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넘어 평화

9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창세기 4:9-10)

요즘 마음이 평화로우신지요?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평화로우신가요? 지난 7월 24일에 향린교회에서 『전쟁 넘어 평화』 북토크가 있었습니다. 그날 한백교회 한 청년이 토론에 참여했는데, 그분은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토론문을 마감 시한에 보내주지 못하셨는데, 한백교회 목사님께 원고를 재촉하지 말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면 그때 서이초 선생님의 죽음으로 모든 교사들의 몸과 마음이 부서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 되면 그분의 토론문 없이 자료집을 인쇄할 생각도 했는데, 다행히 북토크 당일 아침 원고를 주셔서 자료집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토론문에서 그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기후위기, AI로 인한 인간 노동의 무용화, 인공지능, 양극화, 전쟁, 총기사고, 아사, 나날이 줄어드는 출생율, 갑질, 군대에서 죽은 청년, 학교에서 죽음을 택한 교사, 일자리에서 죽어가는 사람, 홀로 남겨지는 노인, 존재 가치의 증명을 위해 일찌감치 경쟁에 던져지는 아이들, 무엇에 대항하여 싸워야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지, 지켜낼 수 있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우리 시대에 평화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평화란 무엇인가?” 그 질문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조금 전에 “마음이 어떠세요? 평화로우신가요?” 물었는데, 아마 많은 분이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다고 답하실 겁니다.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것은 세상이 평화롭지 못해서겠지요. 세상에 평화가 부재하거나 부족한 원인은 다양할 겁니다. 여러 원인 중에 그동안 제가 특별히 주목하며 탐구해 온 것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입니다.

역사적 트라우마란 역사학자 도미닉 라카프라가 주목한 현상으로, 전쟁이나 재난 같은 파국적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트라우마가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후속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신의학자 레이첼 예후다에 따르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자녀들이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부모들의 트라우마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보고했습니다. 전쟁 세대의 트라우마가 전후 세대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사적 트라우마

토머스 머튼은 1948년에 출판한 『명상의 씨』에서 “현대 국가들의 사회정치사를 이해하려면 지옥을 연구하라”고 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에게 20세기 초중반은 지옥과 같은 극단적 폭력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머튼이 한국전쟁에 대해 더 깊이 알았다면, 그는 “지옥을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을 연구하라.”고 덧붙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빨치산 토벌대 9연대 연락장교로서 전쟁을 직접 경험한 리영희는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종교가 상상하는 지옥을 천국으로 여기게 할 만큼 한국전쟁은 잔인하고 참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옥 같은 한반도의 트라우마 발생 장소가 ‘전선’만이 아니라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한국전쟁의 특징 중 하나는 전방의 전선에서 대결하는 군인들만이 아니라 후방 마을의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상호 충돌과 학살이 발생한 내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박명림이 강조한 것처럼 이념을 명분으로 “내전화한 국제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상대를 악마화하면서 절멸시키려는 양상을 띠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의 성격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하나였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면서 체제 간 전쟁을 벌여, 남한에서는 약 50만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고 북한에서는 약 250만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더 참혹한 것은, 한국전쟁이 같은 마을의 민간인 이웃끼리, 심지어 친족과 가족끼리 서로 증오하고 죽인 “작은 전쟁들”의 총칭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을에서의 전쟁들을 들여다본 사회학자 박찬승이 무겁게 묻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는 아직도 마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을에서 벌어진 좌우익 간의 학살은 불과 두세 달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있었던 일은 60년이 다 되도록 마을을 붙잡아두고 있다. 이들 마을은 전쟁의 그림자로부터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전쟁을 겪은 당사자들이 세상을 뜨면 그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 그 그림자가 대물림되지는 않을까.

이 “민간인” 사이의 상호 학살과 그로 인한 전쟁 그림자의 “대물림”은 70년이 지나서도 우리가 고통스럽게 응시해야 할 역사적 트라우마의 가장 깊은 어둠입니다.

