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0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11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12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13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7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18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창 28:10-19a)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잠시 상기해보면, ‘집념의 야곱, 집념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야곱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증언이었습니다. 증언에서 야곱 이야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바꾸려고 했던 ‘집념의 야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인간상으로 ‘변화시켜가는 하나님의 끈질기신 사랑’에 그 초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야곱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은 야곱을 변화시켜가시는 그 구체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주요 내용은 장자권과 이삭의 축복을 쟁탈한 야곱이 결국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도피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27장 46절을 보면 리브가가 이삭을 설득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야곱이 떠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 본래 목적은 야곱을 죽이려는 에서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27:41-42)

그런 야곱이 고향 집인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삼촌 라반이 사는 밧단아람 지역으로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야곱 이야기를 유심히 읽어보면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이 매우 드라마틱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싸우며 태어난 두 아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장자권을 두고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이는 것을 1막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야곱이 그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에서의 위협을 피해 도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1막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2막이 시작됩니다. 무대배경은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향하는 들판으로 바뀌고, 배경음악 분위기도 ‘치열함’에서 ‘스산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야곱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를 더 생생하게 이해하려면 본문의 상황을 장면으로 머릿속 상상해가며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낯선 곳을 향하는 여행길에서는 미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때로 그 신선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자 여행이나 모험을 떠나곤 하지만, 반대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 여정을 감내해야 할 때는 그 길만큼 큰 고역길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 터덜터덜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가 있습니다. 그는 이제껏 엄마 품 안에서 살면서 아직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청년이요, 아직 앳된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 야곱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고독한 길입니다. 자기의 외삼촌이 사는 곳 하란이 그의 목적지였습니다만 그곳은 하룻길에 다다를 수 있는 가까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고향 브엘세바에서 하란에 있는 밧단아람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700km였고, 잘 놓인 길로 간다면 약 1,000km를 넘게 가야 하는 아주 길고 먼 여정입니다. 지금처럼 구글맵이 깔린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숙박을 해결할 여행 정보지도조차 없으니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두려움의 고역길인 것입니다.

해가 이미 서산에 지고 별들이 여기저기서 돋아나기 시작했지만, 야곱은 인가를 발견할 수 없었고 덜컥 겁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더 갈 수 없고 머물만한 인가도 없는 그저 막막한 벌판. 그 벌판과 그리고 깊어가는 어둠뿐이었던 것입니다. 겁에 질린 야곱은 하는 수 없이 벌판 한 모퉁이에 바람이라도 막음 직한 비탈진 곳을 찾아 그 밤을 지새우고 가기로 결심합니다. 어디 따로 이부자리라도 있었겠습니까? 그저 반반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베개 삼아 잠을 청했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했지만, 어찌 그 밤에 쉽게 잠이 들 수 있었겠습니까? 허허벌판 낯선 고장, 인가도, 이웃도, 친구도, 아무도 없는 그저 빈 벌판에 외로이 내던져진 신세, 언제 비라도 쏟아질지, 빈번하게 출몰한다는 도적 떼가 습격해 올지, 사나운 들짐승들이 어느 어둠 한구석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불안감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 못 이루는 밤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무렵 문득 외로움이 사무치고,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울컥하고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패기만만했고 자신감과 야심으로 치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야곱이었습니다. 한때 잠시나마 자신의 권모술수와 끈질긴 승부욕으로 형 에서를 꺾고 아버지 이삭의 장자권을 가로채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제 와서 그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그 결과 자신의 능력으로 여겼던, 그래서 자신을 지금껏 승리로 이끌었던 영민함과 계략과 강한 승부욕 때문에, 그렇게 거둔 성공 때문에 증오와 복수심에 찬 형 에서의 날카로운 칼끝을 피해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고 오늘 이 무섭고 고독한 밤을 지새우게 된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꿈 야심 패기가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보장해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도피하는 신세가 되다니, 지난날의 치졸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 고였는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외롭고 괴로운 밤! 돌베개에 머리를 얹고, 불안과 회한과 두려움으로 깊은 절망의 심연을 경험하던 그 밤, 바로 그 밤에 ‘야곱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하고 오늘 본문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또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전해 듣기만 하던 그 하나님을 바로 지금 야곱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기서 놀라운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 절망의 순간은 인간에게 다른 차원의 세계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민감한 상태로, 가장 절박한 심정으로 구원과 희망을 향해 자신을 내놓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그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그 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겪었던 가장 고독하고 불행한 밤이었으나, 그러나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을 한 밤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오늘 베델의 경험이 야곱 전체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날 밤,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여기 하나님이 분명히 계셨는데도 나는 미처 그것을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실패와 좌절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쓰러져있던 그 불행의 밤 그 자리에, 바로 그 순간에 조상들에게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분명히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하는 이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산체험이자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자각입니다.

