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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7. 4]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07-07
조회수 19
첨부파일
p210704_질그릇 1단.pdf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3나는 이 사람을 압니다. 그가 몸을 입은 채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4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5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두고서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내가 자랑하려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삼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7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2-10)

 

바울 친서 마지막 증언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인 오늘, 성서일과가 제시한 서신서 본문은 고린도후서 122~10절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일과(Revised Common Lectionary)는 교회력의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까지 더는 바울의 친서(親書)에서 본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바울의 친서를 본문으로 하는 마지막 증언이 되겠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사도 바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증언해 온 저로서는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본문이 하필 이 말씀이어서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다룰 주제도 많고, 하고픈 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자랑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은 이상한 자랑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14년 전 신비 체험을 소개하는데, 그는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절에서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공동번역)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바울이 말한 이 사람은 바울 자신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 5절에서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두고서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비 체험을 한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병약한 자기 자신을 자랑합니다. , 강점이 아니라 약점을 자랑합니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바울의 적대자들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활동한 바울의 적대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바울은 신비 체험이 없었다고 헐뜯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4년 전 자신의 신비 체험을 언급한 것입니다.

강점이 아니라 약점을 자랑했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를 구원자라고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이는 바울의 동시대인들에게 형용모순이며 어불성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22유대 사람은 기적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4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고전 1:22-25)

 

바울은 당시 세상이 요구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기적과 지혜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기적과 지혜를 바라는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는 약함과 어리석음일 뿐이고, 세상을 변혁하기는커녕 자기 하나 지켜내지 못하는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가 일어난 곳,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난 곳이 십자가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승리를 최고로 여겼던 당대의 상식과 배치됩니다. 승리를 통한 평화를 추구했던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상충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승리가 아닌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 힘없이 달린 예수가 진짜 구원자다, 그리스도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승리를 통한 (로마의) 평화거짓평화고 정의를 통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참 평화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요, ‘힘의 추구가 아니라 힘의 포기, 힘 추구의 초월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선포한 이 진리를 아멘으로 받아들이십니까? 여러분의 머리로 시인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몸으로 삶으로 고백하며 삽니까?

 

십자가의 도()와 상선약수(上善若水)

저는 지난 수년간 역사적 예수역사적 바울을 가르치면서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번 더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성경 풀이가 아니라 노자(老子)󰡔도덕경󰡕에 나오는 ’()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도덕경󰡕은 제가 성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크게 영감받은 책입니다.

󰡔도덕경󰡕 8장을 보면,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 나옵니다. 풀이하면 “‘상선’(上善)최고의 선은 약수’(若水)물과 같다, 즉 가장 선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도덕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물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처럼 된다든가, ‘에 맞춰 살아간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도의 최고 상징입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물 없이 삶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 없이는 아예 처음부터 삶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은 실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또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정결케 해 주기도 합니다. 세례는 물의 이런 정화작용을 반영한 종교의식입니다. 그런데 물이 더러운 것을 씻어 준다는 것은 남의 허물을 대신 떠맡는다는 뜻입니다. 물에다 더러운 걸레를 빨 때, 물은 걸레를 나무라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세상 허물을 대신 지고 가는 셈이고, 이렇게 세상 허물을 짐으로써 세상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물은 아무것과도 겨루지 않습니다’(不爭). 즉 물은 자기의 도움을 받는 것들과 다투거나 겨루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이 장미를 아름답게 피게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장미의 아름다움을 찬탄합니다. 그러면 물이 밑에서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장미가 필 수 있었겠소? 그리니 장미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기 전에 내가 한 일을 인정해야 할 것 아니요하는 말로 장미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또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곳,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자기를 낮추면서 흘러갑니다. 흘러가다 막히면 돌아가고, 돌아갈 곳이 없으면 천천히 채워서 넘어가고,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흘러갈 뿐입니다. 모두가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안달하지만, 물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낮은 데로 임할 뿐입니다. 군림하려 하지 않고, 묵묵히 섬기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함이 없는 함’(無爲之爲)을 이룰 뿐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물입니다.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습니다. 물은 도무지 뻣뻣하게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래지고. 어디 그뿐입니까? 추우면 굳고, 더우면 풀어지고, 뜨거우면 날아가고. 이렇듯 도무지 자기를 내세우거나 주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물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해 빠지고 물러빠진 물, 부드럽기 그지없는 없는 물이 세상에서 가장 딱딱한 것, 바위나 쇠붙이 같은 것을 이깁니다. 물은 폭력 같은 것을 쓰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 방식대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뿐인데도, 그것은 바위나 쇠붙이처럼 단단한 것이라도 녹이고 썩히고 닳게 하고 부수고 침투하고 분해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드럽고 여리기 그지없는 물이 단단하고 뻣뻣한 것을 다 이기고 물리칩니다. 바위도 뚫고 쇠도 녹일 뿐 아니라, 큰 배도 들어 올리고 산도 옮깁니다. 이처럼 물은 약하고 부드럽지만 결국에는 강하고 굳센 것을 모두 이깁니다.

