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감사

13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14이렇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15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17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살후 2:13-17)

다시 추수감사절을 맞아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다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원래 우리 교회는 매년 11월 첫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는데, 올해는 사정상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원래 미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왔고, 미국에서는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올해는 23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그 전 주일인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도시 교회인 우리 교회의 교우 가운데 농사짓는 분이 거의 없어서 ‘추수’감사절이라는 제목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조금 민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半) 농사꾼이 꽤 많아졌고, 더구나 옥상 텃밭에서 우리가 직접 농사지은 채소를 추수감사절 제단에 올려놓으니 더 뜻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건 안 짓건, 우리가 매년 추수감사절을 맞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땅하고 또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하지만 요 몇 년은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기가 참 힘이 듭니다. 작년에는 ‘10.29 이태원 참사’ 때문에 감사를 드리기가 힘들었습니다. 올해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 때문에 감사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문제 때문에 감사 제목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절에 우리는 다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나는 믿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절은 아닙니다. 어디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가 살아온 시절 가운데도 참으로 암울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의 역사가 그 생생한 증거일 것입니다. 군사독재정권의 교회파괴 공작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만 6년간 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예배’를 드려야 했던 기막힌 때도 있었습니다. 우린 그 모진 세월을 참고 견디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참담한 때에도 우리는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독일 쾰른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감옥으로 사용한 지하 동굴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동굴 곳곳에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햇빛도 보지 못한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면서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에서 써 내려간 낙서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무런 희망 없는 절망 속에서도 이 사람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믿음이 그를 살리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그의 삶을 끝까지 숭고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희망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늘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시는데, 실제 세상은 정의가 아닌 불의, 공평이 아닌 차별, 평화가 아닌 전쟁, 선이 아닌 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종말론’입니다. “God will overcome, someday!” “언젠가는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저들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게 하며 그 모진 세월을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앙인은 이런 종말론적 희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지금 당장 그 다른 세상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저는 이 어두운 시절에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가 진정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묵상하다가 이 종말론적 희망을 품은 것이야말로 진정한 은혜요 감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이 비록 성하지만,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 진리 따라 기꺼이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택하시고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내가 남들보다 평안한 것,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더 누리는 것, 이런 것들이 좋기는 하지만 참된 은혜는 아닙니다. 언제든 없어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많은 좋은 것을 가지고 누려도 어떤 하나가 부족하면 다 무너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천하를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이런 은혜를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가는데 내가 안전하다고 어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10.29 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아직도 피 울음을 울고 있는데, 내 자식 무탈하다고 어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가 어려워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난리인데, 내 배부르고 등 따습다고 어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말 ‘좋다’는 ‘돕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또 ‘나쁘다’는 ‘나 뿐이다’에서 왔다고 하고요. 그러니 좋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 신앙인들이 나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 위에 감사

오늘 증언을 준비하면서 묵상을 위해 몇몇 찬양곡을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감사 위에 감사｣란 제목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찬양사역을 하는 민호기 목사님이 지어서 부른 곡인데,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겸손히 올리는 나의 기도 간구보다 감사를 드립니다

응답하심도 거절하심도 기다리라 하심도 그저 감사

감사 위에 감사를 덮을 때 은혜 위에 은혜가 쌓이네

모든 일에 감사 모든 순간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간절히 올리는 나의 기도 간구보다 감사를 드립니다

기쁜 날에도 고통 중에도 주가 일하심을 믿으며 감사

참 은혜로운 가사와 곡조로 이루어진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을 들으며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내용이 너무 개인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도, 응답도, 거절도, 기다리라 하심도” 다 개인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나아가 2절은 “기쁜 날에도 고통 중에도 주가 일하심을 믿으며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 찬양에서 감사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만 일어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일하시고, 난 구경만 합니다.

하지만 ‘종말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집단적인 기다림입니다. 또한, 그냥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참여도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난 구경만 하다가 거저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일하시니, 나고 일합니다. 또 세상이 문제인데, 나만 문제없다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런 감사는 이웃에게 상처만 줍니다. 하나님의 꿈은 특정인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창조 세계 전체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으로 택한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7절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드려야 하는 까닭은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과 테러로 찢긴 이들의 곁이 되어 줄 마음이 우리 속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보면 그렇지 못해도 집단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왜? 나는 부족해도 함께라면 그 부족을 메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울제일교회는 하나님의 꿈을 품은 교회이고, 여럿이 함께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안에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우리는 하나니의 통치에 동참합니다.

그러니 이 어두운 시절에 추수감사절을 맞아 예수를 따르는 신앙공동체와 믿음의 동지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꿈을 함께 이루어가면서, 나와 세상을 바꾸어 가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