이 새로운 신 인식, 이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자각! ‘그것은 하나님은 고향집 예배 처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처절한 현장에서 삶의 궁극적 고뇌 속에 함께 계신다’ 하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정해놓은 공간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의 그 고난 현장 속에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지속해서 제시하는 하나님 체험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집트 압제로부터 절규하던 하피루들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못하시고 결국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까? 야곱은 루스라고 불리던 그곳을 베델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번역 성서는 베델로 기록하고 있지만 개역개정은 벧엘로 기록하고 있는 ‘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벧(beth)과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el)이 합쳐져 벧엘(bethel), 말 그대로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빈들이지만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신다’ 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베개로 삼았던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으며 그곳, 그 사건을 기억하기로 합니다. 빈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이 놀라운 경험이 야곱의 평생을 이끌어가도록 한 것입니다.(35장)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또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내내 야곱과 같이 살았던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야곱이 훗날 가족들과 함께 베델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며 다시금 하나님과 만났던 그 경험을 떠올리듯, 그분은 지난 시절 그 어렵고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고 늘상 고백하며 감사해하신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분은 지난 6월에 하나님 품에 안기신 박희봉 권사님입니다. 2019년 설악산으로 베드로회 나들이하러 갔을 때, 권사님과 오색약수에 앉아 오래도록 권사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 말고 박희봉 권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다시금 권사님의 회고록 들여다보았습니다. 회고록을 읽다 보니 오늘 본문 야곱의 이야기보다 권사님의 삶이 훨씬 더 처절하고 절박하고 파란만장한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독립군이 되고자 만주를 찾아갔는데 독립군이 해산하는 바람에 예상치 않게 벌목일을 하게 되고 이마저도 오래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는데 일을 회상하며 권사님은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내 고집대로 만주에 남았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텐데, 하나님이 나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만주에서 나를 끌어내셨다’ 이 투박한 고백에서 야곱의 고백이 스쳐갔습니다. 특별히 1945년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되어 전쟁에 나갔다가 8월 15일 해방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영하고 또 소련군과 피난민 사이에서 생사를 오가며 300리 귀향 여정을 떠났던 권사님의 이야기는 막막한 벌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두려움에 떨던 야곱의 이야기와 함께 떠올라 절절한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1985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늦깎이 신앙인이 되신 권사님은 단돈 50원을 손에 쥔 채, 함경북도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오셨던 경험을 두고두고 떠올리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때 내 곁에 계셨는데, 그때는 내가 그것을 미처 몰랐다’, ‘지금 와서 보니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하고 고백하셨습니다. 권사님의 고백이 바로 야곱의 고백인 것입니다. 야곱과 마찬가지로 이 고백과 깨달음은 평생토록 권사님의 삶과 신앙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빈 벌판 고통과 불안의 장소 그 처연한 고독감과 좌절 절망의 그 날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다고 하는 이 야곱의 고백은 비단 지금부터 3,800여 년 전에 있었던 고대의 신화나 전설만은 아닙니다. 돌베개 베고 지낸 야곱의 그 밤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그 밤, 오늘 우리의 삶의 주위에도 그 고독과 절망의 밤을 보내는 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네 모두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한 단면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인생살이에서 몇 번쯤은 겪어야 하는, 겪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삶의 체험이 아닐까요?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은 고독합니다.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이웃도 없고 친구도 없고 허허벌판 살을 비비고 사는 가족조차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들이 우리들 인생에는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정말 뚫고 나아가기 어려운 벽에 부딪혀 절망감에 주저앉고 싶은 경험을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인생살이에서 몇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절망과 고독, 고통의 밤은 단순히 불행했던 순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밤 그 외롭고 괴로운 그 밤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 데도 내가 그것을 미처 몰랐구나!” 