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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0년
제목 [9. 13] 한 몸 되기, at-one-ment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9-13
조회수 64
첨부파일
p200913_질그릇 1단.pdf



 

한 몸 되기, at-one-ment

 

1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3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4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5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6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0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12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14:1-12)

 

로마서 복습

제가 오늘 증언의 제목을 한 몸 되기, at-one-ment”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은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집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이었던 지난 614일부터 창조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까지 총 14주 동안 올해 성서일과표’(lectionary)로마서를 서신서 본문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주일이나 제가 아닌 다른 분이 증언한 주일을 제외하고, 여러분은 거의 매주 로마서를 본문으로 증언을 들었습니다. 세어보니 오늘까지 총 9번이었고, 드디어 오늘로 로마서 연속 증언이 끝이 납니다.

어떤 드라마가 끝났을 때, 첫 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한꺼번에 몰아서 다시 보면 그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고, 그래서 그 드라마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로마서 연속 증언을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듣거나 다시 읽어보신다면, 여러분이 로마서를 이해하고 또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좀 길지만, 로마서를 복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로마서 연속 증언을 통해 여러분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로마서의 큰 주제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꿈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will), 하나님의 ’(righteousness), 하나님의 정의’(justice)가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실현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꿈은 죄와 불의로 고통받는 인류를 먼 미래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를 지금여기에서 죄와 불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꿈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악의 종말, 불의의 종말, 억압의 종말, 전쟁의 종말, 폭력의 종말, 제국의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 죄와 악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을 깨끗하게 대청소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던창조의 첫 세상을 회복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대청소는 하나님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가 되어 함께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역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바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at-one-ment) 크리스천들입니다. 여기서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는 입교의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서(to) 죽고, 하나님을 위해서(for)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던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이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세상의 도구, ‘불의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 ‘의의 연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 세상 속에서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해서살아가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에 대해서 죽고, ‘의롭게 변화되어서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 죄, ‘구조 악입니다. 그럼 세상 죄는 무엇이고, ‘구조 악은 또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힘 가진 소수가 힘없는 다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힘을 쟁취해서 남 위에 올라서서 지배하든지, 아니면 힘 가진 자 앞에서 납작 엎드려 복종하든지입니다. 전자는 힘 가진 지배자로 사는 길이고, 후자는 힘없는 피지배자로 사는 길입니다. 전자는 으로 사는 길이고, 후자는 으로 사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놈은 놈이고, 님은 님이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놈은 놈으로 살고, 님은 님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서, 혹은 약한 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서,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내면에 열등의식을 각인시킵니다. 이 열등의식이 지배자의 선전에 의한 의식의 조작이 아니라 운명이요 팔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풍조를 믿고 따르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곧 부활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허위의식 속에서 그 쳇바퀴 속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풍조에 따라 살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려고 교회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 이 세상(this world)은 하나님의 첫 창조 세계와는 다르게 악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악의 청정구역을 만들고, 적어도 그 속에서라도 악의 지배 없이, 세상 풍조에 휘둘림 없이 모두가 으로 주인으로 서로를 돕고 서로가 섬기고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속에서 작게나마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표는 교회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개조, 세상의 변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세상 속에 자기를 복제하고 확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대강의 로마서 요약입니다. 여기에 꼭 보태야 할 것은 대속칭의의 재해석입니다. ‘대속대신 속죄의 준말입니다. 그런데 대속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을 봉건 군주로 생각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의 착각과 아무런 노력과 희생 없이 공짜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합작해 낸 나쁜 신학입니다. 바울은 단 한 번도 대신 속죄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참여하는 속죄를 말했을 뿐입니다. 로마서 121절의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as a living sacrifice)로 드리십시오라는 권고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또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정의롭게 된다라는 말로 바꿔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의롭게 된다라는 말은 절대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는 말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to make a just world) “실제로 내가 ()의롭게 변화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혼자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뜻을 품고 하나님처럼 의로워지고 정의로워질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데 내가 그것에 동참하고 있어서 기쁘다, 또 장차 그 나라가 전면적으로 실현될 것인데 그 희망 안에서(와 내가 그것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기쁘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증언을 준비하면서 지난 8번의 증언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아주 흡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로마서의 핵심을 확실하게그리고 나름 쉽게전달했다고 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 내용이 어려웠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해를 못 해서가 아니라 실천하기가 힘들어서나, 실천하기가 싫어서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은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 몸 되기, at-one-ment

