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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12.19] 변방에서 시작된 평화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12-19
조회수 29
첨부파일
p211219_질그릇 1단.pdf

변두리에서 시작된 평화

 

2"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의 동포,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4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5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가져다줄 것이다. (미가 5:2-5a)

 

크리스마스 분위기 실종?

오늘이 벌써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이제 정말 성탄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별로 성탄절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 때문일까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거리에서, 또 방송에서 크리스마스 캐럴’(Christmas carol)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사실 크리스마스 캐럴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뜻으로 부르는 찬송가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불러야 할 찬송가가 기독교 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의 거리나 방송에서 마구 울려 퍼진 것이 사실은 비정상이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즈음에 석가탄신을 축하하는 찬불가(讚佛歌)가 온 거리와 방송을 도배한다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거리와 방송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진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분명히 그러한데, (70~80세대로서) 좀 허전하고 섭섭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더구나 크리스마스 캐럴뿐만이 아니라, ‘Merry Christmas!’라는 성탄 축하 인사말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백화점 대형현수막에서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라는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유학하던 시절에 미국에서는 이런 문구가 기독교 중심적이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고 “Happy Holidays!”“Season’s Greetings”라는 문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제가 요즘 출근할 때 롯데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광고하는 문구는 “Little Cloud, Big Wishes”입니다. 이렇듯 이제는 연하장이나 백화점 광고판에서 성탄 축하 인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쟁?

그래서 미국 기독교 우파(right wing)와 복음주의자들은 성탄절 즈음에 “War on Christmas”(크리스마스 전쟁)을 합니다. 그 내용은 누가 내게 “Happy Holidays!”라고 인사하면, 나는 그에게 “Merry Christmas!”라고 대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비()크리스천에게 성탄절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기독교 우파가 이 만큼만 신사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쟁점이 되는 차별금지법성적 지향, 종교적 지향 등등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법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 우파는 그것을 나와 다른 성적 지향, 종교적 지향 등등에 대해 비판하면 처벌받을 수 있으니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결사반대합니다. 기독교는 그 뿌리에서부터, 특히 역사적 예수의 삶 자체에서부터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었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차별금지의 편이었습니다. 예수는 온갖 차별에 반대했습니다. 남녀, 빈부, 인종에 따른 차별을 결사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기독교가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금지에 반대한다니요? 그게 가당합니까?

저는 제가 믿는 기독교의 도()를 전해야 한다고, 즉 전도(傳道)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타 종교를 무시하거나 헐뜯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이 길은 틀림없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니 너도 한번 믿어봐라고 하면 됐지, “(가보지도 않고) 저 길은 분명히 잘못된 길이고 틀렸어. ‘폭망하는 길이야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별금지법내가 가 본 길은 권장하되, 내가 가 보지 않은 길을 비난하지는 말자는 법입니다. 자기주장은 하되, 남을 비난하거나 차별하지는 말자는 법입니다. 이것을 기독교가 반대한다니 이해가 가십니까? 자기를 따르도록 또는, 적어도 인정하도록 권유하고 설득하는 것을 넘어서, 나와 다른 남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거나 상대와 공존할 수 없다는 뜻 아닙니까? 이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과 어떻게 병립할 수 있습니까?

 

조계종을 통해서 듣는 성탄절 메시지

제가 앞에서 미국에서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누가 내게 “Happy Holidays!”라고 인사하면, 나는 그에게 “Merry Christmas!”라고 대응한다고 했습니다. 좀 유치하지요? 저들은 비록 그것을 크리스마스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지 남의 종교를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처럼 기독교의 이름으로 남의 종교를나와 다른 남을 비난할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크리스마스 전쟁은 유치하지만, 한편 귀엽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외래종교인 대한민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쟁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평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자(佛子)“Happy Holidays!”라고 인사하면, 기독교인이 “Merry Christmas!”라고 응대하는 것이 아니라, 불자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이 지난 16예수님이 태어나심을 축하한다고 크리스마스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원행 스님은 축하 메시지에서 예수님은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배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경계를 넘어 포용으로 차별하지 않았기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탄절로써 그 의미를 기억해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이 이 땅에 말씀하신 사랑과 화합의 진리 아래 평온하기를 바란다종교가 앞장서 상호 존중과 화합으로 평화롭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권했습니다.

