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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6. 20] 은혜, 구원, 초월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06-20
조회수 38
첨부파일
20210627_1단 수정본.pdf



은혜, 구원 그리고 초월

 

1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2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3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 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4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5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6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8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11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12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13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고후 6:1-13)

 

역사적 바울의 도전을 마치고

지난 수요일로 총 16회에 걸쳐 진행된 역사적 바울의 도전성경 공부가 종강을 했습니다. 그동안 매주 수요일 오전반과 오후반에 각각 10명 내외가 꾸준히 온라인 으로 참석했습니다. 또 수업에는 참석하지 못했거나/않았지만, 유튜브로 강의를 들은 사람이 100명 이상이니 우리 교우 대부분이 시청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강의를 다 마치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접하니 바울의 생애가 생생하게 그려져서 감정이 복받쳐서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와 다른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제가 역사적 바울의 도전직전에 했던 성경 공부가 역사적 예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 강좌의 결론은 예수를 믿기만 하지 말고, 예수를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살자는 주장은 낯섭니다. 특히 예수를 산다는 표현이 비문법적이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표현의 상대어로 사용하기 위해, ‘예수의 삶을 산다예수를 산다로 줄여서 사용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를 살자는 주장은 낯섭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인간 대신 죽었다. 인간은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라는 기독교 교리 때문입니다. 이 교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를 살지 않아도 되는 명분과 빌미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면, 인간은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약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인간 대신 돌아가셨다면, 인간은 굳이 예수님처럼 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만약 구원이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지 행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논리가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기만 하지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신뢰성을 상실했고, 많은 비그리스도인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런데 바울은 다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바울을 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한다거나 예수님처럼 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바울처럼 살라는 말 앞에서는 다른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편지에서 이미타티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 즉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또는 예수를 닮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6절에서는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빌립보서 25절에서는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어야만 한다”(we are to become like Jesus)는 말입니다. , 예수를 믿기만 하지 말고 예수를 살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16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11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17절에서도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계속해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바울의 권고 앞에서 우린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습니까! ‘기쁨의 복음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막연한 권고가 아닙니다. ‘내가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입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권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말만 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기 스스로 역할 모델이 되어서 생활로 모범을 보인 후에 비로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가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교만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사니, 너희는 그런 나를 본받아서 살라는 친절한 안내’(guide)입니다. “나도 그렇게 살았으니, 너도 그렇게 살 수 있다선도’(先導)입니다. 어쨌든 방점은 예수 살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은총으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를 살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과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넌센스를 바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은혜, 구원, 그리고 초월

오늘 증언 제목을 은혜, 구원, 그리고 초월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읽고 떠올라서 그냥 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6:1b)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서 은혜’(grace)로 번역된 성경 원어는 카리스’(χάρις)입니다. ‘선물’(gift)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헛된 은혜헛된 선물을 연상하면 됩니다. 주는 사람은 정성을 다해서 주었는데, 받는 사람은 그것이 귀한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합니다. 마치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와 같습니다. ‘nothing’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헛된 선물입니다.

왜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까요? 그 이유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돼지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한데 진주 목걸이가 웬 말입니까! 나에겐 지금 이것이 필요한데 다른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건 값진 선물이 아니라 아무 소용없는 쓰레기입니다. 비록 그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 일지라도 온통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거나 자기중심에만 빠져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절규하듯이 말합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6:2c) ‘지금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다만 지()’이제 금()’으로 구성된 말인데, 영어로 옮기면 ‘only’이고 ‘now’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only now뿐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더구나 내일은 나에게 속한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시간입니다. 오면 천만다행이지만, 안 와도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처리(handle)할 있는 바로 지금에 집중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구원의 때라고 합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이며, 나에게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은혜구원은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실제로 바울에게 그랬습니다. 바울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증언처럼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인지, 아니면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의 증언처럼 자기 삶을 통해 예수를 드러낸 증인들을 통해 부활한 예수를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튼 바울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encounter)으로써 자기 생각, 자기중심에서 벗어났습니다. ? 바리새파 유대교의 믿음에 따르면 부활은 의인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인데,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죄인인 줄 알았던 예수가 의인이었거나 아니면 의인뿐 아니라 죄인도 부활한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부활한 예수와의 운명적 만남은 바울의 생각과 믿음과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교에서 크리스천 유대교로 전향하기에 이릅니다. 이 전향에 따라 그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 로마 제국이 처형한 예수를 주(, Lord)로 믿고 고백하고 따른다는 것은 반역을 의미했기에 그랬습니다. 바리새파 유대교가 죄인, 불결한 자,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로 아는 예수를 의인이요 심지어 메시아라고 주장하기에 그랬습니다. 사방에 적이었고,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습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소아시아에서 겪었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고백합니다.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이어서, 스스로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고후 1:8-9). 오늘 본문 4b-5절도 그가 겪은 고난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겼고, 비폭력으로 폭력을 물리쳤습니다. 이것을 본문 6-8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6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8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실로 그는 예수처럼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어리석어 보였고 바보처럼 비쳤습니다. 그것을 본문 8b-10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8b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 가운데 살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 수 있는 힘,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이런 삶이 정상이고 참이라고 말해도 그것과 다르게 살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세상 가운데 살았지만, 천국 시민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초월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억지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니고, 기꺼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삶을 산 인생 낙오자나 패배자, 루저(loser)처럼 보였지만, 그는 진정한 승리자, winner였습니다. 단 세상의 승자와 달리 ‘(승자) 독식’(winner takes all)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이 그 승리의 전리품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람은 참 신비한 존재입니다. 1988년에 하버드 대학의 연구자들이 한 실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근심이나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마르면서 면역항체가 줄어든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정반대의 경우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환자들에게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침에 있는 면역항체가 뚜렷이 증가했습니다.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할 때는 물론이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자들은 그 현상을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명명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해야 행복할 줄 알지만, 사실은 이타적인 삶을 살 때 더 행복합니다.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과 다른 삶이 가능하고, 또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돈과 인기와 권세가 절대적이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설 땅혹은 비빌 언덕이 되어줄 때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삶의 길로 우리를 초대했고, 바울은 그 길을 뒤따라 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같이 걷자고 초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10)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감사함으로 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6:2c)임을 깨닫는 사람을 쎄오스 디아코노스’(θεός διάκονος),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했듯이 하나님의 일꾼이 살아가는 모습을 9~10절에 7가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살아 있으며,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세속적인 복도 많이 받고, 죽어서도 영생 복락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불행, 즉 화()라고 말하는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살면서 보람과 긍지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면 손해 보고 살아야 합니다.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 어리석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삶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13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11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12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13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바울은 권고합니다. 옹졸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마음을 넓히라고, 마음을 활짝 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새 세상이, 다른 세상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오늘 바울의 권고에 따라 우리 마음을 크고 넓게 활짝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