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감사의 제목들

11b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 4:11b-13)

특별히 기대가 컸던 2020년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빕니다. 올해를 시작할 때 우리에게는 특별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20이 두 번 반복되는 2020이라는 숫자가 특별했고, 또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몇몇 기념일들이 특별한 주기를 맞이해서 그랬습니다. 6.25 전쟁 70주년, 4.19 혁명 60주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2020년 경자년(庚子年)을 출발하면서 정부와 각 단체는 많은 것을 기획했고, 그것을 통해 남북관계와 적폐청산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모든 행사는 취소되거나 대폭 축소되었고, 그로 인해 여러 계획과 기대가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국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큰 위기 앞에서 불안과 혼돈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해 들어 중장기발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작년 연말에 맞아들인 새 식구들과 함께 교회의 청사진을 만들고 그것을 추진하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오랜 기간 대면 예배가 중단되고 각종 모임을 모이지 못하게 되면서, 많은 계획이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친교와 소통의 축소가 가장 뼈아픕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2020년 한 해를 거의 다 보내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그릇된 습관들

이현주 목사님이 쓴 <밥을 먹는 자식에게>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늘 밥을 빨리 먹는다고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제가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말씀인데,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마지막 구절에서 특별히 가슴이 뜨끔합니다. 고마운 마음이 들 겨를도 없이 그저 바쁘게만 살아온 그릇된 습관을 돌아보게 되어서입니다. 우리의 감사를 막는 그릇된 습관 중 첫째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익숙한 사람이나 물건들에 관해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을 청하는 밤까지, 아니 잠이 든 후에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 덕분에 살아갑니다. 일일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비상시에는 그들의 존재가 크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당장 어쩔 줄 몰라 허둥댑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둘째는 계산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채권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있고, 채무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나친 채무자 의식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자들의 채무 의식은 아름답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사랑의 빚, 은혜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길이 없지만, 그래도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천국의 삶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뭔가를 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자기를 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사람들의 호의를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차리는 이들도 많습니다. 어수룩했다간 이용당하기에 십상입니다. 그러니 계산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받으면 감사하면 되는데, 예전에 주었던 것을 돌려받는 것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나도 돌려주어야 하기에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를 막는 세 번째 습관은 망각입니다. 살다 보면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 인생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오른팔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보내셔서 우리를 끌어내 반석 위에 세워주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 고마움과 감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색되곤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망각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현주 목사님의 <밥을 먹는 자식에게> 2절과 3절 가사는 우리의 그릇된 습관에 경종을 울립니다.

주님을 모시듯 밥을 먹어라

햇빛과 물과 바람, 농부까지 그 많은 생명

신령하게 깃들어 있는 밥인데

그렇게 남기고 버려 버리면

생명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이니라

사람이 소중히 밥을 대하면 그게 예수 잘 믿는거여

밥 되신 예수처럼 밥 되어 살거라

쌀 보리 밀 옥수수 물고기에 온 만물들은

자신을 제단 위에 밥으로 드리는데

그렇게 사람들만 밥 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생명 세상을 열겠느냐

사람은 생명의 밥을 먹고 밥이 되어 사는거여

밥을 소중히 대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라는 말, 남의 희생 덕분에 살고 있으니 너도 희생하며 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 계산하는 마음, 망각이라는 삶의 그릇된 습관,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날 간단하고 명료한 비결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각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2020년 감사의 제목들

제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증언 제목을 “2020년 감사의 제목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계획과 기대와는 많이 엇나간 한 해였지만, 그 속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그렇게 제목을 정했습니다.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이란 시에서 “감사하는 마음―그것을 곧 아는 마음이다! /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 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삶을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삶의 근본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주인이 누구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2020년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한 해였습니다.

대충 훑어보아도 다음과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사람이 멈추니 자연이 되살아났습니다. 하늘이 맑아지고, 강물과 바다가 깨끗해지고, 떠났던 동식물들이 되돌아왔습니다. 평소 사람이 즐비했던 장소는 원래 사람의 터전이 아니었고 다른 주인이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파괴자요, 객(客)임이 만천하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코로나19로 멈추니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대단한 줄 알았던 인간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속수무책인 심히 연약한 존재였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유난히 길었던 장마와 여러 번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등 기상이변 때문에 기후위기의 심각성도 알게 되었고,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지금처럼 살면 수년 내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덤으로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이 선진국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약소국이요 후진국인 줄 알았던 우리가 강소국이고 선진국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나라나 국민도 없다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신천지, 사랑의교회 등으로 인해 대부분의 개신교회가 가짜 기독교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와중에 비대면 예배로 인해 온라인 예배, 온라인 회의, 온라인 성경공부도 찾아냈습니다. 친교의 측면에서 보면 많이 아쉽지만, 건강하지 못한 분이나 지구생태계를 생각하면 미래의 교회를 앞당겨 산 경험이었습니다. 더구나 비대면 국면이었지만 몸의 거리는 멀었어도 마음의 거리 기도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진 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또 비대면 국면에서 놀기만 하지 않고 새로운 일도 많이 했습니다. 교회 리노베이션 공사, 옥상정원 조성이 그것입니다. 더구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새로운 일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경험과 시간들이 김현승 시인이 <감사하는 마음>에서 말한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 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처지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바울의 편지 가운데 늘 저를 울리는 구절이 몇 군데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인 빌립보서 4장 11절로 14절의 말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때도 풍족하게 살 때도 ‘감사’할 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코로나 19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또는 잊었던 감사의 마음을 되찾는 행복을 맛보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처럼 감사의 두레박을 깊이 내려 은총의 샘물을 길어내는 감사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