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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9. 20]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 | 김 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9-22
조회수 33
첨부파일
p200920_질그릇 1단.pdf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

 

24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가고 있습니다. 25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라고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1:24-25)

 

세계 곳곳에서, 또 여러 영역에서 포스트 코로나삶에 대한 논의와 주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변화된 상황에서 세계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고,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영역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벌써 이런 주제로 많은 책이 많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다양한 세미나와 포럼,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주최한 코로나 19 이후 세계와 교회라는 세미나의 주제도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쉽게 표현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기독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계에서 교회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변화된 이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기독교 진영에서 이런 논의가 더 뜨겁고 또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코로나19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한국기독교와 교회의 약한 부분과 치부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한국교회의 문제나 목사 개인의 잘못이 종종 방송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고, 또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 이렇게 공개적이고, 대규모적이고, 지속해서 여론에 오르내려 온 국민의 관심(?)을 받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신천지로 대변되는 기독교 이단과 전광훈으로 대변되는 변질한 기독교 신앙의 표출, 그리고 권력과 자본 지향적인 목사들의 충격적인 발언들로 인해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되었습니다. 기독교인과 교회는 이제 비판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인들은 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기독교 외부로부터는 기독교와 기독교인 그 자체에 대한 불신이 늘어나고 있고,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회의(懷疑)와 질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다시 자문(自問)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무엇인가?”“예배란 무엇인가?” “어떤 예배가 참 예배인가?”“기독교의 추락은 어디까지 될 것인가?”, 나아가 더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등등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믿어왔고, 관성적으로 활동했던 신앙 행위들에 대한 고민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진보적인 교회에서든, 보수적인 교회에서든 상관없이, 한국기독교와 교회 전체에 주어진 질문이요, 도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뚫고,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개별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기독교는 더욱 쇠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개혁과 변화를 도모할 때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그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현상이나 결과에 대한 분석과 판단, 그리고 대안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고유한 정체성을 성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예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비대면 상황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고민합니다. 공적 예배보다는 가정예배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말도 드리고, 또 온라인 예배를 더 실감 나게 구성해야 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러나 먼저 예배의 본질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원하시는지?” 등등 예배의 정체성을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이후, 현실 교회의 문제점을 논하면서며, 이런 때 일수록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입니다. 이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원론적이고 또 더디어 보이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한 토대이고 또 방향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에서 저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전적인 이해를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좀 식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너무 당연한 표현이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들어 왔을 테니까요.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면,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라는 주제로 설교나 성경공부 대부분은 몸과 지체’,‘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등을 언급하며, ‘하나 됨’, ‘일치’, ‘협력등등에 관한 내용이었지 그리스도의 몸그 자체에 대한 말씀을 많이 못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이 문장은 마치 하나의 비유요, 은유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도의 몸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오늘 교회에 주는 하나님의 뜻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오늘 사용하는 교회라는 용어는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함께하는 공교회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크고 작은 모임, 신도회, 구역예배, 혹은 갖가지 회의(會議)까지 다 에클레시아에 포함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특별히 모이는 민회’(民會)를 뜻했습니다. 이것을 성경 기록자들이 사용한 것인데요, 그러나 예수 신앙 공동체가 처음 선정해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유대교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히브리어로 모임을 뜻하는 카할이라는 단어를 에클레시아로 번역하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70인역”(Septuagint)회당을 뜻하는 시나고그모임을 뜻하는 에클레시아를 구분했고, 특별한 모임 장소가 없었던 초기 예수 공동체는 자신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유대교가 차용한 것이고, 다시 예수 공동체가 사용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한 에클레시아 차이는, 그들과 달리 예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단어는 같아도, 모이는 이유와 목적, 내용과 현상이 다른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비록 두 세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함께하신다 했으니, 예수 공동체의 에클레시아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뜻하기도 합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는 예수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모임, 예수님이 드러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에클레시아구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에클레시아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당당히 자신의 에클레시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에클레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표현과 고백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에 대한 가장 특별하고, 오래되고, 근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 고백이 현실 교회 생활에서 실제로 체험되고, 실현되지 못한채 문장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둘째치고, 기독교인들에게조차도 점점 더 교회는 기독교라는 종교,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기관(Organization) 혹은 시스템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이는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평신도 교회다. 혹은 공동체 교회 등등 말하고 떠올려도, 어느새 우리는 교회 그러면, 건물이 떠올려지고, 교회를 유지하는 제반 요소들이 먼저 떠올려집니다. 왜일까요? 왜 그럴까요? 도대체 왜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생각도 하고, 고백도 하는데,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실감 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는 제대로, 어쩌면 한 번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실감나게 체험하지도 못했고, 또 그렇게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없이도 신도들의 모임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 공동의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서로서로 예수 그리스도 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너무 강렬해서 이제 교회 자체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다라는 신앙고백문이 형성되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고백을 일으키고, 고백이 더 체험을 강화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문장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체험, 그 현실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아시아에 있는 교회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갈수록, 이 체험과 신앙고백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애초에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있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관계 맺은 그 관계속에서, ‘삶의 나눔에서 스스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체험하고, 고백하고,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상에 드러내야 비로소 교회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체험도 하고, 이뤄가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러면 어떤 모습이 연상 되시나요? 비유인가요 실재(實在)인가요? 아니면 상징인가? 아니면 실체(實體)인가? 그 당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 더욱이 골로새서를 쓴 바울은 아예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는데, 어떤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사용했을까요?

