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잠시, 은총은 영원

6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1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벧전 5:6-11)

5월이면 생각나는 사람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는 ‘부활절 온 가족 초청 예배’를 부활 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드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일요일에 지키는데, 유월절은 음력을 따르기 때문에, 양력 3월 22일에서 4월 26일 사이에 부활절이 위치합니다. 따라서 올해처럼 5월에 부활절 예배를 드린 때는 없었습니다. 오늘 증언을 준비하기 위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서신서 본문인 베드로전서 5장을 묵상하는데, 5월이라서 그런지 특별히 10절의 말씀이 제게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같은 구절을 󰡔가톨릭 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고난은 잠시, 은총은 영원”이라는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제목만 들어도 은혜가 넘치지요? 그런데 이 제목은 지금부터 11년 전에 제가 했던 고백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합니다.

어제 5월 23일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 11주기 추모일이었습니다. 저는 노 대통령이 김해 봉하마을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당시에 부산 장모님 댁에서 뉴스로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미국에 살면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혼자 귀국해서 암 수술을 받고 잠시 요양차 부산 장모님 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부산과 김해는 가까운 거리이기에 조문하러 가려고 했었지만, 제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마음만 졸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해 5월에 하나님의 품에 안긴 또 한 사람의 유명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장영희 교수입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제가 서울대병원에서 5월 6일에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일 때였습니다. 5월 9일 TV 뉴스에 장영희 교수가 소천했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장영희 교수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뉴스를 들으니 제가 졸업한 대학의 영문과 교수라고 했습니다. 또한, 소천한 이유가 암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학교도 같고 병도 같아 그분이 누굴까 궁금했습니다. 누구이기에 소천했다고 TV 뉴스에까지 나올까 하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분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책을 보니까 장영희 교수는 1952년 9월 14일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보다 딱 10년 위였습니다. 1975년에 서강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에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85년에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5년부터 모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문학자이자 유명 수필가로 활동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장 교수는 보통 대학교수와 비슷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소천 소식이 TV 뉴스에까지 나온 이유는 이런 이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고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는 것이 세상이 그녀를 주목한 첫째 이유였습니다.

또 2001년에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는데,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끝에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004년에 척추에서 암이 발생하여 또 3년간 지옥 같은 투병 생활을 했고, 마침내 2006년에 회복했습니다. 이렇듯 암이 발병하였으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투병 와중에도 여러 책을 펴냈던 것이 세상이 그녀를 주목한 둘째 이유였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신체장애와 암이라는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2008년에 간암까지 발병하여 학교를 휴직하고 치료를 받다가 2009년 5월 9일에 소천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책 제목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입니다. 이 책은 그녀가 소천하기 전 투병 중에 준비되어, 소천한 직후 5월 15일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세상은 나를 신체장애와 암이라는 천형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천만에, 나는 천혜(天惠)의 삶을 살았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천혜, 하늘의 은혜란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보통 사람이 평소에 늘 누리고 있는 평범한 것들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가족이 있는 것, 직장이 있는 것 등등. 이 책의 한 글에서 그녀는 병상에 누워있던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네 면의 회벽에 둘러싸인 방 안에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면서 나는 참 많이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밤에 눈을 감고 있을라치면 밖에서 들리는 연고전 연습의 함성 소리, 그 생명의 힘이 부러웠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 가서 가르치는 일,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상—바쁘게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질투 나고 부러웠다.

이 글에서 그녀는 보통 사람들의 지루한 일상이 사실은 비상한 축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사실은 기적이고 살아갈 날들 역시 기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온 날들, 살아갈 날들은 모두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평범한 일상을 강제로 누리지 못하게 되자, 우리가 지금까지 마음껏 누리던 평범한 일상이 비상한 축복이었음을 실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침마다 가기 싫었던 학교와 직장에 나가는 일, 거기서 공부하고 일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 때가 되면 같이 밥 먹고 마음껏 웃으며 수다 떠는 일, 놀러 다니고 여행 다니는 일, 마스크 쓰지 않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일 등등. 그렇습니다! 매일 반복되던 일상이 권태로웠지만, 일상의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 보니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뒤늦게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현주 목사님이 당신의 시골집 재래식 변소 문에 걸어놓은 글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 시골집 재래식 변소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볼 때 보라고, 눈높이에 맞춰 이현주 목사님이 이런 글귀를 적어 놓으셨답니다. “당신이 두 발로 걸어와 여기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은총입니다. 기적입니다. 11년 전에 암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 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 거치적거리는 온갖 주사 줄, 소변 줄, 복수 주머니 등을 다 떼버리고 시원하게 샤워 한 번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행복이 행복인지를 모릅니다. 기적이 기적인지를 모릅니다. 은총이 은총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라고 우리에게 병을 주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주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그런데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합니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릅니다. 병 앞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 하나님께 애원하지만,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곧 잊어버립니다. 병이 걸렸을 때나 고난과 시련 중일 때는 일상이 은총이었음을 깨닫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또 예전과 똑같아집니다. 세상에는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과 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망각합니다. 이렇듯 거꾸로 사니까 우리 삶은 문제투성이입니다.

제가 오늘 증언 제목을 “고난은 잠시, 은총은 영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실제 삶에서는 “고난은 영원하고 은총은 잠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그 고난 속에서 오히려 은총을 보기에 “고난은 잠시, 은총은 영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우신 김용기 장로님께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장로님, 행복하십니까?” 논두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로님이 문득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감사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은총이고 선물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습니다. 행복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날이 어떤 날이든지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김현승 선생님의 시 <감사하는 마음>의 마지막 연은 이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춥니다(6절). 근심과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합니다(7절). 고난은 잠시요 은총은 영원함을 깨닫습니다(10절). 그래서 결국은 11절처럼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라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절기의 마지막 주일에 ‘부활절 온 가족 초청예배’를 드리며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되새기고 있습니다. 부활은 악인이 의인으로,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방관자가 참여자가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 무심하던 사람이 그 일상을 감사와 은혜로 받아들이는 변화 역시 부활한 새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고난은 잠시, 은총은 영원”이라고 자기 삶으로 고백하며 사는 부활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