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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2년
제목 [7.10]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 | 신연식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2-07-12
조회수 115
첨부파일
p220710_질그릇 1단.pdf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


10베델의 아마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렸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나라 한가운데서 임금님께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11아모스는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12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13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 14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15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 16이제 그대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오. 그대는 나더러 '이스라엘을 치는 예언을 하지 말고, 이삭의 집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말하였소. 17그대가 바로 그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누어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 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제가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이다.'"(아모스 7:10-17)

 

예언서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안 읽히는 본문이 또한 예언서입니다. 그것은 예언서의 위치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불편할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보통 다른 여러 종교는 경전들을 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위로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경전을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경전 읽기를 통해서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런 본문과 그런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서는 기독교의 경전이자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싶은데,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는 심판의 메시지와 경고의 메시지가 반복해서 나오니까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내가 알던 하나님의 이미지()와 예언서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을 평화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해왔는데, 예언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매우 무섭고 엄격한 분으로 느껴지다 보니 기존의 하나님 이미지와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17절에서도 아마샤를 두고 한 아모스의 예언은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무섭고 끔찍합니다. 무엇인가 몹시 분노에 차 있는 듯하고, 그 표현도 거칠고, 폭력적입니다. ‘이 잔혹하고 폭력적인 심판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나?’ 또는 이게 정말 성서에 들어와 있어도 되나싶을 때가 많습니다.

대체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예언서 읽기를 꺼리고 불편해합니다. 또 같은 이유로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도 설교강단에서 예언서 설교를 전하기 꺼립니다. ‘복 받는다. 잘 된다.’ 하는 긍정적인 메시지는 전하기도, 듣기도 얼마든지 좋은데, ‘망한다, 심판받는다하는 말을 매번 강단에서 전하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편해진다고 해서 예언서 읽기를 꺼려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서는 우리 신앙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분명한 차이점은 바로 예언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사 혹은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찬양과 기도를 하느님께 올리고 개인적인 위로와 축복을 비는 제사장적 전통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향한 회개의 촉구와 사회 정의에 관한 말씀을 전하면서 국가 권력과 박제화된 종교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은 오로지 이스라엘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기독교 신앙의 주된 축을 이루고 있는 예언자적 전통이 오늘의 기독교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언서에 대한 오해와 불편함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리고 깊이 예언서를 읽어가다 보면 그 거친 표현과 잔혹한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애쓰는 예언자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예언서는 인간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그래서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고, 이를 온몸으로 교감하며 몸부림치는 예언자의 신앙적이며 영적인 반응이 담겨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말보다는 우리가 괴로워서 부르짖을 때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기록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반응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22절에 보면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음성이나 언어적 표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당하는 억압과 고통, 그 눈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고통 자체가 기도이며 인간이 고통당하는 그 자체를 참지 못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오는 소리이고,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나오는 언어입니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경험하고 그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되고 있는 타인의 아픔, 그 시대 민중이 가지는 아픔을 예민하게 느끼고 동감하면서 함께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라는 책을 쓴 아브라함 헤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마치 하나님의 가슴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인간의 가슴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듯 강요하고 경고하고 앞으로 밀어붙이는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신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예언자들이현주 역, 2004, 삼인)

 

예언자들이 주로 비판하는 역할을 감당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쏟아내는 비판만을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아픔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시대의 아픔이 있는 밑바닥에 예언자가 있고, 그들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아픔, 이웃의 아픔에 함께하지 못하는 신앙은 공허한 사변이며,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궤변에 불과하다고 예언자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예언의 목적은 언제나 심판에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 행위의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고 보복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예언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회복에, 회복된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렇게 살면 너희는 망한다하고 경고를 보내고,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라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회가, 그 세계가 모두 망하는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은 이 예언자들의 절박한 메시지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마침내 역사적 심판이라는 귀결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하는 예언서 말씀은 아모스 7장의 말씀입니다. 드고아의 목자였던 아모스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열강들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던 때라, 당시 이스라엘은 그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부는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소수의 사람은 사치스러운 삶을 즐길 수 있었지만,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북왕국은 출애굽 정신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고 세워진 나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등 공동체의 이상이야말로 북왕국의 꿈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가 특권층들에게 집중되면서 그 꿈은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부르시고 그를 붙들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십니다. 아모스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백성은 망한다는 것입니다(6:1).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 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이제는 그들이 그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6:4-7)

 

오늘 본문에는 아모스와 아마샤, 두 인물이 등장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에게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은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부유한 이들의 호의에 기대어 살고, 자신 역시 특권을 누리고 살던 사람이었으니 아모스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아팠을 것입니다. 그는 아모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왕의 손을 빌리려 합니다. 그는 여로보암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백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아모스는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참을 수 없어 예언을 전하고 있는데, 아마샤는 임금에 대한 심판과 모욕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권고를 가장한 위협을 합니다. 남왕국 출신인 그가 왜 뜬금없이 베델까지 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냐며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12-13)


