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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10. 4] 꿈 이어달리기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10-04
조회수 26
첨부파일
p201004_질그릇 1단.pdf





이어달리기

 

4b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10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12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3:4b-14)

 

바울의 유언(遺言) 및 영적 자서전

빌립보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가 아닙니다. 진짜 마지막 편지는 로마서입니다. 하지만 빌립보서를 바울의 작별 편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빌립보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던 동안에 빌립보서를 썼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112-26을 보면, 바울은 자기가 왜 감옥에 갇혔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감옥이 로마제국의 감옥이었고, 그의 수감순교로 끝날 수 있음을 조심스레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서는 바울의 유언(遺言)’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바울의 중심적인 어조는 감사기쁨입니다. 빌립보서 어디에도 걱정이나 근심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지난주일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2:12)라고 권면했는데, 정작 자기 스스로는 순교를 앞두고도 두려워하거나 떨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도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 朝聞道(조문도) 夕死可矣(석사가의)”란 말이 나옵니다.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울의 영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5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7[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2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은 바울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317절에서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본받으란 말일까요? 우리는 이 말을 과거의 자기 모습을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 모습을 본받으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7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서 새번역으로 소개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번역본인 공동번역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7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자기 모습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은 바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 바울! 이런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잘못은 단어 하나를 오역한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매우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라고 번역한 말의 헬라어 원어는 제미아’(ζημία)인데, 말의 본래 뜻은 손실’(loss)입니다. 이 말을 개역은 ()’, 새번역은 해로운 것으로, 그리고 공동번역은 장해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들의 공통점은 방해되는 것이나 해로운 것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그런 뜻이 아니고, 단지 손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자랑으로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손실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자랑할 만한 것이지만, 현재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과거에 누렸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것이므로 그런 것쯤은 손실로 여겨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좋은 것을 꽉 움켜쥐고 있다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보면 먼저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새것을 움켜쥐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놓고 저것을 잡는 이유는 저것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더 좋아서입니다. 손이 여러 개면 다 잡을 텐데 둘밖에 없어서 하나를 득()하고 다른 하나를 실()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쓰레기로 여기지도, ‘실패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서 그쯤은 손실로 생각해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쓰레기를 내다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마치 쓰레기처럼내다 버렸던 것입니다. 쓰레기가 아닌 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던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있는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 안에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바울에게 더는 과거의 삶이 붙들고 싶을 만큼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도 없이 충만한 삶을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손실로, 쓰레기로 여기고 과감히 버렸던 것입니다.

   

구원은 공짜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만연해있는 신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은 거저다. 구원은 공짜다라는 것입니다. ,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우리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이 신화는 주장합니다. 그리고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바울이 이 신화 창조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구원이 공짜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를 얻기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는지를 말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은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손실(loss)로 계산했습니다(have counted)”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계산하다라는 동사를 완료형 중간태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료형 중간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뜻하는 시제입니다. , 계산은 과거에 이미 다 끝났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으로 완료형 중간태시제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유익했던 것들손실로 계산하는 행위를 바울은 과거에 한 번 하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그 밖의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깁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동사의 시제가 완료형 중간태에서 현재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그가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혹은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다, 손실로 계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때문에 바울은 모든 것을 손실로 계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지식이란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니까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가방끈이 길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인 지식이라는 말은 백과사전식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깊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이 지식은 객관적인 앎’(objective information)이 아니라 관계적인 앎’(relational knowledge)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놓고 그 대상을 위아래나 좌우에서 살펴보아서 얻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데 대해서 사람들이 얘기해 놓은 것들을 머리로 수긍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데서 비롯되는 실존적인 앎’(existential experience)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안 그리스도

그렇다면 바울이 안 그리스도, 바울이 만난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지난주일 본문에서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예배 때 부르던 찬송가를 인용했었습니다.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찬가’(讚歌)가 노래하고 있는 비움의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힘의 추구가 아니라 힘의 포기를 통해,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통해,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을 통해, ‘부유함이 아니라 가난함을 통해, ‘군림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충만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분입니다. 이렇듯 그가 믿었던 그리스도는 자신을 스스로 비우신 그리스도’, ‘텅 빈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리스도를 만나고 관계 맺고 믿었기에,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서 자기 자신의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도 존귀해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 너무나도 기뻤고, 그 기쁨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자기 인생의 모든 기득권을 다 포기하게 하고도 남을 만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득권들을 철저히 포기하고 버리되,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이 똥과 오줌을 배설하듯이, 아무 미련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 생생한 증거가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이요, 바울은 그런 자기 자신을 다른 이에게 본받으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은 바울을 신앙의 역할 모델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보통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가 좋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도 존귀하다 해도 내 일부를 희생하라면 몰라도 내 전부를 포기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로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나 바울 같은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삶은 예수나 바울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44-46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44"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45"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46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이 비유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보물의 비유진주 상인의 비유는 발견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처분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자만이 그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메시지입니다. ‘일부의 희생이 아니라 전적인 포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왜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죄의식에 빠지게 하실까요?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듯이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살았습니다. 의무 때문에 억지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놀라운 기쁨을 주었고 마침내 그를 변화시켰을까요? 저는 그 답이 바울이 그토록 강조했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예수가 신의 자리를 버리고 성육신하여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는데, 내가 포기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아가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 자기 전부를 희생하셨다는 것은 밭갈이 농부진주 상인이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보물을 위해 올인(all-in)한 것 같고, 그 올인 대상이 나란 말인데, 그런 사랑을 받은 내가 어찌 감히 계속 내 것을 움켜쥐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바울이 만난 예수는 자기 전부를 비우고 버려서 나를 살리신 사랑의 그리스도입니다. 그 사랑을 체험했으면, 그런 사랑의 빚을 졌으면 당연히 믿음으로 응답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어달리기

제가 오늘 증언 제목을 꿈 이어달리기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꿈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현실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은 힘에 기초한 로마의 평화 프로세스가 아니라, 반대로 나눔과 섬김,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처럼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나만이라도 하나님을 도와 세상의 불의를 청소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아직 세상에는 악과 불의가 만연해있지만, 그 청소 과정에 부족한 나를, 자격 없는 나를 하나님이 택해 참여케 하셨다는 사실이 은혜요 기쁨이요 감사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 함께 한다는 것에서 보람과 긍지와 살맛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보니 이렇게 좋으니, 너도 한번 살아보라고, 함께 그렇게 살아보자고 권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꿈은 예수에서 바울로, 바울에서 우리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 가는 길이 서울은 아니지만, 우리는 반대 길이 아니라 바른 길에 들어섰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다가 다 못가면 바턴을 후배에게 넘기면 그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오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그 여정에 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 바울처럼 기쁨과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되는 것입니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지키고, 그 불씨를 전하고 또 전하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그 사명 기쁘고 감사하게 능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