 

저는 오늘 성서적 이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지닌 세 가지 차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차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존재, 한 몸이지만 그 몸이 지닌 뜻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고, 각기 다른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선 성서는 이라는 단어는 육체를 뜻하는 단어로 사르크스와 정신과 인격과 영성을 포함한 총체적인 존재로 소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럴 때는 후자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역사적 예수의 몸입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정원진 목사님이 진행하신 역사적 예수의 도전이라는 성서 학당 강의를 통해 역사적 예수님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배우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몸이라고 할 때 그 몸은 바로 우리 인간과 같은 육체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존재와 활동, 말씀과 사역을 다 함축하고 있는 몸입니다.

예수는 육체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부분을 아주 강조합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육체는 헬라어로 살덩이를 뜻하는 사르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 로고스가 살덩이가 되었다.’ 즉 우리와 같은 육체를 지닌, 현실의 사람, 구체적인 인간으로 한 존재였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적 예수의 몸은 역사적 한 시공간에서 사람과 몸을 부딪치면서 치열하게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뜻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몸은 세상 저편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신 그 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탈() 세상적인, 뜬구름 잡는 말씀과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늘 민중들과 소외된 자들, 약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자비의 손으로 눈먼 자를 치료하셨고, 사랑의 눈빛으로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입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두 다리로 평화의 순례를 계속하셨습니다. 그는 쉼없이 몸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이 움직이는 곳, 만나는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인 예수의 몸을 보고, 만지고,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이것을 요한복음이 이렇게 정리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사르크스로 화육하신 역사적 예수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품은 몸, 소마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임재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역사적 예수님이 움직이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 만약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면 역사적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는 또한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세상과 유리된 모임아니라, 이 세상 안에 거하며, 세상과 관계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평화를 실천해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는 이웃을 위해, 안주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정체될 수 없습니다. 세상과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가장 분노하고, 흥분한 것은 한국교회가 마치 자신들은 세상, 사회와 국가와 동떨어진, 어떤 특별한 집단인 양 행동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서, 코로나의 위협을 무시한 채,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는 모습에 분노하며 비판했습니다. ‘전광훈으로 대변된 반()예수적 집단의 모습은 사랑제일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얼마나 이기적인 집단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그렇게 말씀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몸은 사랑과 진리의 몸으로 움직이셨고,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교회 또한 그리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전하고, 행복을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게토화 될 수 없고, ‘이익집단’(Gesellschat)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역사적 예수의 몸이 그러했듯이, 교회는 교회 그 자체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몸을 기억한다면, 행동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현존, 함께하심,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 교회, 서울제일교회를 보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분명해, 그 교회는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어!’ 이것이 2천 년 전에는 당연했고, 지금도 당연하게 일어나야 할 현상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십자가의 몸입니다.