많은 사람은 물처럼 되는 것이 손해 보는 일, 어리석은 일, 비능률적이며 전시 효과도 없고 화려하지도 못한 일이라고 여겨 물처럼 되기를 꺼립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기를 비우고, 꾸준하고 조용하게, 성실하고 정의롭게, 오직 섬기는 자세로 움직이는 물, 누구와도 겨루는 일 없이 자기를 끝까지 낮추는 물, 이런 부드럽고 약한 물이 결국에는 굳고 강한 것을 다 이깁니다. 물처럼 자기를 낮추고, 물처럼 부드럽고, 물처럼 약하고, 물처럼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튼튼하게 하고,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일입니다. 낮춤으로써 올라가고 죽음으로써 살게 된다는 겸비와 승귀’, ‘죽음과 부활의 변증법적 진리를 물이 입증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고, 즉 가장 선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또 약함과 패배와 힘없음의 상징인 십자가가 참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이 축복이다

십자가의 도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고 우리를 교훈합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약함이 곧 강함이다라는 메시지와는 조금 을 달리합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이다”(For when I am weak,then I am strong)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약함이 곧 강함이다라는 구원의 진리를 바탕으로 자기 인생의 경험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약점으로 자기 몸의 가시를 말합니다. 여기서 가시란 그의 고질병을 가리킵니다. 그 병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바울의 삶과 선교활동에 큰 지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묘사했습니다. 당연히 바울은 하나님께 그것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은 바울의 기대와 180도 달랐습니다.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라는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은 바울이 받은 응답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였다고 전합니다. 제가 은혜’(grace)의 원어는 카리스’(χάρις), 이 단어는 선물’(gift)이란 뜻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받은 기도 응답은 무엇입니까? 그의 지병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병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난과 시련이 은혜요 선물일 수 있습니까? 고난과 시련은 당연히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입니다. 그런 장애를 만났을 때 우리는 바울처럼 당연히 그 고난과 시련을 물리쳐 주십사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응답을 받았을 때, 그 응답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응답은 다 우리에게 최고로 선하고 옳고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A를 청하면 A를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A를 청했는데 B를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A를 청했는데 아무것도 안 주시는 것입니다. 즉 무응답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B를 주시는 것과 무응답도 내게 최선의 응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넷째, A를 청하던 나를 변화시켜서 이제 더는 그것을 청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받은 응답은 네 번째에 해당합니다. 고난이나 시련인 줄 알았던 자신의 병이 사실은 하나님은 은혜요 선물임을 알게 되어 더는 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 고난이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십니까? 조개가 깊은 바닷속으로 기어 다닐 때 모래알이 조개에 들어갑니다. 그 부드러운 살 속에 모래가 들어가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조개는 즙을 짜내어 모래알을 감쌉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오랜 세월을 계속해서 조개 즙이 쌓이고 감싸면 마침내 둥근 진주가 된답니다.

가시가 여러분을 찌릅니까? 그분은 지금 진주를 만들고 있다고 여기십시오. 사실 우리는 모두 엄청나게 값진 진주를 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는데 왜 우리에겐들 가시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중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도 때로는 가시 같은 존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가시로 인해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그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조개 속에 들어온 모래라는 가시가 없다면 진주는 결코 탄생하지 못하듯이, 시련과 역경이라는 가시 없이 우리 인생의 진주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시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영구적일 때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의 지병은 ()영구적이었습니다. 또 바울 외에도 우리 주변에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이 많습니다. 이지선 자매가 그랬고, 고 강영우 박사가 그랬고, 닉 부이치치(Nick Vujicic)가 그랬습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이지선 자매는 교통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던 사람입니다. 호주 출신인 닉 부이치치(Nick Vujicic)라는 사람은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고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때 사고로 두 눈을 실명한 사람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충격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자신을 돌보던 누나는 과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겪은 고난 때문에 살 희망을 잃어 자살을 생각하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마침내는 고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자기 삶이 아름다워졌노라고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강영우 박사의 간증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실명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승리자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를 통해서승리했다고 고백합니다. , 나는 실명이라는 고난의 십자가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실명 때문에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의 나 된 것은, 나 자신도 그리고 남들도 모두 하나님의 저주라 여겼던 바로 그 실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있어서 실명은 하나님의 저주도, 고난의 십자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요 기회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악조건호조건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찬송가 3732절은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라고 노래합니다. 때로 우리의 약점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지금 이런저런 가시에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그 가시는 제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가시는 어쩌면 더 큰 은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더 좋은 생의 조건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가시가 은혜요, ‘고난이 축복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그런 믿음의 사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