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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6. 27] 형평을 이루라!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06-27
조회수 46
첨부파일
p210627_질그릇 1단.pdf



형평을 이루라!

 

7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8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성을 말함으로써, 여러분의 사랑도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9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0이 일에 한 가지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여러분은 지난해부터 이미 이 일을 실행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11그러므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원해서 시작할 때에 보여준 그 열성에 어울리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12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13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14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5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후 8:7-15)

 

헌금설교?

성서일과표가 제시한 오늘의 서신서 본문은 고린도후서 87~15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증언한 첫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후서는 독립된 한 통의 편지가 아니고, 적어도 세 통 이상의 편지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통의 조각 편지가 바로 8~9장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헌금모금을 위해 작성된 일종의 행정 서신입니다. , 그 주제가 헌금입니다.

제가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가장 다루기 꺼리는 주제 중 하나가 헌금입니다. 웬만하면 헌금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헌금에 대해서 전혀 설교하지 않는 것도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혀 안 하면 교인들이 언제 어디서 헌금에 대해 바른 안내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본문 말씀이 헌금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데, 헌금설교를 안 하는 것도 정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헌금 얘기를 했나 확인해 봤습니다.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던 2016년 하반기에 <새 신앙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주일 오후 성경공부를 했을 때 마지막 특강으로 봉헌의 자세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201811월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문제를 다룬 본문(12:38-44)이 주어졌을 때 봉헌(奉憲)”이라는 제목으로 증언했습니다. 2~3년에 한 번은 너무 자주도 아니고, 또 너무 하지도 않은 적당한간격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 헌금에 관한 본문이 주어진 김에 헌금에 관해 증언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을 헌금해야 하는가?

무거운 주제이니만큼 봉헌의 자세라는 특강에서 했던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어느 날 세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께 얼마만큼을 헌금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먼저 땅에 길게 선을 긋고 제가 가진 돈을 전부 공중으로 던집니다. 그리고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왼편에 떨어진 돈은 제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썩 좋은 방법은 아니군요. 저는 땅에 원을 그려 놓고서 제 돈을 공중으로 던집니다. 그래서 원 안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원 밖의 것은 제가 챙깁니다. 돈이 좀 더 필요한 날에는 평소보다 원을 조금 더 작게 그리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다 바칩니다.” 그러자 앞의 두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습니다. “가진 것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다고요? 러면 당신은 무슨 돈으로 생활을 합니까?” 세 번째 사람이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로 살지요.” “은혜요? 그 은혜는 어떻게 내리는데요?” 두 사람이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사람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공중으로 하나님을 향해 제가 가진 돈 전부를 던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 제가 가진 것 전부를 당신께 다 바칩니다. 받으십시오. 하지만 땅에 떨어지는 것은 저에게 내리시는 은혜로 알고 제가 잘 쓰겠습니다.”

 

헌금은 무엇을 위해서하는가?

이 이야기는 그냥 한번 웃자고 누군가가 지어낸 유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나온 하나님께 얼마만큼을 헌금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두 가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 이 질문은 헌금을 누구에게하는가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그 답은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헌금은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헌금을 하나님에게 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둘째, “얼마만큼을 헌금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헌금을 세금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헌금은 교회에 내는 세금이 아닙니다. 헌금을 세금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납세자가 절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듯이 헌금하면서 잔머리를 쓰고 요령도 피우게 됩니다. 세전(稅前) 총수입(gross)에서 십일조를 할 것인지, 세후 실수입(net)에서 할 것인지, 예금을 찾았을 때 전체 금액에서 할 것인지, 이자에 대해서만 할 것인지 등등 말입니다. 또 헌금은 세금이 아니듯, ‘뇌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반면 뇌물은 앞으로 돌려받을 것을 전제하고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 돌려받을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헌금이 아니고 뇌물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얼마만큼을 헌금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큰 잘못된질문입니다. 그래서 봉헌(奉憲)”이라는 제목의 증언에서 저는 헌금과 관련한 올바른질문은 헌금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답으로 헌금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고 기꺼이 바치는 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하셨던 일을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계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돈이 바로 헌금입니다. 즉 헌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헌(奉獻)의 일부입니다. ‘봉헌받들 봉()’ 자에 바칠 헌()’ 자를 씁니다. 문자 그대로 받들어서 바치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받들어서 바칩니까? 공동의 선, 공동의 정의, 공동의 평화, 공동의 행복을 위해서 나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드리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따라서 봉헌의 일부인 헌금은 하늘이든 땅이든 어디인가에 예금해서 축적하는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와 해방과 평화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해 소비하는 돈입니다. 그러므로 헌금하는 사람은 그 돈을 어떤 식으로든 돌려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형태의 대가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헌금에 대가가 있다면, 그것은 공공의 정의와 평화가 증진되고 공공의 행복이 확산하여, 다 같이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바쳤으니 안 바친 사람에 비해서 더 많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헌금도 아니고 봉헌도 아닙니다. 헌금은 대가를 바라고 주는 뇌물도 아니고, 주었으니 받을 것을 기대하는 거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는데 헌금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서 더 많은 복()을 받고 화()를 피하려고 드리는 돈이 아닙니다. 헌금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따르려는 예수 따름이들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드리는 돈이고 시간이며 땀이고 눈물입니다. 헌금은 드리고 나면 기억에서 지워야 하는 돈입니다. 그것은 공공의 선을 위해, 공공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소비되어, 어디선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남을 위해서 나의 일부든 전부든 바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에게는 봉헌이든 헌금이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헌금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더 큰 행복을 위해서이고 자기가 더 많은 복을 받겠다는 것이, 그것은 헌금도 아니고 봉헌도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헌금이란 말에는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동선을 위해서, 공동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헌금은, 더 넓게 보아 봉헌하는 삶은, 현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하나 잘 되자고, 남보다 더 잘 살고 성공하고 출세하는데 전심전력하는 세태를 역행해서 공공의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풍조를 역행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치를 거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면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서울제일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서울제일교회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아무 뜻도 없고, 이를 위해 헌신하지도 않고, 공공의 정의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고, 이 교회에 봉헌할 까닭도 없을 것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뭔가를 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정성을 다해서 봉헌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교회가 제대로 예수의 교회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헌금(獻金)이 봉헌(奉獻)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헌금은 못 해도 봉헌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헌금을 못 해도 우리는 기도로 봉헌할 수도 있고, 봉사로 봉헌할 수도 있고, 출석으로 봉헌할 수도 있습니다. 봉헌의 방법은 많습니다. 봉헌은 돈만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바치는 것도 봉헌이고, 재능을 바치는 것도 봉헌이고, 열심을 바치는 것도 봉헌이고, 희생을 바치는 것도 봉헌입니다. 그러니 헌금 못 했다고, 또는 적게 했다고 주눅 들지 마시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가진 것으로 봉헌하며 사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시간과 땀과 눈물을 드리십시오. 또 큰돈을 헌금했다고 자신이 할 봉헌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형평을 이루라!

