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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12.12] 그날이 오면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12-12
조회수 42
첨부파일
p211212_질그릇 1단.pdf


그날이 오면

 

14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15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16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17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18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19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20그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3:14-20)

 

예언자 스바냐

대림절 셋째 주일인 오늘, 구약의 본문 말씀은 스바냐서에서 주어졌습니다. 스바냐서는 세 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예언서인데, 11a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 때에, 주님께서 스바냐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스바냐요시야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요시야 왕의 재위 시기가 주전 640~609년이었으니, 그는 주전 7세기 예언자입니다. , 그는 바빌론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입니다. 이에 비해 그와 이름이 비슷한 스가랴는 주전 520~518년경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즉 바빌론 포로기 이후 성전재건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스바냐와 스가랴를 헷갈리지 않기 바랍니다. ‘스바냐’(스바니야)야훼께서 숨겨두시다/야훼께서 소중히 간직하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스갸랴’(스가리야)야훼가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에서 스바냐요시야왕 시대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인 주전 640~609년 가운데 초기에 해당하는 주전 630년경에 스바냐가 활동했습니다. 이때는 이사야 시대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후이고, 주전 622년에 있었던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예레미야 예언자의 활동이 있기 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시야가 유다의 왕이 된 것은 그가 겨우 8살 때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선왕 아몬은 햇수로 겨우 2년을 통치하고 물러났습니다. 약관 24살 때의 일인데, 그 이유는 그가 야훼주의 사제들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훼주의 사제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몬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8살짜리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위에 앉혔던 것입니다.

 

야훼주의 종교개혁?

야훼주의 사제들은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의 전통을 잇는 종교개혁을 실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므낫세의 아버지로 예언자 이사야와 함께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아시리아의 침략으로부터 남 왕국 유다를 지켜내기도 했던 왕입니다. 하지만 그는 29년 통치 말기에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는데, 그를 이어서 12살에 왕이 된 아들 므낫세는 55년의 통치 기간 내내 강력한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아몬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야훼주의 사제들은 히스기야 왕 때 미완에 그치고 말았던 야훼주의 종교개혁을 완성하고자 요시야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앉히고 내내 교육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로 이어지는 남 왕국 유다 왕의 계보 가운데 증조부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종교개혁자였고,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은 반종교개혁자였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왜 친()아시리아 정책이 반()종교개혁과 깊이 연관될까요? 므낫세와 아몬이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던 이유는 아시리아가 당시에 최고의 패권(霸權)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 아시리아가 큰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아시리아에 많은 조공을 바치며 왕권을 유지했고, 백성들은 초강대국 아시리아를 동경하고 추종했을 뿐 아니라, 아시리아의 신과 종교까지도 동경하고 추종해서 야훼 종교와 혼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스바냐는 그런 종교 혼합주의에 대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4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 5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밀곰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6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 (1:4-6)

 

야훼 유일 신앙의 본뜻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소리 높여 외쳤던 야훼 유일 신앙’ (Mono-Yahwism)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유대교(Judaism)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뿌리는 다름 아닌 야훼 (유일) 신앙입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곳이 바로 십계명의 제1계명입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나 밖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20:3). 흔히 이 계명은 다른 종교들과의 대결에서 야훼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내세운 것으로 이해돼왔습니다. 야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은 다 가짜고 우상이므로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섬겨야 한다라고 해석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십계명이 형성된 배경을 살펴보면 제1계명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그 의미를 종교적 의미로만 축소 해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의 사변(思辨)에서 형성된 신이 아니고 그 역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해서 이해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십계명 역시 사변이나 관념의 산물이 아니고 출애굽 사건의 산물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실려있습니다. 그런데 두 곳 모두에서 하나님은 제1계명 앞에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20:2; 5:6).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 여러 신이 있지만,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할 때 본척만척했던 신이 아니고, 너희를 불쌍히 여겨 해방한 나 야훼만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말하면 야훼는 우리의 해방에 직접 관여했기에 우리의 신이 되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야훼는 이집트 왕의 학대로부터 히브리들을 탈출시킨 출애굽 사건을 일으킨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히브리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가 신의 대리자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습니다. “너 히브리나 나 바로나 똑같은 인간 같지만 그게 아니다. 나는 신의 대리자 곧 신이고 너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니 신인 내가 인간인 너희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배 이데올로기는 비단 고대 이집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왕을 천자(天子=신의 아들)라고 부른 중국 등 고대 계급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출애굽한 히브리들은 이러한 통치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서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뿐이다. 너 바로는 우리와 똑같은 신의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다른 어떤 것도 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인위적인 모든 것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제1계명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는 신앙고백으로 명문화된 것입니다.