제가 한국전쟁이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계기는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그 고통의 봄날 이후 지금껏 저를 괴롭히고 있는 물음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박민규)으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이 왜 대중의 공감과 지지만이 아니라 모욕과 혐오도 받았는가입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이 세월호 참사가 한국인에게 “한국전쟁과 맞먹는 상흔을 남길 것”이라고 했을 때, 저는 그 말을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전쟁의 참상만큼이나 끔찍하다는 비유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공감과 연민의 짧은 봄이 지나가고 그해 여름부터 시작된 정부, 여당, 언론, 교회, 우익 집단의 전 방위적 유가족 혐오와 공격을 고통스럽게 목격하면서, 자식 잃은 부모와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이들의 성난 얼굴을 바라보면서, 정혜신의 통찰을 세월호 이후의 사회적 상황이 전쟁의 상황과 같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 안의 타자인 사회적 약자, 소수자, 희생자에 대한 공격은 생존주의, 경쟁주의,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의 비인간적 반응인데, 그러한 비인간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바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적폐가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통치 원리와 규율을 “IMF 모범생”으로 불릴 정도로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한국인의 몸과 마음에 공포의 덩어리로 박혀 있던 역사적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즉 전쟁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남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살길부터 찾아야 하고, 홀로 생존하려면 언제 어디서나 소용되는 물질을 소유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남과 경쟁하거나 남의 곤경을 모른 척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국인에게 내면화시켰고, 그것이 “한국전쟁과 맞먹는 상흔”의 세월호 참사 앞에서도 우리의 공감 능력을 마비시켰던 것이 아닐까요?

박명림은 “최고수준의 폭력이 강제한 생사 투쟁, 완승완패 추구의 전쟁체험은 남과 북 각각에게 전체 우선주의와 함께, 타협과 공존의 사회질서 및 사유체계를 제거하였다.”라고 합니다. 이를 그는 “전쟁 속의 삶에서 전쟁 같은 삶으로[의] 전이”로 표현합니다. ‘전쟁이 일상’이었던 세대의 트라우마가 ‘일상이 전쟁’인 전후 세대의 트라우마로 전이 또는 유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전쟁 같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한국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마을의 “작은 전쟁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나뉘지 않았습니다. 전쟁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가해자였고 피해자였습니다. 마을에서의 학살은 대부분 알고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대면 거리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더 잔혹합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을 잔인한 가해자로 둔갑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박찬승은 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은 전쟁 이전부터 축적되어온 다양한 갈등—신분·계급 간, 친족·마을 간, 종교와 이념 간―이 “국가권력의 마을 개입”으로 폭력화되면서 발생한 내전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국가권력에 조종당한 가해자들은 그들이 죽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빨갱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1954년 5월, 전쟁이 멈춘 지 불과 1년 만에 출판된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는 국가권력이 어떻게 폭력을 부추기는지를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도농민위원회에서 나온 ‘캡 쓴 사내’가 ‘개털오바청년’에게 말합니다. “동무, 창의성을 발휘하시오.” 그리고 ‘반동 지주’들을 죽이러 갈 때 “이 부락 저 부락 사람을 반반씩 섞어서” 보내라고 알려줍니다. “작은 전쟁들”의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었고 그래서 더 참혹했습니다. 서로의 개인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같은 마을 사람들이 더 적극적인 고발자가 되고 살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사이의 학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세대만이 아니라 전후 세대의 삶에도 지속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체험담 연구를 해온 신동흔은 “전쟁체험을 통해 의미화하고 내면화한 현실 인식들이 전후 한국사회를 움직여온 일종의 ‘시대정신’ 구실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전쟁 체험자들의 구술 작업을 토대로 분류하여 분석한 전쟁 시기의 현실 인식이란 “내가 살고 봐야 한다”, “어떻게든 힘을 기르고 ‘빽’을 가져서 억울함을 겪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아는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신동흔은 이처럼 전쟁 과정에서 “체화된 신념”은 “‘세상을 산다는 일이 하나의 전쟁과 같은 일’이라고 하는 인식을 내면화시켰다”고 분석합니다. 한동안 ‘Hell-조선’으로 불렸던 한국사회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각자도생의 개인주의, 경쟁적 생존주의, 상호불신과 같은 사회적 병리 현상은 한국전쟁의 집단적 지옥 경험에서 생긴 역사적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벨의 핏소리