먼 길을 돌아와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란 가난하고 약한 공동체를 돕기 위해 헌금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 일을 가리켜, 구제의 특권’(8:4)이요, ‘은혜로운 일(8:6. 19) 또는 활동(8:7)이요, 서로를 향한 선물이요(9:5),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봉사’(9:12)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은 새번역 성경이 특권은혜라고 번역한 단어의 원어가 카리스’(χάρις)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카리스은혜’(grace)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선물’(gift)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95절에서 쓰인 선물의 원어는 카리스가 아니고 유로기아’(ελογία)로 축복(blessing)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헌금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가 없이 은혜를/선물을/축복을 주셨으니, 그 모범을 좇아 우리도 남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인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범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온 것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당하고 마침내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을 의미합니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 지금 내가 사는 것, 내가 이런 축복의 생을 누리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고 가난해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헌금을 바치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졌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여 응답으로 드리는 감사의 행위입니다. 또한, 우리가 헌금을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나도 남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가난하게 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할 단어는 912절에 쓰인 봉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원어는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ία)인데,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실 전례로서의) 예배(service)입니다. 그런데 레이투르기아는 그리스어로 백성을 의미하는 라오스’(laos)을 의미하는 에르곤’(ergon)의 합성어로 백성의 백성을 위한 봉사를 뜻합니다. 즉 사랑의 실천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헌금이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임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3절과 14절에 헌금과 관련해 평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의 원어는 이소테스’(ἰσότης)인데, 직역하면 평등’(equality)이나 공평’(fairness)입니다. 이렇듯 헌금은 믿는 사람들 간의 연대를 의미하고, 또한 그리스도인 간의 평등을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독교적 이상을 대변합니다.

바울은 그런 이상적인 관계의 실마리를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 생활을 할 때 먹었던 만나에서 찾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인 만나는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16:18) 놀라운 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해방공동체로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예시해주는 하늘의 징표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는 달리, 인류는 많이 거두면 남고, 적게 거두면 모자라는방식으로 문명을 전개했습니다. 로마의 삶이 그것을 대표하는 문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세속의 삶과는 다른 길,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함이 없는 삶의 길을 열어가라고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9:1-15).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앞서 헌금은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입니다. 서로 돕고, 나누고, 섬길 때 그런 세상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헌금은 더 거둔 자는 나누고, 덜 거둔 자는 후원받아 누구도 부족하지 않은 넉넉한 세상을 만들자는 믿음과 헌신의 행위입니다. 여기서 이소테스는 요즘 유행하는 공정한 경쟁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한 결과’, 분배정의에 그 방점이 있습니다. 그래야 능력에 상관없이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밥상공동체가 그랬고, 바울의 에클레시아(ekklesia)가 그랬습니다.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원래 그리스 시대에는 시민들의 모임민회’(民會)를 뜻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시민에는 여자나 노예, 그리고 야만인(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례를 받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서 예수 운동공동체 안에서 살게 되면 여자와 남자, 주인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모두 형제와 자매가 되어 서로 돕고 도움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기 에클레시아를 넘어 다른 에클레시아까지 이소테스를 실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넘어 예루살렘 교회까지 이소테스이 범위를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이제 이소테스의 바통(baton)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 내에서, 그리고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다른 교회들과 이소테스를 이루기 위해 지금보다 더 노력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여기서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앞서 헌금이 봉헌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고 했듯이, ‘이소테스는 물질적인 상호부조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물질적인 후원을 했지만, 그 반대는 물질적인 후원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후원이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가 받은 은혜를 주고받으며 이소테스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들의 헌금 생활, 봉헌 생활이 이소테스를 이루는 일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