아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상하거나, 연상할 때,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몸의 모습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십자가에 못에 박힌 채,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영화(映畫)나 영상물의 영향이 큽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이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려고 노력했기에 우리 뇌리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몇 년 전에,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찢기고, 상처나 피가 철철 넘치는 예수님의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지금도 그 영화를 생각하면, 끔찍하게 여겨집니다. 이런저런 영화를 통해 우리는 고통 받은 예수님의 몸을 쉽게 상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연상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몸이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을 통한 구원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구원을 위한 십자가 위에서 고통뿐 아니라, 그의 삶에 배어 있는 고난의 표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십자가에 달리실 때만 고통과 고난을 당하신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몸은 그의 전 삶이 사랑과 구원을 위한 희생과 고난의 여정이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과 희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집약되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얼마나 예수님께서 비난과 핍박과 고통을 당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벼랑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도 했고, 돌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늘 죽임의 세력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공격을 당해야 했고, 죽임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몸의 고난이었습니다. 배도 곯으셨고, 몸은 쉴 곳도, 머리 둘 곳도 없었던 그 몸이 마침내 십자가의 형틀에 달린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십자가의 달린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라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사건 선포하고, 그것을 위해 교회는 기꺼이 희생과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희생과 고난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교회의 운명입니다. 물론 이때 비판과 고난은 교회가 스스로 잘못해서 받는 비난과 질타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 대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평화를 선포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 때, 역사적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가 되었을 맞이하는 희생과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섬길 때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고, 의를 행할 때 비판과 반대에 부딪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교회, 그 교회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지 않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 말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세상에서 비난받고, 무시당하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여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이것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얼마나 그 고난이 클 줄 아셨으면, 그 고난에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용기를 주셨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세상을 이긴 것처럼, 너희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가 몇몇 소수의 교회이긴 하지만 자신의 안위나, 유지를 위해서 얼마나 안달하는지 세상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좀 더 희생하고, 남을 배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야 할 교회가 더욱더 오히려 이기적인 집단으로 판명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되는 십자가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낼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걱정하고 도와주고, 함께 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이 걱정하는 교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걱정거리를 해결해 줘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오죽하면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다녀라! 그래야 우리가 피해갈 수 있으니까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북한 안내원의 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십자가의 몸을 이뤄가는 교회는 세상을 이기는 방식이 권력이나 자본이나 명예 등등의 세속적인 힘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힘, 그것은 예수가 세상을 이긴 방식으로 세상을 이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른 희생과 고난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내며 승리해 가는 당당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런 삶을 바울은 오늘 읽은 골로새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채워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우리에게 남겨 준 고난을 기쁨으로 기꺼이 받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며, 예수의 길을 따를 때 이처럼 당당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세상을 상대한다면 세상은 결코 교회를 지금처럼 가벼이 여기지도,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몸은 단순히 고통과 고난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몸이었습니다. 이를 표현하는 짧지만 아주 중요한 성서 구절이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의 몸을 본 한 백부장은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마태27:54) 십자가의 달린 예수님의 몸과 그의 죽음을 체험한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죽음을 이기신 몸입니다. 그 몸은 더이상 죽임의 위협이나 죽음의 고통에서 짓눌린 몸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겨내고 변화된 신비한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몸은 직접 손을 만질 수 있는 몸이면서 또 그 이상의 몸이셨습니다. 성서에는 그 예수님의 신비한 몸을 물고기를 드시는 몸이면서 동시에 문과 벽을 뚫고 방으로 들어오시는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발견된 과학적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몸입니다. 다만 물질세계에 있으면서 그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몸의 모습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주 신비한 몸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역사적인 몸, 십자가에 달린 몸으로 끝난다면, 그 교회는 여느 단체나 기관으로 멈춰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님 신비를 담지한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신비한 몸이 강력하게 나타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시공간을 초월하시면 우리와 함께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제자들과 함께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강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방 벽을 뚫고 그들에게 찾아가신 그 부활하신 그분을 오늘 우리는 에클레시아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가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신비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현존을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다니요? 이보다 확실한 신비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는다면 이 신비는 지금 지상의 교회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이 변화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계속 변화되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도마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내 몸을 만져 보라!’ 하신 예수님, 그때 도마의 의심은 사라지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제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이룬다면 그 교회에서는 계속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제자들이 새롭게 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는 나를, 우리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또 변화를 일으킵니다. 교회를 통해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옛 몸이 새 몸으로, 낡은 영혼이 새 영혼으로 변화되고, 폭력을 평화로, 불의를 정의로,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신비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신비는 믿는 만큼 드러나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 없어서 변화가 없는 모임·신앙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울제일교회 교우 여러분! 역사적 예수의 몸, 십자가에 달리신 몸, 부활하신 몸, 이 세 모습의 몸은 결국 한 몸입니다. 교회는 이 예수 그리스도 몸이 삼위일체로 드러나는 곳이고, 교회가 바로 이 몸의 삼위일체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입니까?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일으키면서, 우리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희생과 고난도 채워가고,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사건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한 변화를 체험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입니까?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러분은 각 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뤄가고 있습니까?

저는 서울제일교회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그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드러나는 신비한 역사를 계속 에클레시아되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자라고 성숙해 가듯이 서로서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는 하나의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라고 여러분을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골로새서 말하는 일꾼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 섬기는 자입니다. 즉 우리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지닌 세가지 모습을 섬김을 통해 이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남신도주일 예배로 드리는데요, 그래서 특별히 남성 디아코노스 여러분에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갈 수 있는 특권과 은총을 받았다면, 더욱더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고, 참여하는 일에 보다 큰 책임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드러나느냐, 아니냐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은 물론 남신도 뿐 아니라 모든 신도가 함께 지녀야 할 책임입니다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는 디아코노스로 새롭게 결단하고, 거듭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서울제일교회는 지금 예수의 길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라는 목표를 가지고 함께 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움츠러들기 쉽고, 나이가 들었다고 뒷짐을 지기 쉽고, 교회에 젊은이가 없다고 아쉬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 어떤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