이렇듯 제1계명의 핵심을 이루는 모노 야휘즘(Mono-Yahwism=‘오직 야훼만의 신앙=야훼 유일 신앙)은 다른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야훼 하나님만을 내세우는 그런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오직 야훼 하나님의 주권만을 받아들인다는 신앙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인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역사를 보면 야훼 하나님 자리에 늘 딴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권력, 군사력, 금력, 정보력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온갖 힘(, power)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인간 위에 군림해 왔습니다.

 

그날이 오면...

앞에서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야훼주의 종교개혁 편이었고, 므낫세와 아몬은 반종교개혁 편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개혁은 이스라엘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야훼 유일 신앙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 당시에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던 아시리아의 패권 및 그들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했던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집트 왕 바로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면 세상은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합니다. 이렇듯 힘의 차이는 계급이나 계층의 차별, 즉 사람의 차별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세상 이치고 세상 풍조입니다. 하지만 야훼 유일 신앙은 하나님만 인간 위에 있을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야훼 유일 신앙은 사회정의실현과 직결됩니다. 불평등한 세상, 사회정의가 무너진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딴 것이, 즉 힘이 하나님 역할을 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스바냐는 그런 세상 속에서 그날이 온다고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다름 아닌 야훼의 날이며, 달리 말하면 야훼 하나님의 주권이 바로 서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온갖 거짓 신들이 쫓겨나는 날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종말이라고 하는데, 제가 늘 말한 대로 종말은 세상의 종말, the end of the world’가 아니라, 악의 종말, 악한 세력의 종말, 전쟁의 종말, 불평등의 종말, 폭력의 종말, 불의한 세력의 종말, 잘못된 세상 질서의 종말 등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날은 당연히 심판의 날입니다. 그래서 스바냐 115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이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심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받겠지만, 의인은 해방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리고 만인을 구원하시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심판을 통해 구원하고, 의인은 해방을 통해 구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대림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악인은 심판받고 의인은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리라 믿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잘못하면 모든 일을 그리스도에게 떠맡기고 우리는 구경꾼이 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신 혼자서, 또는 슈퍼히어로(superhero)같은 당신 대리인을 보내서 역사를 이끌어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역사 속에서 당신 동역자(co-worker, not sub-worker)를 뽑아 세워서 그들과 함께 역사를 이끌어오셨습니다.

따라서 대림절은 단순히 별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별이 되는 시간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세상 논리에 물들지 않은 이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기에 어리석은 자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현실은 역전됩니다. 거만을 떨며 자랑을 일삼던 자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다가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스바냐야훼께서 숨겨두시다/야훼께서 소중히 간직하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바냐 예언자는 모든 사람이 힘을 추구하고 힘에 굴복할 때 그런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숨겨놓으셨다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도성 안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남길 것이다. 이스라엘에 살아남은 자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간사한 혀로 입을 놀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잘 먹고 편히 쉴 것이니,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3:12-13)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남은 자들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기쁨에의 초대입니다. 주님의 징벌이 그치고, 원수는 쫓겨나고, 왕이신 주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시니, 더는 해를 받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야훼의 이름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3:17)

 

어지럽기 이를 데 없는 시대,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된 시대, 하나님은 뒷전이고 욕망이 신처럼 군림하는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별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잉태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흉포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는 그 남은 자들을 통해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넋 놓고 기다리면 안 됩니다. 진실한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내용을 우리 삶 속에서 앞당겨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다면 지금 하나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서 실현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비판만으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연대하여 서로에게 힘을 주어야 합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이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긴 싸움에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생각만 해도 힘이 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멋진 일에 동참하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내는 빛은 미약합니다. 하지만 그 빛이 하나둘 늘어날 때 세상은 밝아질 겁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번 대림절 동안 우리 내면에 환한 별이 밝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