. ?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 나를 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내 중심에 내가 아닌 하나님을 모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아직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고,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 우리는 부르심에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례는 순종의 예식입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하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내 옛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예식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넜듯이, 이제는 주님의 뜻만을 따르기 위해 자기 뜻을 물속에 수장시키는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 풍조, 세상 가치에 따라 살던 내가 죽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사는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렇듯 세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때 이것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

그러기 위해 비결(tip)을 하나 알려드립니다. 여러분은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물그릇에 손을 넣어 조약돌을 꺼낸 후 잠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조약돌은 제가 스페인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지중해 네르하 해변에서 이 예식을 위해 가져온 것입니다. 그릇에서 조약돌을 꺼내기 위해 여러분은 차가운 세례수를 만져야 할 것입니다. 차가운 세례수는 여러분의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수장시킬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것을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거기에 담겨있는 차가운 조약돌은 구약의 여러 예언자가 지적했던 우리들의 돌심장을 상징합니다. 열정이 없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그런 자신을 물속에서 건져내 양손으로 감싸 보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 오래 기도할 수 없으니, 구슬을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를 찬송하며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차가웠던 구슬이 어느새 따뜻해질 것입니다. 마치 차가운 돌심장이 따뜻한 살심장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너를 불렀다. 너는 불가능해도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일할 것이다하는 주님의 음성을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십시오. 아무쪼록 이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다시 체험하시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결단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