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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9. 27]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9-27
조회수 46
첨부파일
p200927_질그릇 1단.pdf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5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2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2:5-13)

 

두렵고 떨리는 마음?

지난 주일부터 4주 동안 성서일과표는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로마서가 끝났기에, 제 목표는 되도록 쉽게, 그리고 가능한 한 짧게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표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빌립보서 25-13절은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5-11절과 12-13절이 그것입니다. 5-11절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讚歌)입니다. 찬가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본래 초대교회에서 예배 때 부르던 찬송가를 바울이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찬가는 바울보다 앞선 매우 초창기의 그리스도론인데, 바울은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고백한 이 초대교회의 주장에 굴복해서 예수 박해자에서 예수 전파자, 바리새파 유대인에서 크리스천 유대인으로 전향했습니다. 따라서 이 찬가는 초대 기독교’(early Christianity)역사적 바울’(historical Paul)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어지는 12-13절은 18절까지 계속되는 바울의 권면 중 일부입니다. 이 가운데 12절 일부를 인용하여 오늘 증언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증언은 이 제목이 던지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여러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도대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우리가 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만약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데 실패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처벌때문입니다. 이 경우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우리잘하면구원을 이룰 수 있고, 반대로 우리잘못하면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3절은 그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같은 구절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에게 의지를 일으키시고, 나아가 그것을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일입니다. , 우리 구원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우리 구원이 하나님께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되, 인간의 참여가 뒤따라야만 합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주도를 은혜 또는 은총’(카리스, charis)이라고 부르고, 인간의 참여를 신앙 또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본문 13절은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실패에 따른 책임도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지셔야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바울의 실수?

이 질문에 더해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고자 합니다. 제가 3주 전인 지난 96일에 로마서 138-14절을 본문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증언을 했습니다. 그때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는데, 오늘 합니다. 먼저 로마서 138-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9"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3:8-10)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성경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만 언급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에는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이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만언급했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이 실수로 빠뜨린 것일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율법의 최고 전문가인 바울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 없습니다.

실수가 아니라면 그것은 의도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의도적으로하나님 사랑 부분을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율법의 두 기둥 가운데 하나를 자기 마음대로 없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바울은 왜 그랬을까요?

      

다시 듣는 그리스도 찬가

저는 앞에서 던진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 찬가에 있다고 봅니다. 이제부터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 찬가를 찬찬히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들으면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이 찬가가 탄생한 매트릭스’(matrix)입니다. ‘모체’(母體)라고 번역되는 매트릭스(matrix)는 우리가 어떤 것(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배경(background)과 피할 수 없는 맥락/상황(context)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어떤 말이나 글은 반드시 그 말과 글이 쓰인 당시의 시대와 장소 안에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이 그리스도 찬가가 탄생한 매트릭스는 로마제국과 로마의 제국 신학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막강한 군사적인 힘을 통해 세계를 정복했고, 로마의 제국 신학은 승리를 통한 평화를 주창했습니다. 당연히 승리는 힘이 있어야 가능했기에, “승리를 통한 평화힘이 최고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의 최고 정점에는 로마 황제가 자리 하고 있었기에, 자연히 힘의 숭배황제숭배로 이어졌습니다. 나아가 황제숭배는 황제의 신격화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신적인 존재, 즉 하나님이었으며, 누구나 경배하고 복종해야 할 주군이요 주님(Lord)이었습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 찬가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2:6-11)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찬가가 예전과 다르게 들렸습니까? 바울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한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는 바로 로마 황제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제국 신학에 의해서, 신적인 존재, 주님,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분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찬가는 그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우리는 힘의 추구가 아니라 힘의 포기를 통해,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통해,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을 통해, ‘부유함이 아니라 가난함을 통해, ‘군림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충만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승리를 통한 평화가 아니라, 정의를 통한 평화, 사랑을 통한 평화의 길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길을 앞장서 가신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섬기고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생각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습니까? 도대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우리가 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실패할 경우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공할 경우 이 세상이 우리를 처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듯이, 예수의 길을 뒤따르는 크리스천도 박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케노시스(kenosis) 그리스도론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성경과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은 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사랑은 빼이웃 사랑만 언급했을까요?

그리스도 찬가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했지만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찬가대로라면 하늘에 있는 예수의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이를 요한복음은 incarnation, 즉 성육신(成肉身) 신학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선재(先在)했던 예수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예수의 하늘 자리가 비워졌습니다! 그분은 그 자리를 포기하고 사람들을 위해 사람의 모습을 취했고 종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케노시스’(kenosis), 비움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찬가는 자신을 스스로 비우신 그리스도’, ‘텅 빈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의 두 기둥 중 하나인 하나님 사랑을 생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통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예수를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은 자리를 비우신(케노시스) 하나님입니다. 그는 자기 자리를 비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냥 당신 자리를 지키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비우고 성육신(incarnation)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신의 자리를 버리고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종의 자리까지 낮아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두 기둥 중 하나인 하나님 사랑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이웃 사랑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 가는 구원

이제 제가 증언 서두에서 했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았습니다. 끝으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되, 인간의 참여도 꼭 필요하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전통적으로는 은혜믿음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공부하면서는 참여적 종말론이라는 개념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움의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세상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신학자들이 지금까지 내놓은 답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것은 하나님이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나와 너’ (I and Thou) 중에 로서, 대화와 소통의 동반자요 상대방으로서 사람과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일개 대상이나 객체’(object)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나와 그것’(I and It)으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너곧 당신과 같은 자리에서 관계를 맺는 주체요 동반자로 창조했습니다.

창조의 이유를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창조는 하나님이 당신 영역을 일정 부분 내어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 창조는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어주시기 위해 자신을 비우신 하나님의 자기 비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비워서 그 빈자리를 피조물로 채우셨습니다. ? 그래야 피조물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결정판이 오늘의 본문 말씀인 그리스도 찬가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자신을 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대신 부와 권력 같은 것이 우리를 불안, 염려, 공포로부터 해방해 주리라고 믿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속에서 생의 의미를 묻고 또 물으면서, 우리 실존의 불안정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신앙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28절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를 신뢰해서 당신 자리를 기꺼이 비워주신 케노시스 하나님과 더불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와 다르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요즘 비움의 그리스도를 본받고 뒤따르면세상이 아닌 교회로부터 비난과 탄압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 시대처럼 박해와 순교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지금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비워서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삶의 핸들이 아닙니다. ‘이정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리로 가라고 또는 저리로 가라고 조종(hand)하지 않습니다. 다만 매사에 우리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우리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스스로 찾아가게끔 인도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이정표같은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유를 억압하거나 빼앗지 않습니다. 설령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자유와 선택에 대해서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믿고 기다려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바울이 본문 13절에서 말한 자기 삶으로부터 체험한 하나님 고백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가 쓴 <우리 안의 가짜 하나님 죽이기>라는 책에서 글 한 도막을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은 언제나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가 현실을 바꾸어달라는 요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은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관리, 운영과 유지는 우리 손에 달려있으므로

모든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신과의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만남은 바로 우리를 바꿔 놓을 것이다.

 

부족한 우리를 턱 믿고 당신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창조 세계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