바울은 로마서 1-11장에서 구원의 도()’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그 구원의 도를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앞에서는 이론을 말하고, 뒤에서는 그 이론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예배생활생활예배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예배(禮拜)절 예()’ 자와 절 배()’ 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는 worship의 적절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절을 하고 또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젠가 박노해 시인이 적절히 풀이했듯이, “절 받으십시오라는 우리말은 저를 받으십시오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 나를 낮추어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하나님 뜻에 순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생활예배를 다른 말로 하면 속죄입니다. ? 속죄(贖罪), atone- ment는 세상 죄, 구조 악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세상 뜻을 따르던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 뜻을 따르는 것이 생활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제껏 세상 뜻을 따랐던 것이 나와 남,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문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갈라진 관계의 회복이 속죄요, 하나 됨, at-one-ment입니다. 그런데 제가 at-one-ment하나 됨이라고 하지 않고 한 몸 됨이라고 했습니다. ? 바울에게 하나 됨은 곧 한 몸 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됨, 일치’(一致)획일’(uniformity)이 아니라 화합’(harmony)입니다. 다른 말로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Unity in Diversity)입니다.

바울은 크리스천 공동체인 교회를 몸과 지체로 비유했습니다. 한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지체는 같지 않고 다 다릅니다. 모양도, 기능도, 역할도 다 다릅니다. 즉 다양합니다. 그런데 다양한 각 지체는 우열이 없습니다. 다 귀하고, 다 꼭 필요합니다. 각자 고유한 역할이 있으며, 서로 돕고, 서로 살립니다. 그래서 상생합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교회=커뮤니티

각자도생이라는 살벌한 말이 우리 삶을 요약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참 무정합니다. 이 속에는 우정이나 희생, 돌봄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고립감이 심화할수록 돈이나 연줄에 의존하려는 욕구가 커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몸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나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아끼고 참아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함께의 공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건강하려면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고쳐주려는 마음을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쳐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이들이 늘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사람들을 자기 방식대로 동화시키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폭력입니다. 상대방의 속도를 배려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 깊은 믿음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보고 비웃거나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내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아껴야 합니다. 아직 복음의 자유를 온전히 맛보지 못했기에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저 기다려주면 됩니다. 서두르면 생명은 죽게 마련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가르고 지배하기‘(divide and conquer)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는 이들의 삶은 결합하고 힘을 불어넣기(unite and empower)입니다.

성자 프란체스코는 자기와 함께 하는 수도자들을 나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 ‘나의 복된 형제라고 부르면서, 형제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일화 가운데 인상 깊은 것이 있습니다. 리보 토르토(Rivo Torto)는 이탈리아의 아씨시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은 프란체스코회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수도회 초기에 그는 몇몇 형제들과 양우리였던 그곳에 머물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모두가 밀짚으로 만든 매트 위에서 잠든 때에, 형제 가운데 하나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죽겠다.” 프란체스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밝힌 후 죽겠다고 외친 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한 형제가 자기가 그랬노라며 배가 고파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음식을 준비한 후에 모든 형제를 그 식탁에 동참시켰습니다. 그가 홀로 음식을 먹으면 창피를 느낄까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밥을 굶고,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면서까지 욕망을 다스리려 했던 그들이지만, 가련한 형제를 위해 기꺼이 고행을 중단했습니다. 그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온유한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 안음으로써 그들의 속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공동체라고 부르길 좋아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사실 공동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 ‘community’는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선물만이 선물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공동체를 굳게 세웁니다. 이 시대의 예언자 이반 일리치는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온전한 인간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결국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열된 세상의 일치를 주장합니다. 세상은 이방인과 유대인(1:16-8:39), 유대인들과 크리스천(9:1-11:36), 유대계 크리스천과 이방계 크리스천(12:1-15:21)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을 고발하고,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가장 작은 단위인 교회부터 참된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고, 그 한 몸 되는 모범을 유대인과 크리스천으로, 나아가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확대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 바울은 사회의 변혁, 세상의 구원을 바라는데, 그 방법은 교회처럼 세상과 인류가 몸과 지체의 관계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각 지체가 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으로 존중하고 배려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세상에는 정의가 아니라 불의가, 공평이 아니라 차별이, 환대가 아니라 배척이, 배려가 아니라 무시가, 돌봄이 아니라 착취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선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몸 되기를 통해, at-one-ment, 즉 속죄를 통해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의 모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약육강식 혹은 무한 경쟁이라는 살벌한 구호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는 사랑의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소명입니다. 아무쪼록 이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