이 구절을 통해 애국을 가장하고 있는 제사장 아마샤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를 드러납니다. ‘밥벌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밥벌이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는 삶에서 꼭 필요한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삶을 바친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처럼 비극적인 일이 없습니다. 종교 행위가 밥벌이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는 자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듣고 싶은 말만 하게 됩니다. 아마샤는 그런 타락한 종교인의 전형입니다. 그는 스스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기에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아모스가 못내 불편한 것입니다.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종이라기보다는 그에게 밥을 보장해주는 왕의 종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반대로 아모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긴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샤와 같이 전업 예언자가 아니라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목자였습니다. 아모스는 스스로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셔서 이스라엘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하셨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임금이 사는 베델에서 이스라엘과 왕을 향해 담대히 심판을 선고합니다. 그는 자신의 예언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신념은 분명했습니다. 아모스는 38절에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누가 겁내지 않겠느냐?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으로서 예언자적 소명을 감당하고자 애썼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은 무엇일까요? 아모스 예언자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았다면 어떤 예언을 선포했을까요?

저는 최근에 본 세 장의 사진들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진은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가 ‘0.3의 철창에서 투쟁 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혹시 이 사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도 뉴스를 통해서 이미 접하신 분들도 계시고 오늘 처음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사진 한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안타까운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사진 속에 있는 유최안씨는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배 위에 있는 사방 1m의 철제상자에 자기 몸을 가두고 농성에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최근 5년간 조선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을 30% 삭감했는데, 다시 조선업이 호황을 맞이하게 된 만큼 임금을 예전 수준으로 정상화해달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며 공권력을 투입하고 이를 막으려고 하니까 유최안씨는 이 작은 철창에 스스로 들어가 용접으로 입구를 막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푹푹 찌는 날씨에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 같은 선박에서, 그것도 사람의 키보다 한참 작은 철제상자 속에 몸을 구긴 채로 버티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연세대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집회 사진입니다. 이들은 청소노동자, 경비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면서 지난 4월부터 매일 1시간가량 집회를 했습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시간당 임금을 청소노동자는 400원을, 경비노동자들은 440원을 인상하는 것과 씻을 수 있는 샤워실을 마련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요구도 아니고, 아주 격렬한 시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더욱 논쟁거리가 된 것은 연세대 학생 중 3명이 집회로 인해 학습권을 침해당했다며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취업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학생에 입장에서 하루에 1시간 집회로 조금 시끄럽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 고발을 하고, 수업료 및 정신적 손해배상으로 640만 원을 청구하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 사회가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이 두 노동 현실의 문제가 어떻게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의 삶이, 그리고 노동의 결과가 자본의 가치에 잠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진은 최근에 연이어 있었던 발달장애인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NCC 인권센터에서 드린 예배 사진입니다. 지난 523, 서울 성동구에 거주하던 40대 어머니가 발달장애가 있는 6살 아들을 안고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등졌습니다. 같은 날 인천에서는 대장암 진단을 받은 60대 어머니가 중증장애가 있는 30대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혼자 살아남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발달장애인과 중증 장애인에 대한 ‘24시간 지원체계가 우리 사회에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달장애의 특성상 활동 지원이 없이는 일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제대로 된 지원 없이 하루의 모든 시간을 발달장애 자녀와 함께 보낼 수밖에 없는 가족과 부모에게 때로 건강 상의 문제가 생기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발달장애인과 중증 장애인을 위한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마치 장애가 죄라도 되는 양 저들을 외면하고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는 책임을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한 가정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 사회에 속해있는 약자들이 어떻게 대우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과 그의 가족들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우리의 현실 가운데 일어나는 세 가지의 사건을 소개했지만, 이 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아파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들에 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없고, 자신의 삶을 버리고 해결을 위해 전적으로 뛰어들 수도 없습니다. 이들의 아픔을 위해서 용산에 가서 날마다 선포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열어 주변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연대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픔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 함께 할 수 없지만 다만 한 곳이라도 아픔의 현장에 찾아가 마음을 쏟아놓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하는 복음서의 말씀은 누가복음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데, 거기에도 강도 만나 신음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강도 만나 신음하고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제사장도 보고 그냥 지나쳤고, 레위인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의 아픔과 신음을 못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보고 그냥 지나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 아픔을 보고 그저 지나칠 수 없어서 그를 치료하고 그를 보살핀 것입니다.

예언자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시대의 아픔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언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붙들린 사람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4:18)” 하고 이사야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자신의 소명기사를 밝히셨던 예수님도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에 동참하셨고,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붙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언자로서 시대의 아픔을 만들고 있는 부조리를 밝히고, 고난받은 이들의 삶에 연대하며,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같이 행하라이제 이 말씀에 순종하며 이 시대의 예언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