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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10. 11] 광야를 지나며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10-11
조회수 21
첨부파일
p201011_질그릇 1단.pdf



주님 안에서

 

2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3그렇습니다. 나의 진정한 동지여,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7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십시오. 9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4:2-9)

 

바울의 유언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는데, 빌립보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빌립보서를 바울의 작별 편지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빌립보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울은 에베소감옥에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속주 중 하나인 소아시아지방의 수도였는데, 로마 총독이 직접 관할했습니다.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은 총독의 감옥, 즉 로마제국의 감옥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판결을 기다리면서 군인들과 사슬로 묶여서지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즉결처형이 가능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해 기꺼이 에바브라디도를 파견한, 그리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 가운데 가장 관계가 좋았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자기 인생을 정리하며 마지막 당부를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선생님의 말씀은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죽음 직전에 남긴 유언(遺言)이라면 그 무게는 남다를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받는 은혜가 더 크고, 또 바울의 당부 한 마디 한 마디가 허투루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빌립보서 4장에서 주어졌습니다. 빌립보서는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남긴 유언 중에서도 마지막 당부입니다. 과연 바울은 무엇을 마지막 당부로 남겼을까요?

 

같은 마음을 품으라

그 당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남긴 것으로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b)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빌립보 성도 일반에게 남긴 것으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a)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그리고 항상 기뻐하라.”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첫 번째 당부인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일치에 대한 호소입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은 한마음이 되라고 번역했고, 가톨릭 새번역은 뜻을 같이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분열하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 지도자들이, 또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이 두 마음을 품으면, 뜻이 갈라지면 그 공동체가 제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분열의 당사자인 빌립보 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순두게를 도우라고 빌립보 성도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탁의 말 속에 왜 일치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잘 나와 있습니다. 새번역은 바울이 빌립보 성도를 나의 진정한 동지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개역개정은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true yoke fellow”입니다.

여기서 멍에를 같이 멨다라는 말은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메고 논과 밭을 쟁기로 가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적당한 협력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아야 하고, 책임도 똑같이 지는 관계입니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집니다. 한쪽이 이리 갈 때는 다른 한쪽도 이리 가야 합니다. 한쪽은 이리 가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저리 가려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방향을 향해, 같은 걸음걸이로 함께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역자입니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란 바로 이런 관계입니다.

바울은 지금 유오디아순두게를 빗대어 빌립보 성도 전체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의 각 지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true yoke fellow”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손발이 맞아야지 손발이 따로 놀면, 그 공동체는 자기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도 없고, 그 나라를 세상 속으로 확산할 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가 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이 당부는 조금 뒤에 나오는 관용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4:5). 관용(寬容)을 한자어 그대로 풀면 너그러운 얼굴입니다. 너그러운 얼굴은 누군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얼굴일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은 그래야 합니다. 관용이란 나와 다른 견해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는 나와 다른 이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관용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역시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라는 말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또 경부고속도로로 갈 수도 있고, 중부고속도로로 갈 수도 있고, 중앙고속도로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르다틀리다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것은 무의식중에라도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배타성의 뿌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여 외면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볼테르라는 프랑스 사상가는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게 하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불쾌감을 자아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도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관용의 마음으로 다른 이를 대할 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무릇 그리스도인들은 품이 넓은 사람이 돼야 합니다. 바울은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말하면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관용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리를 비은폐성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진리는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나는 사건을 통해서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나는 징표로 관용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바울이 유언으로 남긴 두 번째 당부는 항상 기뻐하라”(4a)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감옥입니다. 그는 지금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여기뿐 아니라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의 각 장마다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밑도 끝도 없이 기뻐하라고 하는 막연한 말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하는 아주 실감 나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추상적인 권면이 아니라 실제적인 간증입니다. 이 점이 작별 편지인 빌립보서의 특징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자신의 말을 바울은 지금 빌립보서를 통해서 몸으로, 삶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쁠 땐 기뻐하고, 슬플 땐 슬퍼하고, 또 화가 날 땐 화를 내곤 합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이 생각대로 잘 되어 가면 기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가 죽고, 신경질도 내곤 합니다. 그래서 이 항상이란 단어가 우리를 주눅 들게 합니다. 이거야 성인군자가 되든지, 아니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 정도는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살아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를 항상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말입니다. 이유야 많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환경과 사람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 형편과 처지가 나를 항상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슬프게도 하고 화나게도 합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자세를 사도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바울에게는 심각한 몸의 질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질병만 없으면 지금보다 더 쉽고 편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사탄의 하수인인 몸의 질병을 없애주십사고 세 번에 걸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 형편과 처지, 즉 자기 환경을 바꾸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사탄의 하수인인 내 몸의 질병은 내 교만을 방지하고자 하는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7절로 10절에 나오는 이 바울의 간증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환경을 탓하지 말고, 편과 처지를 핑계 대지 말고,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지옥이 천국이 된다는 겁니다. 세계가 달리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경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바뀌면 미운이고운이가 됩니다.

 

주님 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같은 마음을 품으라그리고 항상 기뻐하라가 바울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이 두 당부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몸으로 살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둘을 실천했고,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17a절에서는 당당히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서 바울은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17b)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 말고도 바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비결은 두 당부 앞에 붙어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냥은 불가능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는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어떤 상태를 가리킬까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주님 안에서’(in the Lord)는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성령 안에서’(in Spirit),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in the body of Christ)라는 말로 바꿔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표현만 다르지, 다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원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이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생활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른 대안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방식을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교회가 곧 대안공동체이기에 바울은 이 말들을 혼동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세계성만찬주일을 맞이해서 주님 안에서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로 바꿔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말은 혼자는 불가능하지만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말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나 홀로 나와 다른 남과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 되는 것은 힘듭니다. 나 홀로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고 함께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추석을 전후에 큰 일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박성수 권사님을 천국으로 떠나보냈고, 김성훈 집사님 딸 김찬빈 양이 큰 수술을 받았고, 김재훈 장로님이 교통사고로 아직도 의식이 없으십니다. 만약 당사자들이 이 일을 혼자 겪었다면 어땠을까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동행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고,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고, 누군가 나와 같이 따뜻한 동행이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 동행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가볍게 해 줄 수는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공동체는 그런 곳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 되어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 되어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 되어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되어 주는 관계망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 부족함을 채워주고, 내가 과하면 절제시켜주고, 잘못 가면 바로 잡아 주고, 잘 가면 응원해 주는 관계.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내 발등의 불처럼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살펴주는 관계. 우린 그런 관계 속에 있습니다.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입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최초로 각 처소에서 각자 떡을 떼고 잔을 나눕니다. 이렇듯 우리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깝습니다. 우리는 한 주님을 섬기고, 한 주님을 따르고, 한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머리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살리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주님 안에있는 우리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우리를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시기도 하고, 느슨하게 풀어주시기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줄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면 용기가 납니다. 마음이 환해집니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아무쪼록 그 기쁨으로 환란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