이 야곱의 고백은 그런 참혹한 고통과 처절한 좌절의 순간에 우리 인생을 새로운 가능성에 세우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고민해 볼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을 선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보면 에서가 무엇인가를 크게 잘못하거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멋있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검소하고 소박하며, 비탈진 산길로 다니며 다져진 단단한 체구를 가진 남성다운 사나이로서, 결코 성격상 복잡하게 엉킨 데가 없는 순수한 자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을 의심할 줄을 몰랐습니다. 동생 야곱이 팥죽으로 자신을 유인할 때, 그는 결코 의심해 보지 않았습니다. 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와 매우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것을 획득하기 위해 형의 약점을 이용하고, 눈먼 아버지를 속이는 약삭빠르고 교활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고 야곱을 선택하시고 이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열어가셨던 것일까요? 혹시 이런 의문 가져보신 적 없습니까? 에서의 입장에 서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어? 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일관된 입장에서 이를 살펴보면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의 현현은 ‘그 인물의 훌륭한 인격이나 도덕적 완결성’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두 흠결이 많은 이들이었고, 성서 또한 그것을 숨기거나 가리지조차 않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현현 사건은 삶의 한가운데서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간절히 요청하는 자에게만 임한다는 것입니다.

체구가 건장하고 인정이 있으며 효심 있고 인간미가 풍성한 ‘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미 충분히 가지고 누렸던 ‘에서’,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날 간절한 필요를 느끼는 못했던 ‘에서’가 아니라 불안하고 왜곡된 인격이나마 그의 깊은 내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야곱’, 즉 그의 삶의 깊이에서부터 하나님을 찾고 있는 ‘야곱’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들과 만나시며, 인간의 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 그러므로 늘 인간의 번뇌와 고통에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야곱이 바로 이스라엘의 자화상이고,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오늘 야곱의 새로운 신 인식! 야곱의 새로운 하나님 자각! 이것은 분명 신에 대한 혁명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성공의 자리에만 있다, 하나님은 행복한 자리에만 계신다, 하나님은 늘 승리하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과만 함께 하신다.’ 이게 인간의 종교이지 않습니까? 이게 오늘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신앙적 이데올로기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축복과 성공의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이 야곱의 밤 그 돌베개의 밤 그 좌절과 고독의 밤은 신이 없다는, 신 부재의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징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서적 신앙은 바로 그날 밤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결정적 순간이라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야곱의 입을 빌려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현실에서 야곱과 같이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긴긴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행여 우리들 속에 지금 그렇게 돌베개 위에 머리를 누이고 있는 이는 없나요? 행여 우리 속에 그 깊은 좌절과 절망의 심연에서 눈물짓고 있는 이는 없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그 순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습니까? 돌베개와 하늘 사닥다리 그것은 결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돌베개의 고통과 눈물 없이는 그 쓰라린 불행과 절망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얻기 어렵다는 점을 오늘 야곱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야곱의 앞길은 아직도 파란만장 무수한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극복해 가면서 뜻있는 인생행로를 힘차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날 밤 그 고통의 자리에서 만났던 하나님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앞길에도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수한 우여곡절과 수많은 난관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결코 무의미한 삶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날 밤 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분명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고통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들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