나아가 조계종은 지난 17일부터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일주문 앞에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연등을 밝혔습니다. 다만 2010년부터 진행해온 성탄절 연등 점등식은 코로나19 확산을 고려해서 별도 행사 없이 연등 점등과 총무원장 축하 메시지로 대신했습니다. 조계종은 지난해까지는 이웃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점등식을 열어왔던 것입니다. 아무튼, 성탄절에 이웃 종교와 전쟁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이웃 종교를 통해 성탄절 메시지를 들으니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종교적으로 더 성숙한 나라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성탄절에 불교계에서 예수 탄생을 축하해주고, ‘부처님오신날에는 기독교계에서 석가탄신을 축하해주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전통이 오래도록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비록 거리나 방송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점점 사라져가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Merry Christmas!’라는 성탄 인사가 적게 오고 가도, 예수 탄생의 의미와 정신까지 잊혀지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예수 탄생의 의미를 포용과 차별금지라고 말하는데 정작 기독교는 뭐라고 할지 실로 궁금합니다. 설마 성탄절 메시지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화합이 아니라 대립이라고, 상호 존중이 아니라 상호 비방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지요?




마리아의 찬가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

대림절 넷째 주일인 오늘, 구약 본문은 미가서의 말씀이고, 성시 교독으로 주어진 말씀은 소위 마그니피캇’(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저는 전혀 다른 이 두 말씀에서 똑같이 전하는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의 찬가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노래합니다. 이 아름다운 찬양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깨달음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은 약한 자를 도우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은 단지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처럼 약하고 비천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처럼 낮고 천한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모든 찬송시의 극치에 이르는 놀라운 찬양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이와 비슷한 찬양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무엘을 잉태했을 때 부른 노래, 한나의 노래가 그것입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1. 8)

구약의 한나와 신약의 마리아가 만난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위로하시며 그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보다 연약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 1:26-29)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자가 아니라 무명인 자들’, 세상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통해 새날을 열고 새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세상은 무명인을 조연이나 엑스트라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주연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새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잘 표현한 노래가 박영주 목사님이 오래전에 가사를 쓴 <우리가 새날을 낳으리라>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잠들어 누운 밤

하늘도 땅도 모두 잠들어

낮은 자 들어 새벽을 깨우는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깨어라 일어나 노래하라

이 땅에 새날을 잉태한 이여

오랜 수난의 세월을 이기고

새날을 낳으리라


높은 보좌 내리치고자

낮고 천한 자 일으키고자

약한 자 들어 새 일을 행하는

주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니

 

미가서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

이제 구약의 미가서로 넘어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성탄절 이야기는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만 실려있습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가 서로 매우 다릅니다. 하지만 일치하는 내용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예수가 태어난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바로 오늘의 구약 본문인 미가서의 말씀입니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5:2)

지금은 베들레헴이 예수 탄생지로 유명하지만, 예수님 탄생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변방 중에서 변방, 변두리 중에서 변두리였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베들레헴은 ‘margin’(가장자리)이었고, ‘edge’(경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었습니다. ‘을 생각하면 예루살렘이 원의 중심이라면, 베들레헴은 원의 맨 바깥 둘레원주(圓周)였습니다.

제가 오늘 예언자 미가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만 그는 주전 8세기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와 동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도 활동했었다는 말씀만 드립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왕족 출신이고 수도 예루셀렘에서 활동했고, 미가는 변방 모레넷 출신 농부이고 주로 거기서 활동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아시리아 제국이라는 패권국이 세상을 호령하던 시기에 새 세상에 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 세상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가장 먼 변두리 베들레헴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세상의 내용도 혁명적입니다. 그는 평화 세상을 선포하는데, 그 평화 세상은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제국의 평화가 아닙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 세상입니다(4:2-3).

이것은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걷어치우라는 것입니다. 무기가 없어야 비로소 평화가 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그건 꿈이 아니냐고, 망상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꿈이라고, 바람이라고 미가는 말합니다. 참고로 미가는 미가야의 줄임말이고 그 뜻은 누가 야훼와 같은가?”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어야 하나님 나라는 도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주가 한 점에서 만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원이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각 원의 중심에서 보면 원주가 만난 점은 자기 원에서 가장 바깥 변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원이 만난 점을 중심으로 해서 두 원을 포함하는 큰 원을 그려보십시오. 그러면 가장 주변에 있던 점은 이제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새로운 큰 세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변두리가 중심이 되는 변화가 있고, 또 기존에 진리라고 생각되던 가치가 전도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런 대동(大同) 세상을 꿈꾸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은 내가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위아래가 뒤바뀌는 천지개벽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은 힘의 역학관계만 바뀌었을 뿐 계속 힘 있는 자가 떵떵거리는 세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같은 세상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바뀌는게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작은 원 두 개가 큰 원 하나로 바뀌듯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동 세상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 세상을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상상의 현실화를 위해 나누고 섬기십시오. 기꺼이 희생하십시오. 미가가 예언한 장소인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이기도 하지만, 그 이름의 뜻은 모든 사람을 먹이는 밥집’(place of bread)입니다. 메시아가 바로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예언은 우리가 서로에게 밥이 될 때, 즉 남을 내 먹이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의 먹거리가 될 때, 나를 희생할 때 참 평화 세상도 오고 대동(大同) 세상도 온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 세상 건설을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모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