전쟁 당시의 남과 북은 서로에게 가해자면서 피해자였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카인’이면서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으로 남았고, 정전 후의 남과 북은 전쟁 시기의 적대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이념화함으로써 유지·강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당사자들의 ‘가해자성’은 부정되고 오직 ‘피해자성’만 부각되었습니다. 학살당하고 파괴당한 사건만 기억하고 학살하고 파괴한 사건은 망각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살아남은 자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전 이후 남한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쟁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빨갱이’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국군이나 우익 세력에게 입은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은 자신이 ‘빨갱이’였음을 자인하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죄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숨겼습니다. 심지어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의 신념을 내면화했습니다. 4.3 사건에서 살아남은 제주 청년들이 해병대에 대거 자원입대하고, 영남의 피학살자 가족이 반공 정치세력을 지지해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침묵과 자기부정의 대가로 얻는 것은 생존일 뿐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치유되지 못한 전쟁 트라우마는 피해자들에게 더욱 깊은 상처와 원한으로 내면화되었습니다.

국가폭력은 학살 피해자의 자기부정만이 아니라 자기분열도 강요했습니다. 김동춘은 “부모나 형이 실제로 좌익 활동을 했다가 학살당한 사람들은 아예 유족 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설사 나타나더라도 자신을 순수한 양민이라고 생각하는 유족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한 예는 좌익 혐의가 있다고 의심당해온 〈국민보도연맹〉 피해자 유족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피해자 유족 대부분은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피해자의 자기부정과 자기분열은 민간인 피학살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인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상흔이며 증거입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라카프라가 강조한 것처럼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몸과 마음에도 상흔으로 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인간이 인간을 죽였다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결코 잊힐 수 없는 극단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간 학살은 한국인의 집단영혼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분단 고착화에 따라 지정학적으로 사실상 ‘섬나라’가 되어버린 남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계속해서 한 마을, 한 도시에서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고립된 ‘섬’에서 화해와 치유 없이 공존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해자는 인간이 아닌 ‘빨갱이’를 죽였을 뿐이라며 죄의식을 지워버렸고, 피해자는 생존을 위해 가해자의 신념을 내면화한 채 수치심 속에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어두운 동굴 속에, 깊은 골짜기 속에, 비행장 활주로 밑에 묻혀 있던 아벨의 피가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 사회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모든 죽은 자를 위한 애도 : 제주 하귀리 영모원

역사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정신과 의사 노먼 도이지는 “심리치료는 유령을 조상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는 여수와 순천과 제주와 거창과 노근리와 신천에서, 한반도 전역의 무수한 마을에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모든 사람들의 유령을 애도하고 조상으로 바꾸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그들이 ‘빨갱이’나 ‘반동’이 아니라 “순수한 양민”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애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애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유령에서 조상으로 바뀌게 되고, 그래야 그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전쟁에서 죽은 모든 조상을 애도하는 화해와 치유의 통합서사가 필요합니다.

제주 애월읍 하귀리에는 영모원(英慕園)이 있습니다. 이 영모원에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했던 이들을 받드는 ‘위국절사 영현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죽어간 이들과 4.3 사건 당시 남로당 무장대에 희생된 군경의 영혼을 기리는 ‘호국영령 충의비’, 그리고 남한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 토벌대의 손에 죽임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4.3 희생자 위령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이 중 무장대에 의한 군경 희생자와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를 한 곳에서 기리는 것은, 분단과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한국사회에서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영모원의 비석들과 제단은 평등한 ‘대칭’을 보여줍니다. 위령단 양옆의 군경 희생자 충의비와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는 좌우 대칭을 이룹니다. 새겨져 있는 내용은 다르지만 똑같은 크기의 검은 비석과 동일한 석질의 받침돌을 사용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높다 낮다, 더 크다 작다 다투거나 서운해하지 않도록 평등한 좌우 대칭을 세심히 구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칭의 중심점이 위령단인데, 영모원에는 위국절사, 호국영령, 4.3 희생자를 위한 위령단이 각각 따로 있지 않고 하나만 있습니다. 죽음의 이유가 무엇이든 하귀리의 모든 죽은 자를 한 조상으로 모시며 한 제단에서 위령하겠다는 뜻입니다. 평등한 대칭의 영모원의 희생자 위령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문익환 목사님은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어처구니 없는 꿈”을 꾸셨는데, 목사님의 꿈이 제주 하귀리에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모든 죽은 자를 위한 애도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탈분단, 탈냉전의 ‘복음’입니다. 사회가 교회보다 더 종교적으로 보이는 시대에, 사회가 선포하는 평화의 복음을 겸손히 경청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